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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69화 (245/280)

269화

“또 오셨네요. 까마귀님.”

내가 다시 눈을 뜨자, 주위 세상이 변해 있었다.

해골이 잔뜩 쌓인 공간 대신 벌레가 가득찬 장방형 공간. 멀찍이 공중에 떠서 나를 내려다보는 자드키엘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나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사각, 사가각. 목석처럼 가만히 서있으니 벌레들이 몸을 기어 올라왔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거칠게 온몸을 긁어댔다.

“그으으… 으아아아아악!!”

괴성을 질렀다. 분노와 울분에 찬 비명이었다.

콰직, 우지직! 주먹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주먹의 충격파로 벌레들이 파도처럼 마구 쏠려다녔다. 찌부러진 벌레들의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 까, 까마귀님? 왜 그러시나요?”

자드키엘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귀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주시했다.

거칠어졌던 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 내보내 줘. 지금 당장.”

나는 이내 영혼이 반쯤 나간 목소리를 냈다.

자드키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찡그린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게 스르르 날아오며 손을 뻗어왔다.

“지금의 까마귀님은… 무척 위태롭네요.”

파아앗! 자드키엘이 쥔 내 손부터 시작된 광휘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누구였는지. 왜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지를요.”

자드키엘은 여전히 이해 못할 한 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잠깐 아득해졌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03시 11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한수호는 문득 이런 말로 서두를 끊었다.

“정말 족같이 아름다운 날이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그 순간 나는 강제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역겨울 정도로 익숙하게 반복되는 대사. 똑같은 구도. 심각하게 울렁거리는 속.

나는 죄악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까. 디아나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런 X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되살리려는 놈들은 말이야.”

평소 같으면 한수호의 저세상 유머감각에 탄복하며 헛웃음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압도적인 분노 때문에 숨도 쉬지 못했다.

“전부, 지옥에서 불타버려야 해.”

마지막 대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파우치를 뒤져 세계의 태동을 꺼내든 상태였다.

“월드 엠브리오!”

나는 곧장 스킬을 영창했다.

[스킬 발동: 월드 엠브리오]

[환산 마력에 의해 정지된 시간: 1.5초]

멈칫. 날아오던 한수호의 대검이 내 목을 치기 직전에 멈췄다.

나는 그 무서운 기세에 마른 침을 한 번 삼켰고. 이내 태동과 에테르, 기공술까지 모든 버프를 활성화시켰다.

‘최대 출력으로 간다!’

시간이 다시 돌아간다. 나는 미리 뽑아둔 멸망의 대검을 냅다 휘둘렀다.

카아아앙! 내 대검이 한수호의 대검과 맞붙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화끈한 열기가 얼굴로 몰려왔다.

“크아아아!”

미리 알고서 막아냈기에 전처럼 맥없이 밀리진 않았다.

아니. 이번엔 오히려 공격이 막힌 한수호 쪽에서, 조금씩 밀리다가 부리나케 뒷걸음질 쳤다.

“… 뭐야?”

한수호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내가 그의 공격에 반응한 속도가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미래를 예지한 듯한 움직임이었으니까.

아무리 히어로 센스라도 이렇게 빨리는 반응하지 못한다. 그 사실은 한수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하. 으음. 그렇군.”

키기긱! 대검을 비틀어 흘려낸 한수호가 빠르게 후퇴했다. 일정 거리를 벌린 그는 전처럼 여유로운 행색으로 잠깐 주먹을 쥐락펴락 해봤다.

문득 그는 호오, 하고 낮은 탄성을 흘렸다.

“맞네. 흉마가 한 번 줄었다가, 다시 채워진 흔적이 있어. 시간이 돌아왔구나.”

역시나, 한수호는 금세 전말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비아냥거리듯 시니컬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른거렸다.

“방금 분명, 기억을 수복하는 과정이 딱히 없었지?”

“뭐. 그래서 어쩌라고.”

“그렇다는 건 디아나가 남겨준 그 스킬을 사용한 거구나? 피안윤회 말이야.”

