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진짜 광기
죽기 직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반짝 유행했던 ‘진짜 광기’라는 표현이 있었다.
진짜 광기란 대체 무엇일까.
실성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
알아먹지 못할 섬뜩한 농담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것?
나도 모 광대영화를 보고 나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한수호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다음에 또 보자. 정용아.”
그런 일상대화를 들어도, 등줄기에 격렬한 소름이 올라오는 것.
그게 진짜 광기다.
* * *
“… 괜찮으신가요, 까마귀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번쩍 떴다.
“커허억!”
나는 미친놈처럼 사방을 둘러봤다.
“허억… 허억…!!”
좁은 장방형 공간. 거기에 가득 차있는 수많은 벌레들.
그 한가운데에 서있는 나와, 멀찍이 공중에 떠있는 자드키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아. 아아.”
죽었다. 죽어서 피안윤회가 발동된 것이다.
이 끔찍한 공간이 이렇게 안락하게 느껴질 줄은 나도 몰랐다.
뭐, 한수호가 기다리는 해골색 지옥에 비하면. 어디라도 무릉도원처럼 느껴지긴 하겠지.
“저… 까마귀님. 현실로… 보내드릴까요?”
자드키엘은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지친 눈으로 그녀를 흘깃 올려다봤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게 지그시 박혀 있었다.
나는 멍하니 생각을 거듭하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있을게. 괜찮지?”
“… 네. 잠깐이라면, 문제는 없습니다만.”
“그래.”
그 뒤론 침묵이 이어졌다.
사가각, 사각. 벌레들이 내 살점을 갉아먹고 기어 올라오는 소리만 들려왔다.
“…….”
“…….”
이내 상반신이 전부 벌레들로 가득해졌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온몸을 지배했다. 눈동자 위로 이름 모를 풍뎅이 같은 것이 지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망부석처럼 얼어 있었다.
“까마귀님. 이곳에 너무 오래 계시면… 정신이 마멸됩니다.”
자드키엘이 이내 걱정 어린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피식. 나는 웃었다. 멍하게 자드키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드키엘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번에도 한동안 많이 만날 거야.”
“…!”
“일이 그렇게 됐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내가 중얼거리자 자드키엘의 손이 퍼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절머리를 냈다.
“저도 이젠… 까마귀님을 이 이상 보는 게 무서워졌어요.”
파아앗. 세상이 눈부시게 빛나며 벌레들이 씻은 듯이 물러갔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03시 11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 아.”
순간 심장이 크게 맥동했다.
다시 돌아왔다. 나는 퍼뜩 시선을 눈앞으로 고정했다.
“정말 족같이 아름다운 날이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한수호는 세 번째 반복되는 대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죄악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까. 디아나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런 X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되살리려는 놈들은 말이야.”
세 번째 들으니 이젠 슬슬 정신이 해탈 수준에 이르렀다.
한수호의 저세상 유머감각에 탄복하며, 겸허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전부, 지옥에서 불타버려야 해.”
마지막 대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멸망의 대검을 뽑아, 하늘 높이 던져버린 상태였다.
휑해진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항복의 표시였다.
“… 음?”
한수호의 의문 어린 탄성과 함께 대검의 칼날이 심장을 쑤셨다.
푸확! 대검의 끝단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크… 허억.”
나는 울혈과 함께 신음성을 토해냈다. 뻥 뚫린 가슴의 구멍으로 박살난 갈비뼈와 심장 쪼가리가 튀어 올랐다.
온몸이 고장나 삐걱거린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뭐야. 왜 이래? 시작부터 갑자기 포기를… 아.”
한수호는 쓰러진 날 보고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이내 제 혼자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그는 이마를 부여잡고 실성한 듯이 킬킬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희번득거리는 눈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몇 번 갔다 왔구나. 그런 거지?”
“… 그래… 이, 새끼야.”
나는 한수호를 마주보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싸워도 승산이 없다. 그것을 전생에서 뼈저리게 느낀 상태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전생에서 한수호가 말한 대로 할 수밖에 없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거다.”
죽음을 반복해서 흉마를 최대한 확보한 뒤. 스케어크로우로 어떻게든 끝장을 본다.
비록 그 결과 한수호의 흉마를 쌓아주는 꼴이 되더라도… 이것 외에는, 더 이상 어떤 방도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덥석. 내 살가죽 위로 솟아오른 한수호의 대검 날을 온힘을 다해 붙잡았다.한수호가 순간 당황하며 검을 뽑아내려 했다. 힘 스탯이 밀리다 보니 금세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찰나의 발을 묶었으니 충분하다.
