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피안(彼岸)과 윤회(輪回)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4일, 06시 34분]
[장소 ? 용제국 케나인. 고룡의 평원, 태고룡의 무덤]
부우우웅―!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적막에 잠겨 있던 전장을 길게 울렸다.
순간 알싸한 긴장감이 군중들을 타고 흘렀다.
“전군 돌격해라!! 목표는 선조룡, 이스그라드의 유해다!!”
시기 좋게 크라네이드의 대포소리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용병부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쥐떼 마냥 광기가 어린 병사들의 질주가 이어졌다.
고함소리를 들으니 절로 고양감이 솟구쳤다. 나도 거기에 편승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려 했다.
“우와아아… 아?”
그러나 눈앞에 갑자기 떠오른 패널이 방해됐다.
즉각 달리기를 멈췄다. 짜증스런 몸짓으로 패널을 확인하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이런 X발.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입력되며, 머리가 순식간에 회전했다.
생각해보자. 일단 전쟁 난리통에 잔류사념 찾겠다고 빨빨거리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적랑님! 잠깐 타임!!”
그래.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지. 적랑의 기계팔부터 붙들고 늘어지기로 했다.
용맹하게 전진하던 적랑은 갑자기 내가 붙잡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뭐하는 겐가 정용 군! 이거 놓게 어서!!”
“잠깐만요 적랑님! 미친소리 같겠지만요! 제 귀신같은 촉이 돌격하면 백타 뒤진답니다! 저를 믿고 잠깐 티타임 쌈박하게 가지면서 작전구상이나 좀…!”
“아니 자네!! 이 급박한 시국에 무슨 헛소리를…!”
그리고 거기까지 실랑이를 벌인 순간.
이스그라드가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뿜었다.
―그오오오오오!!
나도 적랑도 순간 모든 행동이 멎었다.
성난 들쥐 떼 마냥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던 국가용병단원들도. 하늘을 누비며 돌진하던 기룡대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시선은 모두 한 군데로 쏠려 있었다. 태고룡의 무덤 꼭대기였다.
“저, 저거.”
“저, 저놈이… 바로!”
쿠구구구.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육중한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모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주시하고 있다.
아무도 그 위압적인 광경 앞에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
“…….”
들끓는 구더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보라색 눈두덩.
썩어 문드러진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과, 그 사이 듬성듬성 박힌 이빨.
거대한 고층아파트가 움직인다 해도 좋을 거구. 다 찢어져 넝마가 된 날개.
육체는 군데군데 썩어 들어가 온갖 벌레와 역취가 들끓었고, 그 안엔 내 몸뚱이보다 굵직한 뼈들이 드러나 있다.
―키아아아아악!!
몸을 완전히 일으킨 이스그라드가 재차 울부짖었다.
산천초목, 천지강산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진동과 풍압만으로도 이미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 아아아악!!”
“카하아악!”
레벨이 낮은 용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피가 흐르는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둥거리는 놈. 그리고 게거품 문 채 정신을 잃어버린 놈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나는 히어로센스가 온몸을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 X발!”
나는 적랑을 양손으로 덥석 껴안아 들었다. 그리고 흑익을 변화시켜 마갑 다크레이븐을 소환했다.
푸화악! 날개에서 마력을 전력으로 분사했다. 적랑을 공주님 마냥 껴안은 나는 초고속으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내가 X발! 중년 아재 공주님 안기 해주려고 이런 기술 배운 게 아닌데!!”
자괴감 들고 괴로워서 불평을 잠깐 토로했다.
하지만 일단 사람은 살려야 할 거 아니냐. 나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고도를 높여 지면에서 멀어지기 위해 용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직감대로 이스그라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거 설마…!”
“브레스다! 이스그라드가 브레스를…!”
사태의 변화를 뒤늦게 감지한 몇 명이 목청을 찢어져라 높였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쿠오오오오오!!
이스그라드가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놈의 입가에 질척한 녹색의 무언가가 질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것을 목격했는지 순간적으로 적막이 강림했다.
어느 순간.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던 그것을 이스그라드가 사방을 향해 흩뿌렸다.
“모, 모두 도망…!”
푸화아악! 누군가 외친 단말마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언덕의 전역을 걸쭉한 녹색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내가 올라온 공중까진 닿지 않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우윽, 미친…!”
시체 수십만 구가 동시에 썩는 듯한, 상상초월의 역취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한참 위까지 상승해 있는 내게도 닿을 정도로 끔찍한 악취였다.
“끄아… 아아아아악!!!”
나는 공중에 떠있는 채로 언덕 위의 참상을 지켜봤다.
고레벨이고 저레벨이고 상관없었다. 시독의 브레스에 직접적으로 맞은 인간들은 남김없이 살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나는 독기의 브레스가 휩쓸고 간 전장을 내려다보며, 입을 콱 다물었다.
사실상 브레스를 직격당한 용사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었다. 이미 피와 살이 죄다 녹고 뼛조각만 남아 바닥에 널브러졌기 때문이다.
“아아악! 살려줘! 제발, 살려줘!!”
“내, 내 몸… 몸이이이!”
