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뇌명(雷鳴)과 적막
검은 안개까마귀 무리가 맹렬하게 진군했다.
―까아악! 까악!
안개까마귀들은 꿀렁거리며 점점 한 점으로 모여들어 창처럼 날카로운 대형을 짰다. 훈련된 병사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까마귀들이 쐐기처럼 찌르는 지점이 어딘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루루루루루!!
지금도 이스그라드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뱃가죽의 정중앙. 내가 거칠게 헤집어 놓은 손톱자국이 표식처럼 남아있는 곳.
샤키엘이 숨어있는 이스그라드의 자궁이다.
―끼이이이익!
이스그라드의 기분 나쁜 공명음이 귀를 찔렀다.
콰앙, 콰아앙! 이스그라드의 육중한 몸이 연신 바닥을 내리쳤다.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무정형의 까마귀들을 흩어내기 위해서였다.
―우루루루루!!
목을 흔들고, 앞다리와 뒷다리를 허우적대는가 싶으면 꼬리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개까마귀들은 이스그라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철 모기도 한 수 접어줄 집요함이었다.
―까악! 까악!
―까아아악!
후두두둑! 어느 순간 주변을 활공한다 싶다가도, 일제히 쏜살같이 공격을 가했다.
푸확, 푸드드득! 그러면 이스그라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살갗을 무참히 뜯어 먹혔다. 속수무책의 상황 때문인지, 이스그라드가… 그 거대한 재앙이 연신 발을 주춤거렸다.
―끼이익… 기이이익!
이스그라드가 내뿜는 공명음은 확실히 성질이 변해 있었다.
전에는 분노와 고압적인 기세가 담겨 있었다면. 지금은 공포와 혼란이 깃들어 있다. 이스그라드도 지금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괴, 굉장… 하군.”
나는 그 거대한 육체가 안개 속에서 발악하는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푸직, 우드득! 안개까마귀의 형체가 이스그라드의 육체를 스쳤다. 그럴 때마다 이스그라드의 살덩이가 뭉텅이로 할퀴어 찢겨나갔다.
―까아아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거대한 살점과 오염된 피가 뜯겨 나오며 질척한 소음을 흘렸다.
철퍽! 후두둑. 살덩이와 핏줄기가 언덕에 넓게 퍼져 지면을 녹이고 있었다.
―그루루루!
그런 상황이기 때문일까. 이스그라드의 저항 역시 더욱 격렬해졌다. 죽기 직전의 생물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이.
후우우웅! 이스그라드의 꼬리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으하악!”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러 가까스로 피해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나간 꼬리가 지면을 후려쳤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지축이 쩍쩍 갈라졌다. 나는 사방으로 쏟아지는 토사와 바윗덩어리, 그리고 엄청난 풍압에 못 이겨 그대로 튕겨나갔다.
“크악!”
허공으로 붕 뜬 몸을 어떻게든 추슬렀다.
정신을 집중하고, 여전히 격렬하게 반항하는 이스그라드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쇄애액! 곧바로 추가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놈이 아무렇게나 뻗은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내 주변으로 휘둘린 것이다.
‘어떻게든 버틴다!’
안개까마귀가 저 괴물을 초토화시길 때까지. 그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내 승리다!
나는 곧장 휘둘린 팔을 피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기합처럼 욕을 내질렀다.
“으아아 X발!!”
콰아앙! 이번에도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냈다.
멈춰 있을 시간은 없다. 나는 프라이팬 위의 팝콘 마냥 사방으로 튀어다니며, 몸부림치는 재앙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장난 아니네 진짜!”
슬라임처럼 출렁거리는 대지.
연신 쏟아지는 이스그라드의 격렬한 저항.
거기서 한술 더 떠, 안개까마귀가 이스그라드에게 공격을 적중시킬 때마다 부식성이 있는 썩은 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학! 끼요옷!”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사방팔방 탭댄스를 춰대기 바빴다.
그래. 안개까마귀. 위력이 사기적인 건 좋은데. 지금은 이 결전스킬의 치명적인 단점 하나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변신이 풀려버리니 이거… 무조건 피지컬로 피해야 되잖아!!’
말이야 쉽지. 한남 더 힐만한 괴물과 맞짱 뜨는 입장에선,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사방에서 일격사 요소가 우후죽순 쏟아지는데, 심지어 그것들이 거대하기 짝이 없다. 덕분에 피하는 것만 해도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루루루루루!! 우루루루!!!
게다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를 불허할 격렬한 저항의 연속. 샤키엘의 고통과 초조함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쿠궁, 쿠과과광! 놈이 사지를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나를 붙잡기 위해 연신 손을 뻗어대는가 하면. 깔아뭉개기 위해 몸을 바닥에 비벼대기도 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이, X발놈의, 대리충 새꺄!!”
쿠웅, 쿠우웅! 나는 온 신경을 회피에 집중했다.
한 대만 맞아도 즉사다. 그 사실이 자꾸 내 뒷목을 기분 나쁘게 핥아댔다.
‘무슨 X발 출발드림팀도 아니고…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고!’
가만. 미친 짓?
그래. 이건 미친 짓이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나는 곧장 전장을 이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회피할 게 아니라, 차라리 그냥 튀자!’
투학! 필사적으로 이스그라드를 등진 채 지면을 박찼다.
안개까마귀가 한창 이스그라드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중이니, 이스그라드는 내 존재조차 잊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직후. 나는 히어로 센스의 비명에 따라 곧장 그 자리에 엎드렸다.