“나도 네가… 호락호락 목숨 쌓게 두진 않을 거다.”
내가 한 마디 하는 것과 동시에 푸확! 파육음이 울렸다.
이번엔 한수호 쪽이었다.
“… 어?”
한수호가 시선을 자기 몸통으로 내렸다.
멸망의 대검이 한수호의 가슴팍을 뚫고 솟아나 있었다.
한수호는 한동안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을 가만히 내려다본 다음에야 아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뭔가 했더니. 처음에 하늘로 던진 그거군. 방심하다 뻔한 술수에 당해버렸네.”
그는 대수롭잖게 껄껄 웃어 넘겼다.
그리고 우드드득! 내 몸에 박아놨던 대검을 그대로 쳐올렸다. 온몸의 장기가 반으로 갈라지는 느낌이 훅 밀고왔다.
이내 모든 감각이 일시에 차단되었다.
“역시 몇천, 몇만 번을 죽어도. 죽는 감각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내뱉는 말과 달리, 한수호는 온몸의 관절을 뒤틀며 살아나는 그 순간에도…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까마득한 광기에 물든 검은 눈동자. 그것이 내 속내를 핥듯이 쳐다보고 있다.
“너도 그렇지?”
의식이 빠르게 침잠되었다.
* * *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도 먼저 자드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버, 벌써… 또 오셨나요 까마귀님?”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자드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컵라면도 안 익을 단시간에 사출된 것이 의아한 모양새다. 앞으로는 나를 3분 짜장 박정용이라고 불러주렴. 자드키엘.
“… 앞으로 말이야. 수십 번 정도 계속 죽을 거다.”
“수, 수십…….”
나는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주는 대신, 일방적으로 말했다.
자드키엘은 아찔한 얼굴로 낮은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거창하게 놀라진 않았다.
전에도 비슷한 기행을 내가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처럼… 일부러 흉마를 쌓으시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별개로 신호하기 전까진… 죽자마자 아무 말 말고 바로 부활시켜줘. 알았지?”
“하,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죠? 흉마를 쌓는다는 것은 즉…….”
자드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뭐. 또 알아먹지도 못할 헛소리해서, 사람 마음 심란하게 하려고? 어림도 없다.
나는 묵살의 의미로 눈알을 험하게 부라렸다. 그녀는 곧잘 알아듣고 침묵했다.
“알았지?”
“… 네. 알겠습니다.”
자드키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내게 날아와 손을 붙잡았다.
“… 아직은… 전부, 기억하고 계시죠?”
문득, 되살아나기 직전, 자드키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금세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리멸렬한 살육극의 피해자 역할을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그딴 자잘한 사항들은 잊을 수 밖에 없다.
* *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이번으로 네 번째.
더 이상 전과 같은 꼼수는 일절 통하지 않았다.
연화와 세븐 소드 피어스, 월드 엠브리오로 놈을 어떻게든 교란하고 틈을 만들려고 했지만. 전생에서도 그랬듯, 잔재주가 일절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재주의 영역에서도 한수호가 나를 압도했다.
“1데스 씩 맞딜이라. 이러면 내가 손해보는 장사 아닌가? 하핫.”
이번에도 월드 엠브리오와 글레이프니르로 확정 사살은 할 수 있었지만. 이후 속수무책으로 죽었다.
찰나에 이루어진 수십 합의 치열한 공방. 그 끝에 퍼억! 내 머리가 한수호의 대검에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5번째 회귀. 처음으로 놈의 속공에 3초 이상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틈을 보이자 놈은 저돌적으로 돌격해왔고. 아크로바틱하게 몸을 비튼 한수호가 가슴을 걷어찼다. 갈빗대가 모조리 으스러졌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헐떡거리는 내 폐부로 한수호의 손이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나와 같은 색이군. 새삼 신기한데?”
뿌드득. 놈이 내 심장을 뽑아냈다.
으적. 씹어 삼켰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열한 번째 회귀. 드디어 한수호와 제대로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버프를 풀도핑 했을 땐 이젠 내가 압도할 수준이었다. 무려 이번 생에만 놈을 세 번이나 죽였다.
고무적인 결과였지만, 결국 네 번째 살아난 한수호에게 죽었다.
“아… 이런. 개손해봤네? 좀 제대로 해야겠어.”
의미심장한 한수호의 말과 함께 내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잘리는 순간 내 눈은 아마 부릅뜨여 있었을 것이다.