엄폐물 뒤에 숨어서 간신히 연명한 이들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즉사만 안 했을 뿐. 그들은 신체의 일부가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미증유의 공포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사방이 순식간에 비탄과 비명으로 가득찼다.
“이, 이게 뭐야.”
“주, 죽고 싶지 않아…!”
브레스 단 한 방.
그것으로 무려 반절 이상의 용병단원이 쓸려나갔다. 숫자로 치면 대략 3천에 육박한다.
자기 명성을 올릴 생각, 돈 벌 생각에 드높던 사기가 꺾이기엔 충분했다. 아마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감과 절망감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겨, 격이 다르구나. 진짜 괴물은.’
나부터가 지금 절망감을 맛보고 있다.
쟤네라고 별 수 있겠냐. X발.
“쏴, 쏴라!”
옆에서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코스크 기룡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룡대의 거대한 비룡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물론 거대하다곤 해도, 눈앞의 찐퉁 드래곤 앞에선 장난감 비행기로 밖에 안 보였다.
“뭘 꾸물대는 거야! 1중대! 화염포를 쏘란 말이다!!”
그리고 장난감 비행기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 여인이, 편대 선두에서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 으, 윽!”
“흐으. 흐윽…!”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용기사 여인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에 찬 얼굴로 언덕의 꼭대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도 기룡을 조작해 화염을 뿜을 생각은 못했다.
“이, 이길 수 없어…!”
“저런 괴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오히려 대열에서 이탈해 줄행랑을 쳐버리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코스크 기룡대의 명성과 악명을 생각했을 때,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공포스러운지 떠올리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돌아와라! 지, 지금 도주하는 자는 군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기룡대의 철칙을 잊어버린 게냐!!”
정작 그렇게 외치는 기룡대 편대장도 진심으로 돌아오길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모두 무서운 것이다. 저 압도적인 존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용제국의 가장 날카로운 검, 코스크 기룡대의 편대장이라도 마찬가지다.
“하… 내 인생, X발 진짜…!”
나도 심히 공감하는 바라 욕을 좀 주워섬겼다.
샤키엘에겐 미안하지만. 난 용제의 토벌대 출격 결정에 쾌재를 부르는 파였다.
‘또 안일했어. 언제쯤 돼야 덜 안일해질래. 정용아.’
그래. 솔직히 꿀빨 생각을 좀 했다.
거 용가리 새끼가 세 봐야 얼마나 세겠어. 이 정도 규모의 군대면 드래곤이라도 충분히 때려잡겠지. 오랜만에 꿀 좀 빨면서 설렁설렁 싸우겠네.
이런 안일한 생각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었어. 샤키엘이 백번 옳았다.’
저걸 잡으라고?
상상 이상이다. 인간의 몸으로 저거한테 덤비는 것 자체가 그냥 개죽음이다.
저 생물은 ‘박력’이란 말로 설명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샤키엘이 말했던 대로 움직이는 재앙에 가까웠다.
“저, 저, 정말… 터, 터무니없군.”
내 품에 안겨 있던 적랑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그의 눈에서 뿌리 깊은 공포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했다. 날고 기는 늑대도 호랑이 앞에선 쫄아서 튄다. 그것이 섭리다.
‘저건… 정말 그 정도라고.’
그냥 도망치는 게 섭리. 그렇게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무언가다.
나는 브레스의 독기가 빠지기 시작한 전장 위로 천천히 착지했다. 적랑을 슬쩍 내려주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적랑님. 깨닫는 게 좀 많이 늦었는데요. 드래곤 레이드는 존나 개미친 짓입니다.”
“… 내, 내가 봐도 그래 보이는군.”
“알았으면 도망치십쇼. 내가 책임지고 저 용가리새끼 때려잡겠습니다! 저만 믿고, 뒤도 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그럴 수는 없네.”
하지만 내 제안에 적랑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기껏 멋진 멘트를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던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비행궤도를 삐끗했다.
“아니 X발 뭐가 어째요?!”
푸쉬익! 곧바로 마력의 출력을 줄였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황급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적랑이 꼬장꼬장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여기가 내 무덤이라고 이미 다짐했다. 이제부터 나는 절대 신경쓰지 말게.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네는 자네의 방식대로 싸우게나. 정용 군.”
“아니 X발! 적랑님…!”
미친 백발 노친네가 중년치매가 도졌나. 이 급박한 상황에 가오를 잡고 지랄이네.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나이가 몇 개인데 똥오줌 못 가리고 ‘너만의 듀얼을 해라’ 같은 소릴 지껄이고 있냐.
‘안 되겠다… 용서해라 카르할라스!’
너희 애비 지금 자살하려고 한다. 이건 패륜을 해서라도 내가 막겠다.
나는 적랑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챘다. 그리고 그의 면상에 싸닥션을 갈겨대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적랑님! 이거 X발 개죽음이라고요!! 이렇게 버릴 목숨 있으면 집에서 딸내미나 보살피십쇼! 딸내미가 엄마 아빠 뒤진 세상에서 X팔, 퍽이나 즐겁게 살겠수다!”
“… 흠.”
