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감탄사 참기 LV.99
“흐어엄. 개싱겁네.”
나는 청기사의 시체 앞에서 잠깐 기지개를 켰다.
전투가 찰나에 끝나서 그런가 여러모로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거 참 이상하군. 이런 좁밥 하나를 가지고 처음엔 왜 그렇게 긴장했던 거지. 스스로 한심함이 들 정도였다.
“… 음?”
그렇게 잠든 루시를 데리고 다시 복도를 질러 나가던 그 순간.
나는 복도 한복판에 널브러진 내 시체를 뒤늦게 발견했다.
“…….”
뒤통수가 얼얼해서 한동안 입도 뻥긋 못했다.
온몸에서 피를 쏟고 삐쩍 마른 몰골을 본 뒤로는, 손끝 발끝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어서 이마를 짚었다.
‘아니… 뭐야. 뭔데, 잠깐만.’
나는 반사적으로 청기사의 토막난 시신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쩐지 찐막 보스 치고는 너무 쉽더라니. 아무리 방심을 해도 저런 좁밥한테 죽었을 리는 없으니… 생각해볼 수 있는 가정은 하나다.
‘변신하나? 진(眞)최종보스로 변신하는 거냐?’
그래. 최종보스는 2차변신이 국룰이지. 합리적 의심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계심을 가득 담아 청기사의 시체를 주시했다.
“위장은 소용없어. 어서 변신해라!”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리 노려봐도, 청기사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시체 앞에서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여간 한심했는지, 수호 형님이 퍼뜩 첨언했다.
―야. 변신 같은 거 안 해 인마. 끝이야 끝. 더 없어. 시마이!
“… 아. 안해요? 쩝.”
―… 뭔가 아쉬워 보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진 최종보스 변신은 없었다. 제작자인 수호 형님 피셜이니 믿기로 했다.
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는 결국 뽑았던 검을 검집에 물리고, 천천히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크으윽…….”
침음을 삼켰다. 몇 겹이나 겹친 전생의 기억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푸하아. 고통을 감내하던 나는 잠시 후 밀린 숨을 몰아쉬었다. 통한의 한숨이었다.
“아… X발. 박정용 존나 무식한 새끼…….”
나는 스스로에게 욕을 박으며 중얼거렸다.
결과적으로야 이겼다지만. 생각해보면 전과가 참혹했다. 결국 X발, 저 좁밥들 상대로 한 놈에 한 목숨씩 쓴 꼴이잖아.
“X발. 지갑전사냐 무슨…….”
나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이내 치켜뜬 시선을 베스타크로 향했다.
나는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던 수호 형님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니 형님. 왜 기사들이 한 놈씩 사라지는데 입 다물고 있었습니까. 좀 힌트라도 주시지, 정없게 이러깁니까?”
―… 이 새끼 갑자기 또 뭔 소리래? 내가 그렇게 갈구고 싶냐?
하지만 수호 형님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는 좀 더 디테일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제작자인 형님은 처음부터 그 기사들이 4명이라는 걸 알았을 거 아닙니까. 그걸 안 알려주니, 제가 자폭했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잖아요. 옆에서 개꿀잼 직관하니 좋죠 아주?”
―뭐? 아니 X발! 진짜 아까부터 뭔 개소리냐고.
“… 음?”
―뭔놈의 4명? 내가 제작한 묵시의 기사는 딱 한 명이야! 네가 직접 손쉽게 썰어놓고 뭐라는 거야? 약 먹을 시간 지났으면 빨리 먹어 인마.
“응? 으응?”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호 형님이 농담치곤 너무 진지하게 반박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데, 그 본새가 너무 당당했다.
뭐지. 대체 어디서 이 괴리가 오는 것일까.
‘… 설마.’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퍼뜩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던 것은 나였다.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내가 그 말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묵시의 기사들은 하나씩 존재가 말소되었다. 그래서 그에 맞게, 이번 세계에서 그 기사들을 기억하는 자들의 기억까지 전부 개변되어 버린 거다.
있었다가 돌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말이다.
“… 아, 아닙니다. 밥 잘 먹고 헛소리 좀 해봤습니다.”
결국 나는 수호 형님에게 그렇게 얼버무렸다.
수호 형님은 연신 혀를 차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질책했다.
―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인마. 고지가 코앞이라고.
“예. 그러죠.”
나는 수호 형님 말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뺨을 철썩 때렸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기둥 뒤에 고이 뉘어놨던 루시를 향해 다가갔다.
“으아음… 헤, 헤헤. 멍청한 용사아…….”
내가 루시를 업어들자 그녀는 득달같이 잠꼬대를 뱉었다.
… 잠꼬대 맞지? 아까부터 주둥이에서 내 이름만 자꾸 나오는 것 같은데. 자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딜 넣는 거 아니겠지?
