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있으면 안 될 것들이 가득했다.
“…….”
키기기긱―.
쉬익―. 쉬익.
크고 작은 벌레들이 가득 차있는 장방형의 공간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시커먼 벌레의 파도 속에서, 하반신을 푹신 담근 채 서 있었다.
“… 어.”
바글바글바글.
탄성을 내지르기 무섭게, 무수한 벌레들이 순식간에 내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나는 멍한 탄성 끝에 사태를 어렴풋이 파악했다. 등줄기로 격한 소름이 치달렸다.
“…!…!”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벌레들을 쳐다봤다.
놀라지 않은 게 아니다.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먹혀버린 것이다.
“아… 흐핫… 후, 하, 후…….”
잠깐 상황을 파악할 겸 진정도 할 겸 심호흡을 했다. 임산부 마냥 라마즈 호흡을 잠깐 하니 머리가 좀 맑아졌다.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니 현상황에 대한 혼란도 더욱 선명해졌다.
‘아니. 뭐야. 대체 뭐냐 이거. 갑자기?’
기절하지 않은 내 자신이 용하게 느껴지는 한 편. 기절하지 못한 내가 저주스러웠다.
알딸딸한 정신으로 애국가를 외고 있던 그 순간, 문득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까마귀님.”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의 여자가 보였다. 새하얀 고치로 하반신이 감싸인 전신이 새하얀 여자였다.
아니. 여자라고 해야 하나. 곤충의 암컷 형상을 한 그녀는… 무려 자드키엘이었다. 그녀가 하나뿐인 눈을 버젓이 뜬 채 나를 자애롭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 어…? 자, 자드키엘은 주, 죽지 않았던가?”
나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림을 애써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비명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네. 마녀 계승의식의 재료 중 하나였던 마왕 자드키엘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존재할 수도 있는 거지요.”
자드키엘(이었던 것)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미간에 큼지막하게 박힌 하나의 눈이 나를 향해 호선을 그리나 싶더니. 이내 그녀는 촉각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까마귀님을 계도하기 위해, 이 좁은 세계에 속박된 사념의 파편입니다. 자드키엘과는 명백히 다른 개체입니다만… 까마귀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마당에, 알아듣기 힘든 말들의 연속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자드키엘인 그녀가 본인의 입으로 자드키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뭐 너도 또 다른 샤키엘이냐?
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야. 아니, 그보다 여기는 어디냐. 너는 뭔데… 아오 씨 쫌 떨어져 X발! 이런 끔찍한 곳으로 나를 데려온 거냐고!”
말하다 말고 대뜸 역정을 냈다. 자꾸 얼굴로 기어 올라오는 벌레들을 쳐내다 울컥 짜증이 솟은 것이다.
하지만 내 질문에 자드키엘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행색이었다.
“여기는 피안계입니다. 까마귀님.”
“피, 피안계?”
“네. 까마귀님이 사망하셔서, 피안윤회 스킬로 만들어낸 피안계에 까마귀님의 잔류사념이 연결된 겁니다.”
“… 아?”
“지금 느끼시는 자신의 존재가, 사망한 까마귀님의 실체화된 잔류사념이지요.”
나는 알딸딸하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자드키엘이 포근한 미소와 함께 정리를 해줬다.
“요약해 드리자면. 제가 까마귀님께 다가간 게 아니에요. 까마귀님이 죽으셔서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신 거지요.”
“… 아.”
그렇구나. 피안계. 죽음. 잔류사념.
그 말들을 듣고서야 전말이 대충 그려졌다.
어렴풋하게 눈 뜨기 직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스킬 피안윤회… 제대로 발동이 됐구나.’
그래. 나는 다크 레이븐을 사용해 이스그라드에게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나를 포착한 이스그라드가 엄청난 덩치와 안 어울리게, 재빠른 동작으로 앞발을 들어서 나를 후려쳤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와… 미친. 설마 그 한 방에 즉사한 거냐?”
나는 상체에 들러붙은 수십 마리 벌레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어 봤다.
새로 뽑은 중갑옷까지 두르고 달려들었 건만. 용가리의 매서운 파리채 블로킹 한 대 쳐맞고 세상 하직하다니. 새삼 그 거대한 괴물과 나의 전력차가 실감되었다.
