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러브, 데스 + 크리스마스
수호 형님은 내게 새하얀 골검을 겨눈 채. 간곡하고 필사적으로 내게 명령했다.
“마녀를 죽여. 빨리 디아나를… 그만 편하게 해줘.”
나는 마른 침을 어렵사리 삼키고. 멸망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곧 수호 형님의 바람을 이루어줬다.
서걱.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의 궤적이 커다란 곡선을 그렸다,
일말의 저항도 없었다. 디아나의 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 윽. 아.”
털퍽. 디아나의 고통에 찌든 표정이 해골의 산을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입에선 연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 아. 아아아!”
문득 디아나가 입을 쩍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쿠우우웅!! 디아나의 망가진 육체를 중심으로 거대한 흑색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거대한 칠흑의 섬광이 옥좌를 중심으로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동시에 디아나의 몸은 검은 안개가 되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퀘스트 완료!]
[명칭: 마녀를 죽여라 ? 마지막 의식]
[난이도: 전설]
[상세: 인도하는 까마귀가 마침내 마녀를 죽였다. 마녀의 영원한 안식이 이루어졌다. 이제 세계는 까마귀의 마지막 선택에 의해, 그 종극을 달리할 것이다.]
[보상: 마녀의 계승자 선택권]
사방천지에 쌓인 해골들이 격렬한 지진에 요동치는 찰나. 퀘스트 완료창이 내 앞에 등장했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디아나에게서 퍼진 시커먼 파동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숨이 막힌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 하악!”
뭐지, 이 감각.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압도적인 무력감과, 절망적인 공포가 온몸을 쥐어뜯었다.
이 느낌은… 그래. 마치,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켰을 때 같다.
“아… 아…!”
압도적인 양의 기억과 감정의 홍수.
격렬한 파도가 미친 듯이 뇌를 후려친다.
나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악!!”
흘러들어오는 것들은 나의 기억과 감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디아나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수백 년 간 느꼈던 감정들이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분의 고통과 울분, 슬픈 기억들이… 한 순간에 내게 쏟아진 것이다.
“크아아아악!!”
이 고통은, 도저히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것이 문자 그대로 절망이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가 인생 모토인 나였지만. 이것은 굴러도 괜찮은 개똥밭이 아니다.
지옥이 실존해도 이곳에 비하면 스위트룸일 것이다.
“그악! 키아아아악!”
콰앙, 콰아앙!
쌓인 해골들에 머리를 마구 처박으며, 나는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죽고 싶다는 강렬한 갈망과, 다 죽이고 싶다는 살의만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압도적인 고통이 이성을 모조리 불태웠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찰나는 영원 같고. 영원한 찰나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디아나가 겪었던 일들이 마치 내가 직접 겪은 것들처럼 느껴진다.
―아빠는 절대로 죽지 않는, 나만의 좀비용사님이야!
감각이 뭉개지며 정신은 아득해졌다.
목소리. 처음 듣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헤헤. 아빠는 역시 싸울 때가 제일 멋있어!
곧 깨달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디아나였다.
디아나의 수백 년 어치 기억과 감정을 강제적으로 이해했다.
―아빠. 전부 내가 원해서 한 거야.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
어느 순간, 나는 놀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세상의 존속을 바라고 기꺼이 고통을 짊어졌다.
세상 전체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정말로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 아아!”
어느새 나는 머리를 처박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느낀 슬픔인지, 디아나의 감정이 뒤섞인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건 확실했다. 디아나가 지금껏 느꼈던 감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분노도 원망도 후회도 아니다.
압도적인 슬픔이었다.
―아빠.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슬퍼하지 마. 응?
그 슬픔이 향하는 대상은, 마녀가 줄기차게 부르짖는 ‘아빠’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언제나 ‘아빠’라는 칭호로 불렀다. 그 대상은 약 500년 전부터 언제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으, 으으윽!”
나는 끊어지기 직전인 의식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문제의 마녀 애비를 향해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고생했어. 지금까지 정말로 고생했다. 디아나.”
수호 형님이 디아나의 잘린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디아나의 기억 속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뼈로 만든 옥좌 앞에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슬픔에 잠긴 무표정으로 디아나를 쳐다본다.
―미안해 디아나.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하지?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지?
지금도 당장 울 것 같지만 절대 울지는 않았다.
디아나의 기억 속 한수호도 그랬다. 그는 디아나 앞에서 언제나 센 척을 했다. 그것을 디아나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애써 만들어낸 유쾌함이 디아나에게 거대한 슬픔으로 다가온다는 것. 그것을 한수호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젠… 편히 쉬어라. 뒤는 전부 나한테 맡겨.”
