271화 더 휴머니티(The Humanity)
64번째 죽음이 끝나고. 65번째 피안계로 돌아온 그 순간이었다.
“… 그만.”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다가오는 자드키엘을 멈춰 세웠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끝이군요… 저에겐 너무나,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자드키엘은 온몸에 힘을 탁 풀며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건 난데 어째 자드키엘이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어주는 한 편.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내 인생을 반추해 봤다.
‘나는… 어떻게.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일어났던 사건.
그리고 만났던 인물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려봤다.
‘할센베르크 변경백. 레이라. 그윈. 제나. 제논. 세스나. 설백. 알드콘. 크라네이드. 스칼로. 카르할라스와 적랑. 엘프리데…….’
그 외 기타 등등.
새삼 나 같은 찐따새끼 치고 많이도 엮였구나 싶다.
‘아아. 그래. 똥털. 똥털도 있었지.’
가장 중요한 다단계업자년을 잊어먹고 있었군.
나는 피식 조소를 짓는 한 편, 가슴 깊이 안도했다. 아직 굵직한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해서 그렇다.
그러나 직후, 입가의 웃음이 싹 가셨다.
‘그래서 똥털의 원래 이름이… 뭐였지?’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는데.
아무리 필사적으로 생각해도… 그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득한 절망감이 발밑에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멍청한 탄성을 흘렸다.
“… 아. 아아.”
그 전에는 이상하다고도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 수많은 전조들이 뒤늦게 뇌리를 후려쳤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제논과 제나를 분명히 알지만, 제나도 제논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피안의 악몽에서 그걸 인지했던 기억이 있다.
‘단순히, 건망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제 보니 아니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너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냐. 정용아.
한수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어른거렸다.
―아직은… 모두 기억하고 계시죠? 까마귀님.
자드키엘이 피안계에서 중얼거렸던 말도 떠오른다.
―아까부터 디아나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더라?
한수호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집요하게 귓전을 울렸다. 수없이 겹친 그의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강타했다.
어느 순간, 명경지수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멍해진 정신으로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흐흐. 흐흐흐흐.”
그래. 미쳤냐?
내가 제논과 제나를 건망증으로 잊어버릴 리가 없다.
아무리 빡통이라도 그렇지. 내 이세계 인생 최대최악 비극의 주인공들인데 말이야.
그런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의 기억을… 내가 함부로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하하. 으하하하.”
나는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벌레들에 파묻힌 채 실성한 양 웃었다.
‘인간성의 마멸’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이 자리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젠… 제발 죽지 마세요. 까마귀님.”
문득 자드키엘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아귀를 어루만졌다.
눈부신 빛에 휩싸인 자드키엘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처럼 목숨을 함부로 사용하시다간.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조차… 결국 잊고 말아요.”
그렇다.
인간성이 마멸된다는 건. 하나씩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증거. 살아온 기억들을 말이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03시 11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피안계에서 다시 현실세계로 넘어왔다.
나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정말 족같이 아름다운 날이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지난 64번 때도 항상 그랬듯. 한수호는 65번째 반복되는 대사를 치고 있었다.
나는 곧장 스킬을 영창했다.
“글레이프니르.”
촤르르륵! 태평하게 대사를 치던 한수호는 그대로 속박플레이의 현장에 빠졌다.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목을 대검으로 후려쳤다.
퍼걱! 질펀한 파육음이 울렸다. 그의 목은 거칠게 뜯겨나가 뼈무덤 사이로 처박혔다.
“아… 오프닝 대사를 스킵해 버리네… 상도덕도 없는 새끼…….”
한수호는 잘린 목으로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퍼서석! 사슬에 묶여 꿈틀거리던 한수호의 육체가 시커멓게 부서져 내렸다. 이내 스파크와 함께 한수호의 목 아래로 새로운 육체가 구성되어 갔다.
“시작부터 필살기부터 갈기는 거 보니. 와리가리 좀 쳤나봐? 어디 보자…….”
한수호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혼자 중얼거렸다.
그 사이 새롭게 태어난 육체로 기지개를 편 한수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그새 65번째 트라이냐? 징글징글하다 너도.”
“… 뭐. 꼬우면 그쪽이 포기하고 자살하든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내 목숨이 벌써 30개 가까이 쌓였는데. 모를 줄 알아? 그래도 도저히 포기할 생각은 안 드나 보지?”
“야.”
나는 잘난 듯이 떠벌거리는 한수호의 말을 잘라먹었다.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그에게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칼끝을 그에게 까딱거렸다.
“천하의 한수호가 뭔 혓바닥이 그리 길어. X발 쫄리냐?”
“…….”
“아가리 놀리지 말고. 칼이나 놀려.”
파지직! 한수호의 대검에서 검붉은 화염과 함께 맹렬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한수호 명명, ‘각성 한수호’의 전조였다. 그도 내 기세를 알아채고 시작부터 본 실력을 내려는 것이다.
“하핫. 이래서 널 싫어할 수가 없다는 거야. 정용아.”
한수호는 선언했고. 그대로 행했다.
콰아앙! 콰쾅! 노도처럼 세 방의 검격이 몰아쳤다.
폭발소리보다 빠르게 당도한 멸망의 대검이 내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뒤로 각기 다른 궤도에서 베스타크와 에스파다가 날아왔다.
“크으으…!”
첫 번째 한 방은 반응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쌍검의 질주는 여전히 시야에 담지도 못했다.
