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키잉, 키키킹!
청기사의 예리한 사슬낫과, 적기사의 붉은 거검이 연신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나름 수월하게 막고 있었다. 세계의 태동과 에테르로 동시에 강화된 내 육체는, 이미 초인을 넘어서 아신에 가까웠다.
놈들의 움직임이 미래예지 수준으로 뇌리에 입력되고 있었다.
―침입자.
―제거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파상공세에 나는 그만 가슴팍을 슬쩍 허용했다.
카아앙! 사슬낫이 다크 레이븐의 갑주에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갑옷이 우그러져 흉부를 무섭게 압박해왔다.
조금만 깊었으면 그대로 세상 하직할 뻔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 집중하자. 집중!’
분명히 피할 수 있는 공방이었다. 그런데도 방금 건 순전히 집중이 흩어져서 피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 크으.”
하지만 어느새 눈길은 흘깃. 널찍한 성당 복도의 한 지점으로 자석처럼 이끌렸다.
내가 급박한 전투 와중에도, 집중을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시체가 복도 한 가운데 발라당 누워있다.
‘아니, X발! 저거 대체 뭔데!’
그냥 평소 같은 전생의 시체면 이렇게까지 관심이 안 간다.
그냥 ‘놈들과 싸우다 죽었나 보군’ 하고 넘어가거나. 기회를 봐서 이자나미의 심장을 사용할 생각이나 했겠지.
‘선짓국이 30그릇은 나오겠네 X발!’
하지만 시체의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온몸의 피를 죄다 쏟고 죽었는데. 피가 쭉 빨려서 빼빼마른 내 면상이 실로 그로테스크했다.
대체 왜. 왜 주화입마 걸린 무림고수 마냥 칠공분혈을 하고 뒈진 거냐고. 전생의 정용아.
‘궁금해! 젠장! 너무 궁금하다고!!’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지금 싸우고 있는 백터맨 기사들?
그럴 리가. 지금까지 싸워본 결과, 세 기사들은 저런 식으로 죽일만한 기술을 보유한 놈부터가 없었다. 그래서 궁금해 미치겠다는 거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냐? 시체가 별안간 아생성됐을 리는 없고. 저 끔찍한 시체가 탄생한 과정을 몰라서 실로 꺼림칙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이자나미의 심장 사용할 각을…!’
그래. 행여 저 기사놈들을 다 때려잡는다 해도. 그 후에 예상치도 못한 위기가 한 번 더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상황이 납득이 안 된다.
그렇다면 전생의 기억을 회수하는 건 필수적이다.
“하앗!”
카아앙! 쌍검을 동시에 휘둘러 청기사의 사슬낫을 거세게 뿌리쳤다. 동시에 멸망의 대검에 마력을 깃들여 스팅어를 발사했다.
콰아앙!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적기사의 붉은 갑옷을 무형의 기탄이 두들겼다.
―그우욱…!
―침입자… 제거한다!
청기사와 적기사가 붉은 안광을 쏟아내며 분노를 표출했고. 다시금 유령마를 재촉해 내게 달려들었다.
카앙, 카캉! 기사들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검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성가셔 죽겠네 X발…!’
놈들은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충분히 활용했다.
전후좌우, 반드시 양쪽에서 두 기사의 공격이 동시에 들어왔다.
하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나는 그들의 돌진 경로를 계산해, 공방 와중에도 조금씩 후퇴하며 시신이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 큭!”
그 순간, 히어로 센스가 번득였다.
나는 황급히 전방으로 스텝을 밟았다. 동시에 멸망의 대검을 후방으로 풍차처럼 휘둘렀다.
카카캉! 찌르는 금속음과 함께 날아오던 화살 몇 개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딜 X발!”
씨근거리며 시선을 멀리 두자, 하얀 갑옷의 백기사가 나를 향해 다음 화살을 메기는 모습이 보였다.
‘아유 X발. 저놈을 잊고 있었어!’
기껏 몰래 야금야금 시체와 가까워졌는데, 기습적인 화살공격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나는 증오를 가득 담아 백기사를 노려봤지만. 어쩔 도리도 없기에 혀를 세게 찼다.
―침입자!
―제거한다!!
그래고 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좌우에서 동시에 기사들의 일갈이 들려왔다.
후우웅! 창백한 사슬낫과 붉은 대검이 양쪽에서 날 압박해왔다. 나는 속으로만 씨근거리며, 곧장 연화를 발동시켰다.
스슥. 시야가 단숨에 전환되며 적기사의 넓은 등판이 보였다.
‘일단 한 놈씩 제압한다…!’
내가 어리둥절한 적기사의 등에 쌍검을 내지르는 그 순간.
재차 후방에서 살기가 감지되었다.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
화살이 내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온 상태였다.
거리는 잘 쳐줘도 10센티미터 안팎. 화살의 매서운 속도를 생각했을 때, 아무리 나라도 저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기사의 뒤를 잡는 것에 혈안이 되어 눈치채는 게 늦었다.
‘죽는다.’
짤막한 주마등과 함께 오만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시간이 길게 늘어지다가, 마침내 멈춰버린 듯한 감각이 몰려왔다.