“까마귀님. 여기서 눈을 뜨시려면 제 손을 잡아주세요. 회귀점에 속박된 까마귀님의 육신에 잔류사념을 덮어씌우겠습니다.”
문득 자드키엘이 하나 뿐인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리고 내게 선뜻 손을 뻗어왔다.
“…….”
당연히 나도 이 기분 나쁜 공간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벌레들을 성큼성큼 헤치고 자드키엘에게 다가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드키엘의 앙상한 손에 천천히 내 손을 가져갔다.
“아.”
새하얀 손을 잡기 직전.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올라 자드키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드키엘.”
“네. 왜 그러시죠. 까마귀님.”
“과거의 육체로 지금의 정신이 이동하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진짜 나야? 아니면 아직 죽지 않았던 내가 진짜 나야?”
“…….”
자드키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서 나를 쳐다봤고. 이내 천천히 내쪽으로 날아왔다.
곤란한 표정으로 피식 웃은 그녀가, 네 개나 되는 손으로 내 팔뚝을 꽉 붙들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까마귀님. 아신들은 물론이고, 불사의 계약을 만들어낸 마녀 디아나도. 심지어 까마귀님 본인도 모르겠지요.”
자드키엘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천천히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까마귀님. 그 답을 계속 찾아 헤매셔야 합니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도… 당신이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면 말이죠.”
파아앙!
그녀에게서 눈부신 광휘가 쏟아졌다. 주변을 가득 메웠던 벌레들이 순식간에 하얀 빛으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좁은 골방이 새하얗게 빛났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4일, 06시 34분]
[장소 ? 용제국 케나인. 고룡의 평원, 태고룡의 무덤]
부우우웅―!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적막에 잠겨 있던 전장을 길게 울렸다.
순간 알싸한 긴장감이 군중들을 타고 흘렀다.
“전군 돌격해라!! 목표는 선조룡, 이스그라드의 유해다!!”
시기 좋게 크라네이드의 대포소리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용병부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쥐떼 마냥 광기어린 대병력의 질주가 이어졌다.
“우와아아… 아?”
그리고 피안계에서 돌아온 나는, 그 시점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필사적으로 회전시켜 사태를 파악했다.
‘병사들은 살아있고. 공격명령이 이제야 떨어졌고. 적랑은 내 옆에 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이스그라드에게 손바닥 쳐맞고 뒈진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다.
기억을 가진 채 시공회귀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회귀점에서 다시 눈뜬 것이다.
“좋아. 그러면!”
나는 곧장 내가 해야할 일을 파악했다.
우드드득! 우선 다크 레이븐을 발동시켜 중갑옷과 거대한 날개를 착용했다. 그리고 옆에서 질주하는 적랑을 팽개치고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당신 각오는 잘 알았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아.’
알아서 죽겠다는 사람? 과감히 죽게 놔둔다.
전생처럼 적랑을 말리는 데 시간을 쏟으면. 같은 미래만 반복될 뿐이다. 그건 내쪽에서 사양이다.
‘나는 지금 X발. 여기 있는 수천 명 목숨이 인질잡혀 있다고!!’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인간들의 미래에는 ‘이스그라드’라는 이름의 죽음만이 있다.
그렇게 끝나지 않으려면. 내가 직접 환상의 똥꼬쇼를 해서라도! 이 전투에 뭔가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그오오오오오!!
이스그라드가 전생 때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지가 요동치는 포효 소리에 기세 높던 진군이 일순 우뚝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언덕 꼭대기의 거대한 괴물에게 집중되었다.
“새끼. 목청은 여전하구만!”
전생에선 나도 저 웅장함에 압도되어 전진을 멈췄지만. 이번의 박정용은 경력 있는 신입이다.
저 정도 비명 따위로 쫄지 않는다.
‘지금이다!!’
나는 오히려 비행속도를 최고조로 가속했다.
푸화악! 날개에서 사출되던 검은 마력이 한층 진해졌다. 음속을 초월했는지, 온몸이 찌부러질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고. 등 뒤로는 충격파가 연신 터져나갔다.
“으아아아! 관성 드리프트!!”
언덕의 가파른 경사를 만난 나는, 고함과 함께 공중에서 튕겨나가듯 급부상했다.
푸화악! 로켓처럼 맹렬하게 몸이 치솟았다. 공기가 실시간으로 차가워졌다. 푸른 하늘이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상승하고 나서야, 겨우 이스그라드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그르르르르!