65번째 도전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다. 놈은 아직도 나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괴물이었다.
“그래도 새꺄. 지금까지랑은… 좀, 많이 다를 거다…!”
네가 500년 역사와 전통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괴물을 자처한다면.
나는 그냥… 문자 그대로 괴물로 변해서 상대해주겠다.
‘이제 됐어. 생각은 그만두자.’
죽음을 반복해? 흉마를 많이 쌓고 사용해?
인간성이 사라져? 괴물이 돼?
족까 X발. 아무려면 어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자진해서 괴물이 돼주지.
“… 어울리지도 않았어. 복잡한 생각 같은 건.”
애초에 복잡할 게 뭐가 있냐.
나는 루시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고. 그녀가 평소처럼 당당하게 나를 향해 웃어주길 바라고.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바람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그리고 루시는 이 세상의 존속을 원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인간을 그만둬야 한다면.
사람 때려 쳐. X발 거.
“우뤼이이이이!!”
나는 인간을 그만두는 괴성과 함께 스케어크로우를 발동시켰다.
꾸드득, 우드득! 관절이 사정없이 비틀리고, 흑익에 감싸인 육체가 위로 뻗어 올라갔다.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짜릿한 고양감에 휩싸여 정신이 아찔해졌다.
“푸하아아!”
스케어크로우로 변신을 마친 나는, 입을 벌리고 희열에 찬 한숨을 쏟아냈다.
그르렁거리는 괴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고로 HIGH한 기분이구나아아!!”
놈에게 돌진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연화보다도 빠르게 한수호의 지척에 도달했다.
그 스피드에는 아무리 한수호라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파가각!
한 템포 늦게 굉음이 터지며 허공에 다섯 줄기의 질풍이 일었다. 한수호의 갑주가 그 궤도에 따라 처참하게 박살났다.
콰콰콰쾅! 충격의 반동으로 한수호의 신형이 대포알처럼 튕겨나갔다. 피를 흩뿌리며 뼈무덤에 처박힌 그는 반대편으로 튀어나와 다른 뼈무덤까지 파고들었다.
“크하아!”
퍼걱! 한참을 뼈무덤 속에서 허우적대던 한수호의 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그 손 밖에 남은 부위가 없었다. 뒤늦게 스파크가 일렁거리며, 한수호의 몸뚱아리가 손목 아래로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크으. 이건 좀… 긴장할 수밖에 없겠군. 진심으로 놀랐다 정용아.”
재생을 마친 한수호는 박수까지 치며 그렇게 말했다.
한수호는 적어도, 지난 65번의 전생에서 단 한 번도 빈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수호는 시종일관 입가에서 떠나지 않던 미소를 처음으로 지웠다.
“이제 3단계 변신… (진)초각성 SSR 한수호의 위용을 보여줄 때인가?”
내뱉는 말은 여전히 농담기 다분했지만. 그 뒤에 일으킨 현상은 전혀 농담기가 없다.
콰아앙! 한수호를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폭발했다. 한수호의 온몸에서 칠흑의 스파크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며, 눈과 머리카락이 피처럼 진득한 붉은빛을 띄기 시작했다.
“보여줄게. 내가 사용하는 유일한 마력기술. 나름 내 필살기다.”
한수호가 디아나의 옥좌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칼날의 찬가.”
꾸드드득.
바닥의 해골무덤 틈새로 무수한 에스파다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역병처럼 퍼져나가며 하얀 검신이 우후죽순 솟아올랐다.
이내 화원 전역에 빽빽한 골검이 순식간에 가득해졌다. 족히 1천 자루는 넘어 보이는 까마득한 칼날의 숲이다.
“이 많은 검들로 내가 뭘 할 거 같냐. 정용아?”
수호 형님은 붉게 물든 눈을 희번득거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양손의 흑백 손톱에 멸망의 화염을 둘렀고. 대답 대신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아아아!!”
한수호도 딱히 내 대답을 바라진 않은 듯했다.
오히려 내 저돌맹진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고. 이내 유쾌하게 목청을 높였다.
“그래. 모르면 맞아야지!!”
우우우웅.
화원 전역에 둔중한 공명음이 울렸다. 이내 파르르 떨리던 모든 에스파다가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나는 달려들던 신형에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일제히 떠오른 1천개의 검들이 어떻게 될지… 히어로 센스가 없어도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X발!!”
나는 욕지기와 함께 사방으로 시야를 넓혔다.
어디에 고개를 돌려도 하얀 골검이 하늘을 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까마귀 폭풍을 쓸까…?!’
순간적으로 그런 충동이 울컥 들었지만. 이내 이빨을 악물고 부정했다.
까마귀폭풍을 사용하면 강제적으로 스케어크로우가 해제된다. 그러면 저 필살기는 수비할 수 있어도. 사실상 그 뒤로는 죽음이 확정된다.
그러니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전부 쳐낸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나도 고스톱 쳐서 여기까지 도달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
‘간다!!’
나는 뼈무덤의 능선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손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수천 개의 검이 오로지 나를 향해 쏟아졌다. 화염의 손톱 세례에 속절없이 튕겨나가거나, 바닥에 박혀 그대로 부러져갔다.
“그아아아아아!!”
괴성을 질렀다.
칼날의 포화가 점입가경이 되었다. 우박처럼 칼날의 비가 내린다.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아지경 속에서, 나는 하얀 지옥을 베고 또 베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