놈의 일격을 히어로센스조차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열두 번째 회귀.
…
…
… 한수호.
이 개새끼가… 지금까지 나를 봐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완전히 놀아났다. X발.
“몇 번이나 왔다갔는지 모르겠다만. 좀 친다?”
내가 초장부터 완전히 한수호의 검격에 익숙해진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특유의 광기 어린 미소와 함께 이런 말을 했다.
“그럼 나도 최종보스답게… 2차 각성을 해볼까?”
외형적으로 딱히 변한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화염만 일렁거리던 그의 대검에서, 검은 스파크가 튕기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너도 기대하고 있었지? 최종보스는 모름지기 변신을 해야 하잖아.”
하지만 그 말이 내 생에 마지막으로 들은 한수호의 말이다.
이어진 공격은… 보고도 피할 수가 없는, 불가해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21번째 회귀.
상대가 안 된다.
“머리, 머리, 머리! 잽잽 펀치! 훅!”
저게 뭐지?
왜. 어째서냐. 분명 피지컬 계열 능력치는 동등하거나 내가 위일 텐데.
왜 나는 한수호의 검끝을… 쫓을 수 없지?
“우리 정용이, 배에 힘 안 줬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귀신같은 움직임이 나오는 거냐.
왜 우측을 막으면 좌측에서 주먹이 날아오지? 검을 내려놓고 주먹으로 싸우는 한수호조차 따라잡을 수 없지?
“뭐긴 뭐야? ‘각성 한수호’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거지. 응.”
순수한 주먹질로 나를 패 죽인 한수호는, 내 몸뚱이에 걸터앉아 그런 말을 남겼다.
그러면. 저 움직임의 비밀을 풀려면…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죽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아득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나를 심연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이번엔 흉마가 엄청나게 쌓이겠군. 네 절망감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정용아.”
한수호가 죽어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사실이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공포로 이빨이 딱딱 부딪쳐대서 말할 기회를 줘도 못 말했을 거다.
“글레이프니르 때문에 확정으로 한 번씩 죽는다 치고. 지금부터 네 죽음으로 두 목숨 분량 이상의 흉마가 쌓이면… 결국 내가 개이득인 부분인가? 하하핫.”
한수호는 내 다리를 붙잡고, 쥐불놀이 하듯이 여기저기로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앙! 뼈무덤 여기저기로 내 살점과 핏방울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온몸이 뼛조각에 섞여 으스러지고, 이내 정신을 놓았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35번째 회귀.
드디어 각성 한수호의 첫 공격을 막아냈다.
그뿐인가. 놈의 유령 같은 스텝을 역추격해, 반격까지 가하는 데 성공했다.
“일취월장하는구나 정용아. 선생님은 기쁘다.”
하지만 서걱. 직후 이어진 흑색 섬광에 내 몸은 5등분으로 도륙났다.
… 이 한 번의 반격이, 거인의 한 발자국이라고 믿고 싶다.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57번째 회귀.
아니… 58번째였나?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흉마가 이렇게까지 막대하게 쌓이자, 역시 눈치가 둔한 한수호도 회귀한 직후 곧장 알아챘다.
“하핫. 새끼… 그새에 많이도 죽었네. 30목숨이 넘게 쌓였는데? 앞으로 날 230번 정도 더 죽여야 돼. 가능하겠어?”
이제 한수호는 초장부터 나를 전력을 다해 몰아붙였다. 압도적인 실력차로 내게 절망감을 줘서, 흉마를 최대한 뽑아내려는 작전으로 변경한 듯했다.
나는 글레이프니르로 확정사살을 한 것 외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
…
64번째 회귀.
한수호는 몇 번이나 시간이 돌아와도. 몇 번이든 시종일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비웃는 듯한, 혹은 연민하는 듯한… 애증 어린 표정을 말이다.
이번 생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정용아. 흉마를 쌓거나 사용하면, 인간성이 점점 깎여나간다. 이건 알고 있지?”
나는 어떻게든 한수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빼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죽고 싶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했다.
“그런데 인간성이 사라진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
그 말이라면, 피안계에서 자드키엘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처럼 모른다고 답했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한수호는… 조금 이상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나 말이야. 아까부터 디아나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더라?”
…
…
… 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부릅뜬 눈으로 한수호를 쳐다봤다. 그러나 한수호는 슬프게 웃으며,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지금 너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냐?”
우지직. 파육음과 함께 세상이 빙글 회전했다.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목이 날아간 내 몸이 흐느적거리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