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4일, 11시 19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기억의 회랑]
무려 회귀점 갱신의 패널이 떠올랐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세상이 내게 경고해주는 것이다.
내가 퍼뜩 긴장을 채워 넣으며 숨을 삼키는 찰나. 두 기사에 대한 상태창이 뒤늦게 떠올랐다.
[명칭: 전쟁의 적기사]
[체력: 5000/5000 ?마력: 0/0]
[힘: 800 ?민첩: 200 ?지능: 0]
[상세: 묵시의 기사단, 붉은 말의 기수. 주무기는 세상의 평화를 거둔다는 ‘살육의 검’이다. 전투에 기교는 없으나, 압도적이고 순수한 무력으로 적을 무력화한다.]
[명칭: 죽음의 청기사]
[체력: 4444/4444 ?마력: 444/444]
[힘: 666 ?민첩: 666 ?지능: 444]
[상세: 묵시의 기사단, 창백한 말의 기수. 주무기는 죽음 그 자체인 사슬낫 ‘그림 리퍼’다. 죽음을 직접 다루는 청기사는 묵시의 기사단을 이끄는 존재다. 그림 리퍼에 베인 적은, 상처의 깊이와 관계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열거된 패널을 쭉 읽어내린 순간.
푸르륵! 두 마리의 말이 동시에 투레질 소리를 냈다.
빨강과 파랑, 기사 두 명이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침입자. 제거한다.
―문답은 무용하다.
투구 안에서 시뻘겋게 안광을 빛내며, 두 기사가 일거에 달려들었다.
두두두두!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
…
… 음? 뭔가 이상한데.
‘왜 갑자기 인원이… 반토막 났냐?’
분명 방금 전까진 네 명이었던 거 같은데. 뭐지? 급똥으로 화장실 갔나?
… 기분 탓? 내가 당황한 나머지 착각한 건가?
“쓰읍. 귀신이 곡을 하겠네!”
나는 잡생각을 모두 물렸다.
하긴 놈들이 넷이든 둘이든 뭐 그리 중요하냐. 생각보다 적어졌으면 좋은 거지.
숫자 잘못 세서 괜히 득본 기분이군.
‘그래. 우선은 눈앞의 위기부터…!’
두두두두! 두 명의 기사가 내 정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붉은 갑옷의 검을 든 기사. 그리고 창백한 갑옷의 사슬낫을 든 기사였다.
“으아아!”
콰아아앙!
어검술로 들어 올린 멸망의 대검은 적기사의 대검과 부딪쳤고. 들고 있던 쌍검은 십자로 교차해 청기사의 사슬낫과 맞붙었다.
빨강과 파랑이 양쪽에서 아른거린다. 자연스럽게 태극 문양이 떠올랐다.
“크아아아! 주모오오!!”
국뽕 기사단과의 비대칭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동과 에테르 병을 사용해 곧장 신체능력을 극한까지 활성화 시켰다. 한층 느려진 두 기사에게 반공을 나서려던 그 순간.
나는 문득, 복도 한복판에 누워 있는 내 시체를 발견했다.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캉! 태태탱! 두세 번 정도 기사들의 맹공을 주고받은 다음에야 가까스로 상황을 이해했다.
‘… 뭐야. 나 죽었구나. 시공회귀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피안윤회를 사용하지 않아서, 기억을 잃은 상태인 듯하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된다. 이런 쪽으로 추리하는 건 거의 전문분야가 다 됐으니까.
‘눈앞의 두 기사들 때문이겠지.’
지금 내 필살기급 스킬들은 죄다 흉마 기반의 스킬들이다. 그러니 괜한 죽음을 늘리지 않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기억을 수복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선 절대 알 수 없는 의문이 말이다.
‘… 누구한테 죽었지?’
알 수 없다. 눈앞의 두 기사일까?
아니. 잠깐 붙어 봐도 알겠다. 저 두 놈은 나를 이길 정도의 무력이 없다.
이대로 집중해서 상대한다면, 상처 하나 없이는 무리더라도. 3분 내에 모두 처리할 수 있다.