하지만 지금. 내 시야에 잡힌 한수호는, 디아나의 기억과 사뭇 달랐다.
그는 뒤틀린 웃음을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가 이내 새카맣게 허물어지는 디아나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퍼석! 디아나의 머리가 맥없이 부서져 내렸다.
“내가 끝내줄게. 전부 다.”
수호 형님… 아니.
마녀의 기사 한수호의 장절한 선언이 파열음에 묻혔다.
* * *
“아아.”
나는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떴다.
얼떨떨하게 목소리를 내봤다. 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정신이 들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지난 기억을 돌이켜봤다.
용제국에서 이스그라드를 때려잡고. 한수호의 인도에 따라 백검의 성당에 도착했고. 묵시의 기사들을 소멸시켜서, 마침내 디아나를 죽였지.
좋아. 일단 대부분의 기억은 정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아빠. 사람들을 싫어하지 마.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다만 중간 중간, 노이즈처럼 자꾸 누군가의 기억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마치 직접 겪은 기억처럼 생생한 그것은… 디아나의 기억들이었다.
―그러면… 안 돼. 아빠가 알려줬잖아.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면 안 된다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응? 아빠… 제발.
디아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윙윙 울렸다.
강렬한 감정이다. 슬픔. 걱정. 안타까움. 그 대상은… 마녀의 기사 한수호.
드래곤을 닮은 칠흑색 갑주 차림. 더벅머리의 한국인 남자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 아?”
혼재된 기억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인가.
우웅, 우우웅. 나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패널을 뒤늦게 포착했다.
[마녀의 계승식 ? 분기 선택]
사실 눈 떴을 때부터 있던 건데, 정신이 없다 보니 이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떠오른 패널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마지막 의식의 최종단계.
나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녀의 계승식: 최후의 선택]
[까마귀는 마침내 마녀를 살해하고, 마녀의 계승의식을 진행할 최후의 결정권을 손에 넣었다.]
[이 땅을 사랑했던 마녀는 영면에 들었다. 제1계의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까마귀의 마지막 선택에 따라 세계는 각기 다른 종극을 맞이할 것이다.]
[1. 불사의 마왕을 계승시킨다.]
[2. 불사의 마왕을 살해한다.]
[3. 계승을 완전히 포기한다.]
[완전붕괴까지 남은 시간: 12시간 16분 51초]
…
…
“뭐?”
나는 눈앞에 등장한 세 개의 선택지를 하염없이 지켜봤다.
연신 헛숨을 들이켰다.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선택지가 너무 황당무계했기 때문이다.
‘불사의 마왕을 살해? 계승을 포기?’
그 똥고생 해가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많은 걸 희생해서 왔는데.
진심으로 그딴 선택을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 아아아.”
하지만 이내 이해했다.
왜 이런 선택지가 등장했는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까지. 조금만 생각해 보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와… 이건, 진짜.’
그렇게 놓고 보니 오히려 놀랍다.
이 선택지들은 이곳에 도달한 뒤, 내가 떠올렸던 생각을 훤히 읽은 듯한 선택지들이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한가.
‘이 선택지를 준비한 건…….’
마녀의 기사 한수호. 나와 같은 불사신이다.
이 세상에서 내 심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게 바로 그놈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내가 할법한 행동패턴을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를 꼴딱 잤구나. 정용.”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가 소멸했던 뼈로 쌓은 옥좌 앞. 어둠 속에서 한수호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요거요거. 잠꾸러기 같으니.”
어느새 그는 머리를 제외한 전신에 칠흑색 갑주를 둘러 입은 상태였다.
한 마리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형상의 전신갑주. 디아나의 기억 속 한수호와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였다.
“일단 뭐, 메리 크리스마스다. 정용아.”
한수호가 별안간 툭 내뱉었다.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미르의 눈으로 위치 및 시각 정보를 띄워봤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03시 09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날짜 상으로 크리스마스가 맞길래 어이가 없어서 웃은 것이다.
이내 한수호가 디아나의 옥좌에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시커먼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한수호는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흐음. 베스타크와 멸망의 대검은 레플리카로 때워야겠군. 줬던 걸 뺏으면 치사하니까.”
옥좌에서 생성된 검은 스파크는 엄청난 마력을 발생시켰다.
이내 검은 마력이 꾸덕꾸덕 뭉쳐 두 자루 칼날의 형태로 굳어갔다. 한수호가 뻗은 양손에는 어느새 멸망의 대검과 베스타크가 쥐어졌다.
아까 뼈무덤 사이에서 뽑아낸 에스파다까지 하면… 나와 완전히 똑같은 무장이 되었다.
