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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59화 (235/280)

259화

스슥. 온몸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눈을 뜨기도 전에, 별안간 온몸의 내장이 쥐어짜이는 고통이 엄습했다.

“어… 큭?!”

나는 몸을 뒤틀며 번쩍 눈을 떴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찐득하게 꿈틀거리는 어둠만이 반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드득, 뿌드드득! 온몸의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육체 내부에서 들려올 뿐이다.

―어어?! 뭐, 뭐지? 왜 절멸의 안개가 발동되지? 이럴 리가 없는데!

보아하니 수호 형님은 이 갑작스런 격통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그도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나는 팔을 마구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신음성을 내뱉었다.

“이, X발… X같은 마검 새꺄…! 부, 부작용 같은 거 없다며!!”

―어…? 아, 아니! 진짜 없어! 찍고! 다 걸고!

“그럼 지금 이건 뭐야! 아아악! 죽는다! 나 죽어, 이 사기꾼 새꺄!!”

―사기꾼이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난 억울해! 배리어를 쳐줬으면 쳐줬지!!

그리고 내 비명이 어둠 속을 나직이 울린 그 순간.

샤아악. 눈앞의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온몸을 압박해 오던 극심한 고통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삐빅. 정신없는 와중에 패널 하나가 떠올랐다.

[알림: 결계 작동]

[광역 저주 ‘절멸의 안개’에 대한 결계가 발동되었다. 대상자에 한해 해당 저주의 효과를 영구히 무효화한다.]

“아, 아…?”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패널이었다.

나는 알딸딸한 정신으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이내 대충 진상을 추측해냈다. 곧장 수호 형님한테 물었다.

“형님 설마… 여기 원래는 들어오기만 해도 뒤지는 뎁니까?”

―어, 그래! 그래서 내가 게이트에 저주를 중화시키는 대인방어막을 설치해놨다니까!!

“근데 왜… 처음엔 저주가 발동됐대요?”

―어… 아, 아무래도 배리어가 좀 늦게 발동한 모양이다. 시간차가 있을 줄은 몰랐지. 허헛.

“허헛은 X발…….”

그래. 저 마검쉑, 일처리 대충하는 거 한 두 번 봤어야지. 내가 참자.

정신을 차리고 주변부터 둘러봤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참고로, 그 풍경이 꽤나 초월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어… 여기가 그 신성국 뭐시긴가.”

―신성국 뭐시기(였던 것)이지. 정확히는.

하늘 위로는 시험의 장막처럼 까마득한 암흑이 깔려 있다. 그 덕분에 지상에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마 초인이 된 지금의 시력이 없었다면… 양손을 앞으로 허우적거리며 야간전술보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 워우.”

폐허가 된 널찍한 가도. 그 양쪽으로 무너진 석재건물과, 빛바래고 풍화된 종교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박살난 여신상의 머리통 같은 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위, 위치 확인.’

나는 황급히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삐빅. 곧 위치정보를 담은 패널 하나가 떠올랐다.

[위치 정보]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白劍)의 성당 외곽 / 중앙광장]

“진짜 멸망의 성흔 맞구나.”

단숨에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서 정중앙까지 텔레포트 했군. 패널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실감이 들었다.

시간도약은 워낙 밥먹듯이 해서 익숙한데, 장거리 공간이동은 아직도 할 때마다 이질감이 든단 말이지.

나는 체내에 남아있는 꺼림칙한 느낌 때문에 잠깐 몸서리를 쳤다.

“흐음. 여기가…?”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예상 이상으로 세기말적인 광경에 감탄 아닌 감탄을 잠깐 흘렸다.

‘진짜 엄청나네. 특히 저것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쓰레기처럼 길가에 널려있는 백골 시체들이다.

썩은 물이 질척하게 고인 분수대를 중심으로, 광장과 가도에 엄청난 양의 백골이 널브러져 있었다.

특이한 모양의 갑옷을 입은 시체, 후줄근한 일반인의 옷을 입은 시체, 고급스런 귀족풍 옷을 입은 시체. 사제복 차림의 시체까지.

복장이나 죽은 장소, 죽은 자세도 가지각색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답니까?”