“형님. 얘는 이번에 얼마나 잘까요.”
나는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물었다.
사방은 시커먼데 들리는 소리라곤 내 발소리 밖에 없고.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특이한 갑옷 차림의 백골 시체들 밖에 없다. 그래서 적적해진 나머지 궁금하던 것도 해소할 겸으로 물어본 거다.
수호 형님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하나씩 반문했다.
―두 번째 의식 끝났을 땐 얼마 후에 깼냐?
“그 때는… 한 사흘 정도 잤네요.”
―사흘이면 짧지는 않았군. 첫 번째 의식 때는?
“… 반나절 정도?”
―대충 10배 걸렸네. 그러면 이번에도 저번의 10배… 한 달은 걸릴 거다.
“한 달?!”
갑자기 까마득하게 점프하는 시간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수호 형님은 대수롭잖게 말을 이었다.
―의식을 행할 때마다, 불사의 마왕에게 축적되는 검은 마력이 얼마나 폭증하는지 알아? 10배가 아니라 10의 제곱 수준이야. 그러니 힘이 쌓일수록. 그걸 제곱할수록. 점점 몸에 일어나는 부하도 제곱으로 심해지지.
“허어…….”
―한 달도 최소한으로 잡은 거야. 더 길 수도 있어.
저벅저벅. 내 발소리가 복도의 공동을 공허하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퍼뜩 입을 열었다.
“아니 형님. 그런데 정작 루시 본인은 아직도 개좁밥이잖아요. 힘이 쌓이고 있는 거 맞아요? 중간에 어디로 질질 새나?”
―음. 그건 너도 알다시피… 헥터새끼가 장난질을 치는 바람에, 불사의 마왕한테 육체적으로 조정이 가해졌잖아. 실제로 질질 샐걸?
“… 아.”
―미네르바 그년이 큰맘 먹고 힘 좀 썼지. 내가 야부리 잘 털어서 구슬렸거든.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나는 마르크트레스에서 똥털에게 들었던 것들을 재차 상기시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수호 형님이 몇 마디 첨언하기 시작했다.
주제가 주제여서 그런가. 들리는 목소리만 봐선 사뭇 진지한 태도였다.
―지금 불사의 마왕은 그야말로, 마녀의 뒤를 계승하기 위한 인간 모양의 그릇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다.
“… 어중간한 존재라.”
―계승식에 필요한 것 외에 모든 기능을 거세당했지. 마왕으로서 힘을 발현하는 건 물론이고, 수호자의 흉마가 없으면 스스로 부활조차 힘겹게 하니… 사실상 불사의 마왕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상황이잖아.
마녀의 자리를 계승하는 것 말곤, 이제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거야. 수호 형님은 마지막에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건 가만히 듣고 있지 못하겠군. 나는 득달같이 반박했다.
“존재할 가치가 없긴 왜 없어요. 내가 루시가 없으면 못 사는데. 나를 위해서라도 루시는 살아야 합니다.”
방금은 존나 상큼한 나이스 가이의 발언이었어. 정용아.
스스로 내뱉은 멘트에 살짝 취해버렸다.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x발… 면전에서는 틱틱대기만 하는 쿨찐 새끼가…
그러나 그에 답하는 수호 형님은 극혐하는 목소리였다. 살짝 공포까지 느껴졌다.
싫어하라고 한 소리였다만. 저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 으음.”
그러자니 복도에 즐비한 갑옷 차림의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수호 형님이 해치웠을 수많은 기사들의 시체. 나는 그것들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호기심이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도 불사신이랬죠?”
―음? 그렇지.
“여기 있는 시체들도 다 형님이 만든 거겠네요.”
―그렇지?
“형님도 나처럼 죽으면 시간이 돌아가요? 아니면 다른 방식의 불사신인가?”
―음… 다른 방식이라니?
수호 형님이 오히려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세 개 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불사신’이라 말할 수 있는 능력의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다른 방식은 예를 들면…….”
첫째로 상처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회복이 돼서, 치명상 자체가 안 나오는 타입.
둘째로 회복은 안 되지만, 죽으면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부활하는 타입.
셋째로 나처럼 죽지 않았던 시점으로 시간이 돌아오는 타입.
“어때요. 이 셋 중에 꼽자면?”
내가 그렇게 열거하자, 수호 형님은 그제야 바로 대답해줬다.
―으음. 너랑은 좀 다르긴 하지. 나는 디아나 때문에 몸 자체가 언데드가 돼버린 케이스거든? 자세한 건 못 말해주겠지만. 어쨌든 네 분류로 따지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혼용이다.
조금 복잡한 대답이 나왔다. 나는 눈썹을 슬쩍 틀어올렸다.
“… 호, 혼용이라면?”