“…!”

x발 이 새끼. 뭘 숨길 수가 없네. 박정용학과 박사과정 공부 중이냐?

헥터 때도 느꼈지만. 누군가가 나를 발가벗긴 듯이 잘 안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일이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눌러 삼키고, 놈을 향해 대검을 냅다 던졌다.

“죽어 X발!!”

푸화악! 전처럼 멸망의 화염이 칼날을 밀어내며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대검은 붉은 유성처럼 날아가 한수호의 목을 탐했지만. 아쉽게도 한수호는 이미 검의 궤적에서 한참 이탈한 상태였다.

빗나갔으면 곧장 수비 준비다. 나는 신속하게 쌍검을 뽑아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기를 소중히 다뤄야지. 내가 큰맘 먹고 준 것들인데.”

불쑥. 놈이 어느새 내 코앞까지 쇄도했다. 장난스러운 탄식과 함께 대검을 마구 휘둘러 나를 압박해왔다.

콰앙, 콰아앙!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압박이 연신 쏟아졌다.

“글레이프니르!”

무아지경의 공방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나는 손을 뻗으며 외쳤다.

한수호는 나와 검을 맞대다 말고 황급히 백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으음. 저건 좀 위험하지.”

촤르륵! 사방에서 튀어나온 사슬들이 한수호를 집요하게 쫓았다.

한수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것들을 피해냈다.

지리멸렬한 도주극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내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스킬과 육탄전의 협공에, 마침내 한쪽 발을 사슬에 내주고 말았다.

‘됐다!’

철커덕! 한수호의 온몸을 글레이프니르가 속박했다.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연화를 발동했다.

스슥. 시야가 격변했다. 눈앞이 제대로 구성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나는 미친 듯이 쌍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푸확! 촤자작! 핏방울이 튀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한수호의 팔이 하늘로 날았다. 다리가 해골 틈바구니를 나뒹굴었다. 허벅지의 살점이 내 복부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고. 한수호의 왼쪽 눈알이 에스파다에 박힌 채 떨어져 나왔다.

“끄… 그르르륵…….”

글레이프니르가 곧 해제되었다.

거기엔 인간의 형태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한수호가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 순간, 파지지직! 놈의 형태가 검은 스파크와 함께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 위로 벌떡대는 심장과 인간의 골격이 천천히 재구성 되어갔다.

“하하. 이건 뭐, 사실상 글레이프니르에 걸리면 사망 확정이네.”

허공에 생성된 해골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덕처덕 붙는 장기와 근육. 마침내 살점과 머리카락, 입고 있던 갑옷까지 되살아난 한수호가, 검은 눈을 번들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디아나도 좀 적당히 편의를 봐주지. 그거 너무 사기 스킬인 거 아니냐? 정용아.”

펄럭! 한수호의 갑옷에서 검은 날개가 뻗어 나왔다.

이번 기습은 날개 덕분인가, 지면을 박차는 소리조차 없다. 한수호의 칼끝이 내 눈을 쑤시고 나서야 가까스로 반응했다.

푸직. 섬뜩한 이물감과 함께 시야 반쪽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크아아아악!!”

나는 까마득한 고통과 공포로 비명을 질렀다.

양팔을 미친놈처럼 마구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한수호는 눈먼 칼날을 가볍게 피해내며, 농락하듯 검을 한바퀴 돌려 뽑아냈다.

우드득! 흐려진 한쪽 시야로, 검에 딸려 나온 내 안구와 신경다발이 보였다.

“끄… 으, 으으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눈깔을 쑤셔지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덕분에 생각보다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듀라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회, 회… 회복!’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태동을 사용했다.

두근, 하는 거대한 고동과 함께 몸의 상태가 모두 회복되었다. 한수호의 칼에 쑤셔졌던 안구가 거짓말처럼 아물었고,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하악…….”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 한가득 한수호를 담았다. 놈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무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태연작약한 한수호를 마주한 나는…

‘이런… X발…! X발!!’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새삼 처음부터 풀도핑을 하고 다시 붙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끄떡도 안 해? 나보다도… 죽음이 익숙하다고?’

