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멸망의 성흔
그대로 얼마나 가만히 있었을까.
고대해 마지않던 퀘스트 완료창이 드디어 눈앞에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명칭: 마녀를 죽여라 ? 세 번째 의식]
[난이도: 전설]
[상세: 인도하는 까마귀는 마녀가 갈망하던 미래를 깨부쉈다. 하얀 그릇에 마녀가 꿈꾸던 미래가 새겨졌다. 마녀의 영원한 안식은, 마침내 마지막 발자국을 내디뎠다.]
[보상: 멸망의 신기 ? 세계의 태동. 체력+2000. 마력+2000. 전 스탯 +250. 히어로 센스 +30]
내 상처뿐인 승리를 축하해주는 건 역시 퀘스트의 성공 패널 뿐이다.
마녀의 계승 의식이 끝날 땐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아아! 드디어 끝났구나. 후우. 길었다, 길었어 진짜.
그런데 이번엔 전번 의식 때와 사뭇 달랐다.
용제국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개드립 한 번 밖에 내뱉지 않았던 수호 형님. 그가 탄성을 내지른 것이다.
오랜만에 들려온 실로 반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화색이 되어 즉각 대꾸했다.
“아니 형님! 뭐 하다 이제야 나와요. 칼 속에 틀어박혀서 야동 봤수?”
거기에 대답하는 수호 형님의 목소리는 깊은 침음이 들어 있었다.
―으으음. 나도 다 사정이 있어 인마. 의식이 진행될수록 조심해야할 게 많아져서. 몸을 사리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조심…? 뭘 조심하는데요?”
―그런 게 있다니까.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어른의 사정이다 새꺄.
수호 형님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이내 같잖은 말로 얼버무려 버렸다.
제 불리한 주제에는 항상 저러지. 치사하긴.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튼 너도 진짜 고생 많았다 정용아! 이제 불사의 마왕을 디아나한테 데려가서, 계승식을 진행하는 것만 남았네.
“… 예. 뭐.”
―훌륭해, 아주 훌륭해! 솔직히 2년도 안 걸릴 줄이야… 정말 놀랐다.
웬일로 수호 형님이 나를 칭찬했다. 누가 봐도 주제를 돌리려는 화법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 주제에 관해서는 물어보고 싶은 것도 산더미다. 나는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네가 헥터한테 집중공격 당했을 때 말이야. 당연히 포기할 줄 알았거든? 거기서 시기적절하게 미네르바까지 가세해 버렸으니까.
“아… 뭐, 그 땐 진짜 다 때려치고 싶긴 했죠.”
수호 형님은 지금까지의 침묵이 거짓말인 것 같이 수다를 떨었다. 그렇다는 건… ‘눈치를 볼 일’이 내가 의식을 끝낸 시점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일 테지.
나는 웃으면서 그의 칭찬에 장단을 맞춰줬다. 안 하던 양반이 저러니까 좀 징그러웠다.
―내가 말이다. 그 때 개입할지 말지 엄청 고민했어 인마. 오죽하면 네 앞에 그런 선택지까지 띄워줬잖아. 그만두고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이야.
“오호. 그랬습니까?”
―그렇다니까. 근데 역시 한국인! 김치맨 종특이 지고는 못 살지 그럼! 나랑 디아나가 사람 하나 잘 골랐다니까 진짜! 으하하!
“후우. 형님. 웃음이 나옵니까. 그 사건 땜에 사람 인성이 하나 박살났는데.”
―기특해서 그러는 거야 인마. 기특해서.
자축과 자화자찬, 그리고 입발린 칭찬을 남발하던 수호 형님.
어느 순간 그의 어조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봐라. 정용아.
“어… 뭐, 뭘요.”
―그 때 왜 그만두지 않았냐.
“그, 그건…….”
―거기서 그만둬도 딱히 널 탓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네 손으로 계약서 쓰고 끌려왔다지만… 맨정신으로 못할 짓인 것쯤은 나도 알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새끼, 다 알면서 묻고 있군.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깨달았다.
―성격상 당하면 갚아줘야 돼서? 헥터에게 묶어놓고 쳐맞은 게 분해서? 그게 진짜 이유냐?
“…….”
내가 그 때, 왜 미네르바의 제안을 거절했냐고?
루시가 내 눈앞에서 죽었을 땐 정말 공허감과 상실감이 엄청났었다. 내가 그녀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구나.’
스스로도 좀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를 움직인 건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내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루시를 죽게 만들었으니까.”
그것이 진짜 이유였다.
루시가 있는 자리에선 쪽팔려서 절대 못 말하지만. 수호 형님만 있는 지금은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그 개새끼들이… 루시한테서, 나를 잊게 만들었잖아요. X발.”
나는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새삼 아랫배 깊은 곳에서 분노가 차오르는 듯했다.
그러자 괜히 짜증의 타깃이 수호 형님에게 돌아갔다. 나는 검집에 들어있는 베스타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봅니까. 분위기 싸해지게.”
―으하핫. 아냐. 별 이유는 아닌데… 대답 들어보니 내 예상대로긴 하구나.
“예상대로…?”
―내가 언젠가 말하지 않았나? 결국 불사신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불사신뿐이라고.
“…….”
―거봐라. 내가 디아나의 기사님이 되었듯이. 어느새 너는… 불사의 마왕을 수호하는 용사님이 돼버렸잖아.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마십쇼. 그렇게 일축하려다가 관뒀다.
대신 나도 수호 형님을 따라서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은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흐하하.”
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샤키엘의 잿더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내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번 퀘스트 완료로 상승한 스테이터스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미미르의 눈.’
삐빅. 어김없이 내 상태창이 눈앞에 등장했다.