―디아나가 보내주는 흉마 덕분에, 어떤 상처든 즉각 회복되는 몸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회복의 허용치 이상으로 몸이 파괴되면. 별개의 육체가 구성돼서 부활하기도 해. 그래서 혼용이라고 한 거다.
“… 흐음.”
―뭐, 이 정도는 흔쾌히 답해줄게. 디아나가 아니라 내 개인정보니까. 아잉 부끄러워라.
마지막에 개드립을 쳐서 얼버무리려는 것 같은데. 역시나 이번에도 디아나와 관련된 부분은 사전에 칼차단을 해버리는 수호 형님이었다.
나는 그 집착 어린 보안에 슬슬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싫으세요? 누군가가 마녀를 입에 담는 게?”
나는 작심하고 한 번 찔러봤다.
수호 형님은 잠깐 입을 닫았다.
―… 흐.
대신 짤막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에 없이 서슬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싫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버러지 새끼들이… 내 소중한 사람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헐뜯고. 씹어대면 말이야.
“…….”
나는 어깨를 흠칫 떨었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위압감이 있었다. 고작 칼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일 뿐인데도 말이다.
―디아나는 그것도 묵묵히 감수했어. 하지만 나는 좀… 듣기가 싫어.
“…….”
―그 애가 나와 나눴던 추억과 시간만큼은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다. 이것만큼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어. 절대로. 아무도.
단호한 그 말을 끝으로 수호 형님도 입을 닫았다.
실로 뻘쭘한 갑분싸의 현장. 수호 형님도 스스로 갑분싸 대마왕이 된 걸 통감하는지, 뻘쭘하게 몇 마디 덧붙였다.
―뭐, 그거는 부차적인 이유고. 사실 나도 진짜 다 까먹었어.
“까, 까먹어요?”
―어. 디아나에 대한 건… 나도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 굵직한 뭉텅이만 좀 기억날 뿐이지.
“… 흐음.”
―그래서 더 말하기 싫은 거야. 나도 잘 모르는 그 애를, 남들이 함부로 씹게 놔두기 싫어서.
저쪽도 루시 같은 불사신 여성과 엮여서… 여러모로 고생이 많은 팔자군.
대전차지뢰를 성대하게 터뜨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이나 재촉했다.
“… 그냥 안내나 해주십쇼. 계승의식인지 뭔지, 빨리 끝내고 육개장이나 한 사바리 하게.”
―암. 그래야지.
그렇게 짤막한 대화는 끝을 맺었다.
하염없는 걷고 또 걷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어쩌다 갈림길이 있으면 수호 형님이 간간이 진로를 정해줬고. 그 외에는 내 발소리만 가득했다.
―그래. 여기다.
그리고 줄기찬 침묵의 행진이 멈췄을 때. 내 눈앞에는 석문(石門)이 하나 있었다.
하얀 바탕에 달과 여신이 조각된, 프랑스의 개선문처럼 웅장한 놈이었다.
“… 이건.”
그것에 놀란 나머지 숨을 삼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석문의 웅장함에 놀란 것은 아니다.
‘글레이프니르… 아니. 그림자 사슬이다.’
석문 전체를 칭칭 휘감은 익숙한 흑색 사슬과, 그 사슬이 쏟아져 나온 지점.
석문 앞에 주저앉은 한 구의 해골 시체 때문에 놀란 것이다.
문득 수호 형님이 이죽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놀랐냐? 하긴 좀 괴상하게 보일 법도 하지.
“… 예. 놀랍네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 대체.”
나는 당연히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다시금 순백의 석문을 제대로 살폈다.
거대한 석문과, 그것을 단단히 봉쇄한 마법의 흑색 사슬. 그것은 한 백골 시체의 갈비뼈로 이어져 있었고. 널브러진 시체의 갈비뼈 쪽에는 열쇠구멍 같은 홈이 나있다.
‘… 자물쇠? 설마 저 해골이… 자물쇠인가?’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전체적인 형상을 눈에 담자 구조가 겨우 파악된 것이다.
저 백골 시체가… 석문을 봉쇄한 사슬들의 자물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죽어서도 저 문을 지키겠다. 뭐 그런 건가.’
이름 모를 해골 친구의 끈적한 광기와 집념, 집착이 느껴지는 구조다. 내가 숨을 삼키며 어깨를 부르르 떠는 찰나.
―저거 나야.
수호 형님이 해골 친구의 정체를 내게 속삭였다.
나는 눈을 터질 듯이 부릅떴다. 베스타크와 눈앞의 백골 시체를 미친 듯이 번갈아 쳐다봤다.
“뭐가 어쨌다고요?”
―자빠져 있는 해골바가지가 한수호라고요. 정확히는 한수호(였던 것)이지?
“…….”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니 정용아?
한 동안 뇌정지가 왔고.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와!!!!! 센즈!!”
터져나오는 감탄사를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