이스그라드의 거대한 머리가 내 앞에 있었다. 놈의 입장에선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하루살이를 보는 느낌일 테다.
이스그라드는 낮게 목청을 울리며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그 눈을 마주봤다가, 슬쩍 숨을 삼켰다.
“… 으, 헉.”
놈의 보라색 눈동자가 유난히 분주하게 움직인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눈을 파먹은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착각한 거였다.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간신히 삼켰다.
“진짜, 넌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생물이구나.”
나는 어디 만화에서 봤던 것 같은 대사를 주워섬겼다.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놈의 미간에 대고 겨누었다. 나는 그 썩은 눈동자 너머에 있을 진정한 타깃… 샤키엘을 향해 말했다.
“빵댕이 까놓고 기다려라. 조만간 맴매하러 갈 거니까.”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이스그라드가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렸다.
―크오오오오오!!
엄청난 포효. 거기서 뿜어져 나온 풍압이 나를 후려쳤다.
다크 레이븐의 출력으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강풍에 날아가는 날파리 마냥 반대편으로 튕겨나갔다.
‘빨리 제동을…!’
나는 엄청난 강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크레이븐의 날개를 분주하게 조작했다.
그리고 푸쉬익. 김빠지는 듯한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어?!”
소리가 귓전을 강타한 그 순간.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등줄기를 후려쳤다.
나는 등 뒤로 퍼뜩 시선을 돌렸다. 김빠지는 소리는 마력을 뿜어내던 날개죽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날개에서 더 이상 마력이 분사되지 않고 있었다.
“… 어.”
얼빠진 탄성과 함께 쑤욱, 중력에 따라 몸이 속절없이 추락했다.
“어어어?!”
얼빠진 탄성은 당황과 분노의 탄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삐빅. 시기적절하게 패널 하나가 등장해 시야를 어지럽혔다.
[경고: 흉마 소진]
[축적된 모든 흉마가 소진되었다. 지속형 스킬 ‘마갑 다크레이븐’이 자동 해제되었다.]
스르륵. 패널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다크레이븐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깨 뒤에서 미친 듯이 펄럭이는 흑익만 걸려 있을 뿐이다.
“다, 다크레이븐! 다크레이븐! 아 X발 다크레이븐이라고!!”
나는 혼란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도 황급히 다크레이븐 스킬을 재가동해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흉마가 소진되었다는 패널의 정보가 사실인 듯싶다.
“이, 이 X발!! 이,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시시각각 땅바닥이 가까워지는 와중. 나는 흑익을 만지작거리며 당황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생각하자니… 그제야 어떤 사실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아아. 그, 그렇구나. 피안윤회…!’
아차 싶었다.
피안윤회 스킬은 축적돼 있던 ‘모든’ 흉마를 사용해 발동하는 스킬이다.
피안계를 구축한 뒤, 곧바로 나는 한 번 뒤졌다. 덕분에 다크레이븐을 발동할 정도의 흉마는 쌓였겠지만… 그래봐야 잠깐 유지할 정도 밖에 쌓이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미친 X팔… 그럼 뭐야. 이대로 꼼짝없이?!”
나는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한 나머지 욕지거리를 주워섬겼다. 그리고 흑익을 재빨리 풀어헤쳐 양손으로 그것을 펼쳐들었다.
펄럭! 흑익이 낙하산처럼 작용하며 낙하하는 속도가 급격하게 줄었다. 여전히 빠른 속도였지만, 이 정도면 죽지는 않고 착지할 수준이었다.
“에휴 X발!”
박복한 팔자가 서러워진 나머지 욕을 한 사발 갈겼다.
콰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이스그라드의 발치로 착륙했다.
말이 착륙이지, 사실상 추락이었다. 땅을 한참 데굴데굴 구르고, 물의 에테르를 먹은 다음에야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크으…!”
나는 아직도 얼얼한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르르르르…!
서슬퍼런 그로울링을 내는 이스그라드.
이빨이 잔뜩 박힌 아가리. 그리고 썩어 문드러진 두 눈이 아득히 먼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놈이… 똑바로 나만을 쳐다보고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무지막지한 박력이었다.
“X발… 뚜벅이는 이래서 안 돼…….”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었지만. 나는 이내 자세를 낮춰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한. 살아있기를 포기해선 안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