나는 수호 형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잠꼬대로 몸부림치는 루시를 꽉 붙들어 업은 채, 가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대놓고 읽씹을 하던 전과 달리, 수호 형님은 이제 전처럼 재깍재깍 대답을 잘 해줬다.

―음. 디아나의 계승식이 진행되면, 일시적으로 막대한 검은 마력이 폭주한다는 건 들었냐?

“예. 적랑한테 들었죠.”

―이 사람들은 진원(震源)에 가까이 있다가 그 힘의 여파로 즉사한 사람들이다. 내가 판 깔고 양념 친 다음, 디아나가 막타 친 놈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는군.

대충 예상이야 했다만… 이 도시 전체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의 계승식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가슴 언저리가 갑갑하고 묵직해진 느낌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대충 사망자 수가 얼마나 될까요?”

―계승식의 마력파동 때 죽은 사람만 수천만은 되겠지. 그 뒤로 대혼란 시대에 죽은 사람까지 하면 억대는 가뿐할 거고.

“우리 마녀님 POTG 받으시겠네.”

―따 놓은 당상이지.

저세상 대화가 이어지길 잠시.

수호 형님이 베스타크 칼날을 움찔대며 목청을 높였다.

―어. 거기서 오른쪽 가도를 따라서 직진해. 300미터 앞에 시장 골목 나오면 좌회전해라.

“예예. 거 내비가 일은 잘하네.”

―거럼. 여기가 원래 내 나와바리였다고.

그 사이 내비게이션으로 전직한 수호 형님의 길안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등 뒤에서 루시가 자고 있는 데다, 딱히 급한 일도 없다 보니. 걷는 내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나는 이내 수호 형님이 말하는 ‘시장골목’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진입하자마자 수호 형님한테 투덜거렸다.

“형님이 시장 골목이라고 안 했으면 시장인지도 몰랐겠네요.”

―하핫. 그렇긴 하지.

무너진 건물 잔해.

박살나 쓰러진 마차와 뼈만 남은 말의 유해.

말라비틀어져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일과 채소들.

그리고 무수한 인간의 시체까지. 좁은 골목에 그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나는 인상을 바짝 찌푸린 채, 비교적 깨끗한 바닥을 밟아가며 천천히 전진했다.

―… 옛날생각 나는군. 하핫. 이 골목에서 말이야. 성녀로 추앙받던 루나를 처음 만났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만남이었다. 정말로.

“…….”

―디아나랑도 자주 와서 사과를 훔쳐 먹곤 했었어. 디아나가 사과를 정말 좋아하거든. 흐흐.

문득 수호 형님이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여기서 괜히 스위치 건드렸다간 꼰대 특유의 지자랑 + 추억팔이가 쏟아질 게 분명했다. 나는 괜히 깊게 캐묻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런 추억이 깃든 장소와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박살내버린 기분은 어떠십니까?”

수호 형님은 그 말에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입맛을 다시며 은근히 투덜거릴 뿐이었다.

―… 아. 이 새끼 갑분싸 장인이네. 쓰읍.

너무 막나가는 질문 같았나?

하지만 나는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거다.

“조언 좀 해주십쇼. 저도 대비나 하게요.”

왜냐하면 이제 그 범세계급 학살자 역할을 내가 떠맡을 차례니까.

이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데, 유일한 경험자인 선배님한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 흐흐. 새끼. 여기 꼬라지를 보고 나니 쫄았냐?

“예. 솔직히 존나게 쫄았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루시의 허벅지를 받친 두 손은 지금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말투는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쫄았다는 걸 숨겨봐야 아무 짝에 소용도 없는 짓이다.

그것을 수호 형님도 깨달았는지, 이어진 말엔 얕은 질책이 어려 있었다.

―이 정도로 쫄면 곤란해. 너희가 이어나갈 계승의 마력파동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다. 최소한 대륙의 3분의 1을 집어삼킬 정도로 막대한 여파가 미칠 거야.

“3, 3분의 1?! 이런 미친…!”

산 넘어 산이군.

국가 하나를 멸망시키는 걸로 모자라 대륙의 3할을 집어삼킨다고? 그러면 대체 내 칼질과 선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소리야.

수호 형님은 자지러지는 내 반응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몇 마디 추가했다.