적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X발 나한테 그런 훈수를 둬?’라는 눈빛으로 지그시 노려볼 뿐이다.
그런 눈빛을 받으니 심히 양심이 찔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피했다.
‘나도 알아 새꺄. 안다고!’
나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엘프리데와 카르할라스를 남겨두고 산화하려 하는 적랑. 그리고 세스나와 설백, 유리아를 떨어뜨려 두고 데스런을 시도하는 나.
솔직히 누가 봐도 그 나물이 그 밥이다. 내 얼굴에 침뱉는 꼴이다.
“정용군. 나는 자네가 주변인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적랑이 어느 순간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쌍심지를 치켜세운 채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 뭐요?”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지. 지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뼈에 사무치는 무력함이 싫은 게야. 그렇지?”
그리고 적랑은 특유의 야생동물 같은 눈을 번들거렸다.
나는 거기에 대고 도전적으로 마주봤다.
“나는 자네의 그 이기적인 이타심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네가 일행을 버려두고 혼자서 운터란트에 향하려 할 때도, 군말없이 자네를 도왔네.”
“… 그런데. 뭐 어쩌라고요.”
사실이다 보니 함부로 반박하기가 좀 그랬다. 나도 모르게 멱살을 쥐어챈 손에서 힘이 점점 풀렸다.
적랑이 그 사실을 알아챈 건지, 가볍게 멱살을 풀어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자네에게 목숨을 빚진 적도 없고. 하물며 자네에게 보호받을 생각은 더더욱 없네. 걱정은 고맙네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아두도록.”
“…….”
“내 목숨은… 한참 전에 죽은 내 반려의 것이다. 엘리스 말고는 관여할 수 없어.”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를 쳐다봤다. 적랑은 전에 없이 후련한 표정으로 기계팔을 매만졌다.
철컥! 기계팔이 격철음과 함께 파일벙커를 자동으로 장전했다. 적랑은 내 어깨를 툭, 주먹 끝으로 건드렸다.
오랜만에 몸으로 겪는 적랑의 주먹 인사법이었다.
“나는 지쳤다. 이미… 너무나도 지쳐버렸어. 여기서 나는 엘리스를 만나러 간다.”
“…….”
“자네라면. 이 세상에 다시 안녕을 가져와줄 거라고 믿고 있네. 그러니 내 딸의 미래는… 오롯이 자네에게 맡기겠다.”
적랑은 그런 무책임한 말만 남긴 채 언덕 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채 붙잡을 새도 없이 적랑은 시야 밖까지 멀어져 버렸다.
“이, X발… 진짜 개X발!!”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내가 딱 비슷한 과의 똥고집 새끼라 잘 안다. 저거 붙잡아도 소용없다. 그냥 시간낭비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적랑이 사라진 곳을 향해 소리쳤다.
“X발 나도 이제 몰라! 방금 한 말! 죽어서도 기억해야 될 거다! 적랑!”
왜냐하면 내가 드래곤 레이드에 참가한 이상. 드래곤 모가지 따기 전까진 영원히 드래곤 레이드가 끝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그 순간. 다시금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터졌다.
―크오오오오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이스그라드가 입가에 다시금 이글거리는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 2차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을 정확히 파악했다. 손을 뻗고, 마력과 흉마를 집중시켰다.
“피안윤회!”
죽고 나서도 기억을 유지하게 해준다는, 자드키엘의 보상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우우웅. 시동어를 외치자 잠시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직후 밀린 숨을 몰아쉬듯,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끄으…!”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터질 듯이 격렬하다. 눈앞이 새빨갛게 칠해졌다. 땅이 솟아오르고 하늘이 무너지는 괴상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췄던 듯한 시간이 한순간에 몰아서 흘렀다.
“커헉!”
순식간에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패널들이 떠 있었다.
[알림: 피안계 구축 완료]
[체내에 잔류한 모든 흉마를 피안계의 구축에 사용했다. 인간성이 대폭 마멸되었다.]
[구축된 피안계에 흉마를 추가적으로 불어넣어 유지할 시, 기억 유지가 가능한 사망 횟수가 증가한다.]
[현재 기억 유지가 가능한 사망 횟수: 25번]
‘좋아. 사망 대비는 완벽하다.’
이 스킬이 제대로 작동만 해준다면… 이자나미의 심장도, 망자의 함도 이젠 방구석 장롱행이 되겠군.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다크 레이븐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접근 해주지. 어떻게든!!”
푸화악! 검은 마력의 잔향을 꼬리처럼 남기며, 나는 창공을 가로질렀다.
순간 이스그라드의 썩은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놈이 육중한 머리통을 옮겨 나를 대치했다.
―그오오오오오!
아스그라드가 팔을 휘둘렀다. 공기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생각보다 다가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이런…!’
날아가던 속도가 너무 붙었다. 궤도를 선회할 수 없다. 이건 못 피한다.
죽음. 두 글자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으아아아아!!”
놈의 손아귀가 드리우는 압도적인 그림자가 빠르게 짓눌러왔다. 나는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고함을 내질렀다.
후욱. 순식간에 감각이 차단되었다.
어둠이 몰아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