‘… 그래. 처음에 착각했던 대로… 한 4명 정도 되면 모르겠군.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 기사들을 물리쳐도 또 다른 난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빛살처럼 청기사의 가슴께를 훑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태애앵! 번쩍이는 섬광과 터져 나오는 금속음. 나는 매섭게 날아온 사슬낫을 스쳐 지나가, 청기사의 가슴에 깊은 검흔을 새기고 있었다.
―구우욱…!
후두둑. 박살난 체스트 아머의 금속조각이 쏟아졌다. 청기사가 깊게 울리는 신음을 내뱉으며, 곧장 내게 사슬낫을 내던졌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뱀의 혓소리처럼 날카롭다. 나는 그것을 잠깐 주시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느―려.”
나는 사슬낫의 궤도에 멸망의 대검을 어검술로 갖다댔다. 사슬의 표면 타고, 어루만지는 듯한 궤도로 대검이 파고들었다.
촤르르륵! 날아오던 사슬낫은 대검의 칼날에 칭칭 휘감겨 버렸다.
“잡았다. 개짓거리는 거기까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검을 까딱거렸다.
졸지에 무기가 속박된 청기사는 연신 안간힘을 썼지만, 나는 사슬을 단단히 붙들어 탈출을 봉쇄했다.
놈은 내 손속을 뿌리치지 못했다. 전체적인 스탯이 나보다 후달리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는 이제 쌍검을 공중에 띄워 후방으로 재빨리 배치했다. 뒤에선 적기사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살덩이…! 죽인다!
콰아앙! 십자로 교차한 쌍검이 적기사의 묵직한 일격을 가까스로 방어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적기사의 대검 날이 내 뒤통수 직전에 막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리멸렬한 힘싸움이 지속되길 잠시. 눈치를 보던 두 사람 중 내가 먼저 움직였다.
“옛다 받아라! 네 친구 총알배송 해주마!!”
나는 들고 있던 멸망의 대검을 한껏 세게 쥐었다. 팔에 온 힘을 불어넣고, 발끝으로 지면을 전력으로 밀어냈다.
콰쾅! 복도의 지반이 움푹 패이며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나는 그 중심에 서서, 사슬낫이 연결된 대검을 풍차처럼 횡으로 휘둘렀다.
―그우우욱!
순식간이었다. 때문에 청기사는 미처 사슬낫의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쇄애액! 놈의 신형이 유령마 위에서 붕 뜨더니, 그대로 총알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 궤적의 끝에는 적기사가 있었다.
“우오오오오!”
내 기합과 함께 콰지직! 청색과 적색 갑옷이 거세게 충돌했다.
쿠당탕! 적기사 역시 날아온 청기사와 부딪친 충격에 못 이겨 유령마에서 낙마했다. 지면에 마구잡이로 뒤엉킨 두 기사가 완연한 태극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실로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비열한… 살덩이!
―그우악…!
두 기사가 신음성을 내뱉었다.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두 기사가 서둘러 유령마를 불러들인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그 틈에 전생의 시체에 다가간지 오래였고. 이미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손패 한 번 까보자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나는 고니의 사쿠라를 확인하는 아귀의 심정으로, 랜턴을 시체에 가져갔다.
파앗. 랜턴이 음울한 빛을 뿜었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0,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끅…….”
짤막하게 신음을 냈다.
직후에 나는 눈을 번득였다.
“라스트 댄스.”
파지지직!
검붉은 스파크가 내 몸을 타고 치달렸다. 압도적인 탈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우우웅. 멸망의 대검에 시커먼 오라가 스멀스멀 깃들었다. 나는 그것을 공중에 가볍게 한 번 휘둘러 봤다.
짙은 스파크와 음울한 검기가 검의 궤적을 따라 일렁거렸다.
“기왕 하는 거. 확실히 해놓는 게 좋겠지.”
기억이 없던 내가 했던 추측은, 기사들을 물리친 뒤 또 다른 난관이 있을 가능성이었다.