[명칭: 박정용]
[별칭: 163417413번째 정식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달인. 멸흉의 계승자. 악몽의 사냥꾼. 유년(幼年)의 처형인.]
[LV. 348]
[체력: 5800/3800 ?마력: 4000/4000 ?신체상태: 심한 광증]
[힘: 797 ?민첩: 999+ ?지능: 511 ?히어로 센스: 79]
그야말로 괴물 같은 스테이터스였다.
계산상 1000을 가뿐히 넘었을 민첩성 수치는 ‘999+’로 표기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스템 상 표기되는 최대치가 999까지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나는 사람을 괴물딱지로 만드는 용사 시스템의 최대치조차 돌파한, 괴물 중의 괴물이라는 소리다.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이로서 나는 명백한 탈인간.
명실상부한 괴물이 되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기합을 내지르며, 주변의 고목나무에 주먹을 갖다 댔다.
“아쵸!”
퍼퍼퍼펑!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굵직한 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힘의 파동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뒤의 나무와 그 뒤의 나무까지 연쇄적으로 박살내 버렸다.
내지른 주먹의 직선궤도로 땅이 갈라지고 움푹 패였다.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잔뜩 가렸다.
―워우. 좀 친다?
수호 형님조차 내가 생각없이 내지른 ‘장난’에 질린 탄성을 냈다.
나는 터무니없는 파괴현장을 잠깐 쳐다봤다. 그리고 상처 하나 없는 주먹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으음. 옛날에 rpg게임 할 때 자주 이랬던 거 같은데.’
소모성 유니크 아이템을 최종보스전 때 쓰려고 아득바득 아끼다, 결국 끝까지 안 쓰고 엔딩을 봐 버린 느낌이었다.
허탈하기 짝이 없네. 볼장 다 본 뒤에야 이렇게까지 강해지니, 오히려 손해 본 기분이다.
‘어차피 이제 남은 건…….’
정말 단 하나뿐이다.
완성된 그릇, 불사의 마왕 루시의 마녀 계승식만이 남았다. 루시를 디아나가 있다는 ‘멸망의 성흔’이라는 장소로 데려가야 한다.
내 길었던 하드코어 이세계 생활도, 지긋지긋한 시공회귀도… 그리고 루시와의 질긴 악연에서 시작된 사망유희 모험도.
그걸로 모두, 끝이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문득 수호 형님이 그런 말을 했다.
―불사신은… 불사신 밖에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후문맥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 *
내가 그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수호 형님이 퍼뜩 선수를 쳤다.
―아 그래. 디아나가 있는 곳으로 어떻게 가지? 하는 아마추어 같은 고민은 할 필요 없다. 내가 다 알아서 준비를 해놨다~ 이 말이야!
방금 전의 낮게 잠긴 목소리와 동일인물이 맞나 싶은 하이텐션이었다.
아까부터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수호 형님이 자신만만하게 말한 희소식부터 캐묻기로 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준비라니.”
―여기서 대륙 중앙에 있는 신성국 슈엘츠까지 가려면 또 한 세월 걸리잖아?
“그야 그렇죠.”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막기 위해서, 세 개의 의식을 마치면 텔레포트 게이트가 열리도록 설계를 해뒀지. 게이트를 타면 바로 멸망의 성흔에 도착하도록 말이야.
“오오.”
그건 좀 반가운 소리다.
아니지. 사람 이 정도로 굴렸으니, 당연히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복지인가?
나는 퍼뜩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수호 형님이 말했던 텔레포트 게이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이트 없는데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에게 돌아가 보라고. 그 주변에 게이트가 생성돼 있을 거니까.
“아하.”
게이트가 생성되는 기준이 내가 아니고, 무조건 루시가 있는 곳인 모양이다. 나는 납득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뭉그적거릴 이유가 없다. 나는 퍼뜩 몸을 일으키고 다시 토벌군의 주둔지로 돌아갔다.
“요, 용사아… 거, 거기는 안 된다아… 으히이…….”
막사의 입구를 열어젖히니, 가장 먼저 퍼질러 자고 있는 루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직후에, 그 옆에서 일렁거리는 시커먼 게이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천천히 루시와 게이트 쪽으로 다가갔다.
‘… 이게 그 게이트군.’
그것이 수호 형님이 말한 ‘멸망의 성흔’ 행 게이트가 확실했다.
크기는 대충 여신의 신전에 있는 차원거울 정도. 불길한 암흑을 무럭무럭 내뿜는 데다, 테두리는 인간의 해골 같은 것으로 장식돼서 못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딱 말하십쇼. 저거 게이트 디자인 누가 했습니까.”
나는 불쾌한 생김새에 침음을 흘렸고. 이내 뻗어 있는 루시를 들쳐 업었다.
수호 형님은 당당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보면 모르냐? 당연히 나지. 존나 간지나서 놀랐어?
“그럴 줄 알았다.”
아무렴 이런 저세상 감성의 게이트가 한수호제 말고 또 있으려고. 나는 쓰게 웃은 뒤 천천히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진짜 가면 되는 거죠? 뭐 부작용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겠죠?”
―없어 인마. 새끼가 속고만 살았나.
“그런 소리를 형님이 한다고?”
―헷.
우리가 자연스럽게 티키타카를 주고받던 찰나. 게이트의 불쾌한 감촉이 온몸을 울컥 휩쓸고 지나갔다.
통상 시야가 빛으로 물드는 다른 게이트들과 다르게 짙은 암흑이 깔렸다. 나는 어둠속에서 연신 뇌리를 후려치는 불쾌감에 몸을 맡겼다.
―가자고.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도… 전부 끝낼 때가 왔다.
그래. 그건 맞긴 하지.
수호 형님의 시원섭섭한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사물과 풍경이 미친 듯이 이지러졌다.
정신이 아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