“아하. 아까부터 뭘 그리 꼴아보나 했더니… 디아나의 기억이 네게도 역류했나 보구나?”
나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한수호를 가만히 노려봤고. 한수호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 한층 날카롭게 빛났다. 흥미만만한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어떻게 할지도… 다 알고 있겠네?”
그 말대로였다.
대충 예상이 된다. 그래서 아까부터 놈을 경계하는 것이다.
한수호를 향한 디아나의 처절하고 안타까운 감정. 그것이 앞으로의 전개를 낱낱이 알려주는 스포일러 덩어리였다.
“아무튼 헥터 새끼도 진짜 멍청하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한수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마누라가 이 세계 최후의 예언자였다고. 루나의 예언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단 말이야. 슈엘츠의 무녀가 미래를 예언을 한 순간, 무수한 미래 중에서 그 미래가 확정돼 버리거든.”
그는 신파극 배우처럼 역동적으로 두 팔을 벌리더니. 입매를 신랄하게 비틀어 올렸다.
“루나가 500년 전에 계승 의식이 성공한다고 단언한 이상. 네가 디아나의 목을 자르는 건 운명이었다. 흐름을 거부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지. 회차 순서대로 줄줄이 읽어가는 웹소설처럼 말이야.”
한수호는 말하는 내내 비웃는 듯, 울상인 듯 미묘한 표정이다.
고요하게 정제된 분노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운명을 바꾸려면. 지금부터 바꿔야지.”
화르륵. 한수호의 대검에서 검붉은 불꽃이 치솟았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지금부터.”
불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한수호는 한층 즐거운 듯이 웃었다. 짙은 음영이 그의 입술에서 격렬하게 춤췄다.
문득, 패널이 내 앞으로 떠올랐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03시 11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 아.”
순간 심장이 크게 맥동했다.
회귀점 갱신의 패널. 세계의 경고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위험하다. 지금 수호 형님… 아니, 한수호는. 어딘가 위험해도 한참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긴장되는 와중, 문득 한수호는 이런 말로 서두를 끊었다.
“정말 족같이 아름다운 세상이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잠깐만. 실화냐.
저 새끼 설마. 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 대사’를 할 생각이냐. 미친 1류 새끼.
나는 죄악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까. 디아나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런 X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되살리려는 놈들은 말이야.”
평소 같으면 한수호의 저세상 유머감각에 탄복하며 헛웃음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살결을 찌르는 듯한 압도적인 광기 때문에 숨도 쉬지 못했다.
“지옥에서 불타버려야 해.”
마지막 대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인식보다 반응이 앞섰다.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다크 레이브으은!!”
푸화악! 내가 하늘로 치솟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대검이 쏟아졌다.
콰가가각!! 거센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나는 압도적인 광풍에 휘말려 한참을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끄윽…!”
개박살난 뼛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내 몸을 두들겼고. 대검에서 터져 나온 지옥염은 사방으로 흩어져 해골들을 불살랐다.
칠흑으로 가득하던 화원에 불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주변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세상은 디아나를 버렸지만. 디아나는 세상을 용서했다.”
철그럭. 사방을 가득 메운 화염 속에서 한수호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매끈한 칠흑의 갑주가 불꽃을 반사해 붉게 날름거렸다.
펄럭. 한수호의 등 뒤로 새카만 까마귀의 날개가 뻗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용서할 수 없어.”
순간 그의 신형이 일렁거렸다.
이번에도 인식보다 반응이 앞섰다.
“용서하고 싶지도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새 내 앞까지 날아오른 한수호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회피? 방어? 찰나의 순간 극심하게 고민하다가, 나는 똑같이 대검을 뽑아들어 그것을 막았다.
콰아아앙! 압력과 충격이 나를 찌부러트린다.
“끄욱…!”
검이 아니라, 철거용 크레인의 철퇴가 내려친 것 같았다.
온몸의 내장이 뒤섞이는 듯한 압력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니 정용아. 몇 번이나 만날지 모르니까, 미리 인사해둘게.”
칼날을 바짝 갖다댄 한수호가 나직이 말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똑똑히 들렸다.
키기기긱. 나는 대검을 맞붙인 채로 하릴없이 밀렸다. 그의 스테이터스가, 용사의 한계를 초월한 나조차 상회한다는 반증이었다.
“반갑다. 잘 가라! 그리고, 또 만나자!!”
한수호는 그렇게 외치며 대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콰아아앙! 세 번째 내려친 대검이 부딪쳐왔다. 멸망의 화염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백골만 가득했던 화원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