기억을 수복하고 나니 틀렸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가정이다. 수호 형님의 말은 통 믿을 수가 없으니까.
때문에 한 번 더 죽더라도… 확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이게 맞다고 판단했다.
“누가 없어질래? 선착순 한 명.”
나는 손가락을 까딱여 두 기사를 도발했다.
내가 기억을 수복하는 사이 두 기사는 유령마에 다시 올라탄 상태였다.
―죽어라, 살덩이여!
―그오오오!
두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유령마가 투레질과 함께 다리를 힘차게 놀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기사는 엄청난 기세로 나와 가까워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 아무나 죽어라 그럼.”
나는 이번에도 검을 수평으로 늘어뜨렸고. 이내 최대한 넓은 궤적으로 횡베기를 시전했다.
검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찰나였지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으아아아!”
파지지직! 온몸에서 스파크가 매섭게 튀었다. 끝까지 휘둘린 검의 궤적을 따라 거대한 검기가 발사되었다.
복도의 가로축을 전부 뒤덮는 시커먼 초승달. 도망칠 곳도, 도망칠 시간도 없는 외통수의 일격이었다.
―그우우…!
―살덩이…!
두 기사가 짤막한 유언과 함께 무기를 들어올렸지만. 방어하려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콰자작! 거칠게 쏟아진 검기가 두 기사를 반토막으로 찢어발겼다.
‘누가… 먼저냐…….’
검을 휘두르느라 제대로 못 봤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먼저 검기에 맞았을 것이다.
내가 당첨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푸화악! 온몸에서 다시금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커헉…!”
나는 시뻘겋게 물든 시야를 어거지로 들었다. 필사적으로 사라지는 기사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다. 눈앞이 까마득해지며, 순식간에 의식이 잦아들었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4일, 11시 19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기억의 회랑]
무려 회귀점 갱신의 패널이 떠올랐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세상이 내게 경고해주는 것이다.
내가 퍼뜩 긴장을 채워 넣으며 숨을 삼키는 찰나. 눈앞의 기사에 대한 상태창이 뒤늦게 떠올랐다.
[명칭: 죽음의 청기사]
[체력: 4444/4444 ?마력: 444/444]
[힘: 666 ?민첩: 666 ?지능: 444]
[상세: 묵시의 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 주무기는 죽음 그 자체인 사슬낫 ‘그림 리퍼’다. 그림 리퍼에 베인 적은, 상처의 깊이와 관계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떠오른 하나의 패널을 쭉 읽어내린 순간.
푸르륵! 청기사가 탄 말이 투레질 소리를 냈다. 푸른 갑옷의 기사가 사슬낫을 꼬나쥐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침입자. 제거한다. 문답은 무용하다!
투구 안에서 시뻘겋게 안광을 빛내며, 청기사가 달려들었다.
두두두두!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
…
… 음? 뭔가 이상한데.
‘방금 분 명… 네 명이었던 것 같은데?’
뭐지? 기분 탓? 내가 당황한 나머지 착각한 건가?
모르는 사이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쓰읍. 귀신이 곡을 하겠네…….”
뭐 아무려면 어때.
나는 천천히 세 자루 검을 들었고, 각종 버프를 몸에 덕지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난이도 줄었으면 나야 좋지.”
키잉―!
찌르는 듯한 금속음을 남긴 채. 청기사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어느새 청기사를 지나쳤다. 세 자루 검을 검집으로 회수하는 중이었다. 스르륵. 기사가 멈춘 자리로 일곱 개의 검광이 뒤늦게 번득였다.
민첩이 999를 넘은 지금. 나의 도약은 사실상 순간이동에 가까웠다.
―구… 허억…
철그럭. 예리하게 잘린 청기사의 상체와, 사슬낫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다. 목이 잘린 유령마와 거기 맞붙은 하체가 뒤따라 맥없이 쓰러졌다.
반으로 잘린 갑주 안에서 시커먼 공허가 질질 흘러내렸다. 나는 무감각하게 그것을 지켜봤다.
“반갈죽이다. X벌련아.”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바닥을 가리켰다.
적장, 물리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