이건 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능력치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경험과 센스, 그리고 올곧은 광기에서 오는 담력의 차이. 적랑과 싸울 때도 느꼈던 그 거대한 벽이 지금 한수호에게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무, 무섭다.’

이스그라드를 마주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압도였다.

그 때가 거대한 산을 마주한 감각이라면… 지금은 집채만한 호랑이를 눈앞에 둔 느낌이다.

산은 오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호랑이는 마주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 본능적인 공포였다.

“으아아아!!”

하지만 나는 그 절망과 공포를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어느 순간 수세를 전환해, 오히려 한수호를 몰아붙이고 조여 들었다.

‘… 그래도, 가능성은!’

한수호가 대검을 통한 묵직한 검격 위주로 싸운다면. 나는 여전히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공이 주무기였다.

전문 분야가 다른 이상 변수는 반드시 있다!

“죽어! 죽어 좀! X발 죽으라고!”

카캉, 카카캉!

나는 한수호의 사방팔방을 종횡무진했다. 놈의 틈을 찌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놈의 시야를 교란했다.

불꽃이 마구 튀었다. 내 시야에도 나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열심히 움직였다.

“좀 추하다 야. 정용아.”

문득 한수호가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카카캉! 내가 내지른 5연격이 모두 막혔다.

망연자실한 내 앞. 한수호는 어느새 대검을 집어넣고 나처럼 흑백의 쌍검을 들고 있었다.

“흑익의 변신 스킬이라도 써보지 그래. 응?”

투두두두! 압도적인 연격이 시야의 모든 부분을 점하고 쏟아졌다.

단숨에 태세가 전환되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허겁지겁 방어했다.

푸직, 푸확! 미처 포착하지 못한 공격들이 내 몸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거 자꾸 피나잖아 인마. 다크 레이븐이었나? 갑옷 두르고 날아다니면 좀 덜하겠지. 안 그래?”

키이잉!

마침내 한수호의 칼날의 뱀처럼 내 손을 파고들었다. 앗 하는 사이 그것이 내 손목을 잘라내 버렸다.

털퍽. 베스타크가 움켜쥔 손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뼈무덤의 비탈을 타고, 장난감처럼 굴러 떨어져 내린다.

“물론 사용은 못 하겠지. 피안윤회 때문에 흉마가 없으니까. 맞지?”

씨익. 한수호는 실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더욱 거세게 검을 휘둘러 나를 몰아붙였다.

다 알고 있었군. 나는 이미 놈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고. 놈은 그저 나를 놀렸을 뿐이다. 재미를 위해서 말이다.

“아… 아.”

전문분야였던 속도전에서도 압도당했다.

털썩. 나는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수호는 전투가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공격을 멈췄다.

“흐음.”

한수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르릉. 그릉.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끄는 소리가 사신의 웃음소리 같았다.

“우리 잠깐 충전의 시간을 가져볼까?”

번쩍. 한수호는 내 위로 대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멍하니 발아래 뼈무덤을 쳐다볼 뿐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다른 건 모르겠고. 역시 한수호는 한수호였다. 놈은 여전히 한 시도 아가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한동안 네가 죽음으로써 서로 윈윈하는 거야. 너는 스킬 연료를 충전하고. 나는 여벌 목숨을 충전하고. 딜?”

서걱! 단 한 방. 놈의 일섬이 내 몸을 대각선으로 갈랐다.

기울어진 시야 끝에 아직 쓰러지지 않은 하반신이 보였다. 벌컥벌컥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몇 번이든 죽여줄게. 네가 포기하거나… 폐인이 될 때까지.”

한수호는 널브러진 내 상반신에 다가와 손을 휘적거렸다.

작별 겸, 재회를 기대하는 인사였다.

“다음에 또 보자 정용아.”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저 한수호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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