―대신 그만큼 힘세고 오래가겠지. 그 막강했던 디아나의 인생 역작이 4개체나 융합된 게, 지금의 불사의 마왕이다. 분명 노쇠한 디아나보다도 훨씬 이 대륙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줄 거야. 검은 마력도 안정화되니 마왕 출현도 이제는 안심!

하지만 아무 짝에 소용도 없었다.

이미 멘탈이 너무 흔들려서, 뒤늦게 붙인 위로의 말들은 씨알도 안 먹혔다.

“아니 형님. 마녀는 버그 안 고치고 뭐했답니까!”

나는 하도 억울하고 황당한 나머지 수호 형님에게 퍼뜩 하소연했다.

“계승식 때 그런 미친 버그가 있으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노오력을 했어야 될 거 아닙니까! 어떻게 수백 년 지날 동안 오히려 버그의 스케일이 커지냐고요!!”

―버그…?

수호 형님은 내 말에 잠깐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그 최초의 희생은 버그가 아니야. 애초에 흑마법의 매커니즘이 그런 걸 어쩌겠냐.

이번엔 내가 잠깐 입을 다물 차례였다.

“어… 그, 그건 무슨 소립니까.”

―흑마법은 등가교환이 철저한 마법이야. 강한 힘을 내려면 그에 준하는 강한 희생이 필요하다.

“… 아.”

―사제들의 신성마법처럼 신한테 싸바싸바 해서 공짜로 사람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세상을 안정화 시키라고 고안된 마법도 아니지. 그런 걸 가져다 어거지로 술식을 짜맞춰 놓은 거라고. 흑마법은 근본부터가 사람 죽이는 마법이야.

수호 형님의 말을 듣고, 나는 불사교 때의 케른을 떠올렸다. 눈앞에서 몇 번이고 재생됐던 새하얀 폭발이 아른거렸다.

수호 형님은 깊게 생각에 잠긴 내게 마지막으로 첨언했다.

―지금 세 명의 마왕을 흡수한 불사의 마왕은, 디아나보다 월등하게 강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세계를 계승하려면 그만큼 필요한 희생도 많아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희생이라.

그래. 케른의 불사교 놈들도 규모만 좀 작았지 똑같다.

그 눈부신 빛의 폭발도 분명… 아스타르트의 파편을 소환하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는 흑마법이었지.

―디아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 애도 고육지책인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거지.

“… 그렇습니까.”

나는 그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에서 충분히 납득했지만. 수호 형님은 못내 억울했는지 계속 말을 덧붙였다.

―본인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의 술식이라면, 디아나도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원래 흑마법은 마땅한 제물이 없으면… 자신의 고통을 매개로 사용하거든.

“… 고통이요?”

―본 적 없냐?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때 검은 눈물을 흘리는 거. 그게 자기 고통을 매개로 썼다는 증거인데.

“아. 있습니다. 기억 나네요.”

굳이 따지면 나는 꽤 많이 본 축에 속한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리데가 시커먼 더치와이프 꺼낼 때도 봤고. 헥터 카사스가 흘리는 것도 봤다.

자드키엘의 결계를 해제하던 유리아는 좀 특이 케이스지만… 일단 그 때도 보긴 봤다.

―내 실드는 여기까지. 좀 추했지만 마음은 후련하구먼. 껄껄.

수호 형님이 씁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직후의 웃음도 인위적인 티가 다분했다.

나는 허탈하게 웃는 것으로 대꾸해줬다.

“… 허. 허허.”

하긴. 나 같아도 루시가 어디서 억울하게 씹히고 있으면, 저렇게 급발진해서 실드를 쳐줄 것 같긴 하다.

그 마음이 충분히 공감돼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

터벅. 어느 순간, 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발걸음을 멈췄다.

전방의 시커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멀리 던졌다. 처참하게 박살난 아치형 건물의 꼭대기가 어렴풋이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여기가 백검의 성당이야.

워낙 주변이 어두워서 눈치 채는 게 늦었는데.

어느새 나는 풍화되고 무너져 내린, 순백색 거대한 성당의 정문 앞에 서있었다.

―이 대성당 안에. 디아나가 있다.

수호 형님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서늘하게 통보해줬다.

나는 새삼 온몸을 치달린 긴장감에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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