‘… 시간이, 멈춘다고?’
그리고 우연히 들었던 오만 가지 생각 중 하나가, 내 뇌리에 섬광을 때려 박았다.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워, 월드 엠브리오!!!”
두쿵. 심장이 순간 엄청난 고동 소리와 함께 정지했다.
동시에 날아오던 화살도 멈칫. 공중에서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내 눈깔의 정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앞이었다. 화살 끝이 너무 가까운 나머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스킬 발동: 월드 엠브리오]
[시전자, 박정용의 심장에 태동을 각인했다. 잔여 마력을 전량 회수하여 시간을 정지한다.]
[환산 마력에 의해 정지된 시간: 1.1초]
멈춘 것은 화살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흑백 필터를 씌운 것처럼 무채색이 되었고. 날아오던 화살은 물론이고 적기사와 청기사마저 달려오던 채로 멈춰 있었다.
‘우, 우선 살고 보자!!’
패널을 제대로 읽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우선 살아남기 위해 화살의 궤도상에서 고개를 젖혀버렸다.
잠시 후. 세상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으으윽!
콰아앙! 내 참격에 등을 얻어맞은 적기사가 신음을 내뿜었다. 박살난 갑옷을 흩날리며 적기사가 유령마에서 낙마해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그리고 피피핑! 화살들이 내 뺨을 거칠게 스쳐지나간다. 빗나간 화살은 복도의 기둥에 박혀 굵직한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허억… 허억…!”
방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 됐다.
나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뺨의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나는 곧 아이템 세계의 태동을 꺼냈다. 검은 구슬 안의 기괴한 아기는 여전히 눈을 슬며시 감은 채 자고 있다.
‘태, 태동 사용.’
우웅. 구슬 속 아기가 눈을 번쩍 뜨더니 특유의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슈르륵. 복도 전체를 울리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닥난 마력이 회복되었다. 동시에 모든 능력치가 강화되며 몸에 전에 없던 활력이 샘솟았다.
“… 이거다.”
나는 시커먼 구슬 속 아기를 빤히 쳐다보며 가만히 중얼거렸고.
이내 그것을 힘껏 움켜쥐며 다시 한 번 시동어를 읊조렸다.
“월드 엠브리오.”
쿠궁. 심장을 중심으로 거대한 울림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갔다.
[스킬 발동: 월드 엠브리오]
[시전자, 박정용의 심장에 태동을 각인했다. 잔여 마력을 전량 회수하여 시간을 정지한다.]
[환산 마력에 의해 정지된 시간: 1.5초]
주어진 시간은 고작 1.5초.
하지만 이 정도면, 시체의 사념을 회수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간다!!’
나는 기사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포착하자마자 전생의 시체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허리춤의 랜턴을 들어, 냅다 시체를 향해 던져버렸다.
투화악! 초인적인 스테이터스 덕에 랜턴이 엄청난 강속구가 되어 날아갔다.
“으아아! 너에게 닿기를!!”
태앵! 금속음이 울렸다.
전생의 내가 입고 있던 다크 레이븐의 갑주와, 랜턴의 뼈대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우우웅. 순간 이자나미의 심장이 보라색 음울한 빛을 한껏 쏟아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기억 수복의 시간이었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0,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그으윽…!”
랜턴을 던지고. 전생의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억누른 신음을 흘리고.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을 파악하기까지, 약 1초.
―침입자… 제거한다!
시간정지가 풀리자, 녹아웃 된 적기사를 제외한 청기사가 내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백기사는 아까 메겨놨던 화살을 발사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태동을 사용해 모든 마력을 수복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간을 정지시켰다.
[스킬 발동: 월드 엠브리오]
투하악! 나는 곧장 지면을 박차고 백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라스트 댄스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지지직! 검은 스파크와 함께 맹렬한 생명력이 멸망의 대검에 모여들었다. 나는 그것을 어깨 뒤로 힘껏 조준하고, 백기사의 앞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역시 정답이었잖아. 기억을 수복하는 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1.5초의 짧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마갑이 해제되며 내 맨몸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해 백기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죽어.”
푸직. 파육음이 울렸다.
시커멓게 꿈틀거리는 대검의 칼날은 백기사의 투구를 관통해 있었다.
―치, 치, 침입… 자.
백기사가 붉은 안광을 깜빡거렸다. 이내 발끝부터 새하얀 안개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루시나 자드키엘처럼 재가 되는 죽음이 아니다.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있는 것이다.
“너도 진짜 존나 거슬렸어. 이… 족같은, 원딜충 새끼야.”
나는 체내에서 우글우글 끓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가까스로 한 마디 중얼거렸다.
직후에 푸화악! 온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속절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빠르게 의식이 멀어져 갔다.
“그… 헉.”
피안윤회는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흉마를 다 소모해버리면, 흉마 소모가 기반인 다크 레이븐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 생에서 백기사를 아예 지운다 해도. 적기사와 청기사의 협공에 대처하기가 너무 힘들어진다.
벼룩 잡다가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잘 해봐라… 다음 생의 나.’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이 최후의 어둠이 불쾌하지 않게 된 것은.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