“… 윽!!”
투콰아앙!
내 바로 위를 거대한 꼬리가 휘두르고 지나갔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수수 무너져 버렸다.
웅장했던 지형지물이 채찍질 한 방에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 뭐, 뭐야.’
나는 부릅뜬 눈으로 이스그라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이스그라드는 머리도 없는 휑한 목을 정확히 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노려보듯이 말이다.
―우루루루…
그리고 낮은 공명음을 냈다.
등줄기에 치달린 소름이 알려줬다. 저놈은 나를 정확히 인식하고, 나를 죽이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전장을 이탈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X발. 그러면 최대한 눈에 안 띄기라도…!’
속으로 불평불만을 씨근거리며 이스그라드의 사각으로 스텝을 밟던 그 순간.
푸화악! 때마침 내 위로 안개까마귀들의 군세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루루루루!!
이스그라드의 거대한 몸이 고통과 공포로 벌벌 떨렸다.
안개까마귀들은 이스그라드의 비늘을 뚫고 살갖을 마구 쥐어뜯었다. 그러자 오염된 피가 내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후욱. 넓은 면적으로 흩뿌려진 피 때문에 내 위로 거대한 그늘이 생겼다.
“… 어.”
순간 망연자실하게 그것을 쳐다봤고. 이내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런 미친…!”
피해야 한다. 저것에 맞으면 레벨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죽는다.
하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피가 쏟아지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도약하기 전에 내 몸이 녹아내린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이내 등 뒤의 흑익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되면 도박수다.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한다.
나는 흑익을 최대한 넓게 편 다음, 그것으로 나를 덮어버렸다.
스르륵. 흑익은 내 의지에 맞춰 나를 감싸듯 전신을 둘러 싸맸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푸화아악! 직후 엄청난 수압이 내 등짝을 후려쳤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크헉!”
치지지직.
섬뜩한 부식음. 화끈한 열기. 그리고 끔찍한 역취가 동시에 사방에서 조여왔다.
사방이 어둠으로 꽉 막힌 가운데.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천천히 흑익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직관해야 했다.
“이 X발… X발…!”
무력감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슬며시 심장 언저리를 긁적였다.
마침내 흑익이 완전히 부식되었다. 부글부글 끓는 흑익의 구멍들 사이로 이스그라드의 오염된 피가 천천히 내 살갖에 침투해왔다.
치지직. 피에 닿은 살갖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아아아아악!”
나는 황급히 흑익을 벗어던졌다.
온몸에서 살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끔찍한 고통을 감내했다.
‘버티긴 했어! 어떻게든…!’
나는 퍼뜩 주변 상황을 살폈다. 사방이 늪처럼 질척한 피로 가득했다.
언덕의 전역이 이미 오염된 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주변은 사실상 늪지대가 된 상태였다.
오염된 피가 용병단원들을 죄다 먹어치웠는지, 어느새 살아있는 이는 거의 없고 인골만 나뒹굴고 있었다.
“회, 회복을… 빨리…!”
나는 펄펄 끓는 오른손으로 파우치를 뒤졌다. 손이 물건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몰아닥쳤지만 어거지로 참아냈다.
황급히 에테르 병을 꺼내 물의 에테르를 들이켰다.
“커헉… 후우… 하아.”
그제야 죽을 것 같던 고통이 조금씩 가셨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몸의 부식이 대부분 멈췄지만, 피의 침식이 심하게 된 곳은 여전히 살갗이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이, 일단 살고 봐야지…!’
더 이상 미래를 대비할 때가 아니었다.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 남아있던 두 개의 에테르를 전부 빨아버렸다.
우우우웅. 짙푸른 에테르의 불꽃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제야 부식이 완전히 종식되고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루루루루!
그리고 그 순간. 이스그라드가 문득 비명처럼 긴 공명음을 내뱉었다.
시선을 들어올렸다. 안개까마귀는 내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이스그라드라는 거대한 재앙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흡사 말벌 떼에게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는 코끼리를 보는 듯했다.
―까아악!
그리고 그 때. 시커먼 안개가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푸스스스. 꿀렁거리며 원형으로 집결한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내 머리 위를 맴돌았다.
‘뭐지…?’
안개까마귀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잠깐 당황했고. 이내 무언가 깨달은 나머지 이스그라드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봤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뚫렸다…!”
이스그라드의 철통같던 가드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풀릴 수밖에 없었다.
―그르륵… 그르르륵…!
두 앞다리는 걸레짝처럼 너덜거려 이미 옴짝달싹 못 했다. 한 쪽 뒷다리는 벌레가 파먹은 듯했고, 날개는 양쪽 모두가 처참하게 뜯겨나갔다.
질척한 피로 점철된 꼬리는 바닥에 널브러져 연신 경련하고 있을 뿐.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위협적인 움직임을 내지 못했다.
―까악! 까악!
안개까마귀들이 일제히 울었다.
마치 내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움직임이다.
그래. 그렇다면 명령해줘야지. 나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빳빳이 들어 삿대질했다.
“전원 공격!”
물론 가리킨 곳은, 단단한 배갑으로 둘러싸인 이스그라드의 하복부였다.
“싹 조져버려!!”
쿠구구구!
안개까마귀 떼가 일제히 진군했다. 거대한 비행기 편대가 이륙하는 듯한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퍼버버벅! 안개까마귀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이스그라드의 배갑을 파고들었다.
―캬아아아아악!!
비명이 천지를 흔들었다.
뇌명이 몰아치는 듯한 비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