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최후의 단란
나는 결국 수 시간의 갈굼 끝에, 내가 홀로 떠나게 된 모든 이유를 자백했다.
물론 MSG가 팍팍 듬뿍 쳐진 이유였다.
“그… 예. 이것이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전말입니다. 예.”
그 진상의 요약은 대충 이렇다.
나는 적랑의 강함을 흠모했다. 전율하고 동경해버렸다.
그래서 더욱 강해지기 위해 적랑의 밀명을 받고 수련을 떠났다.
남자의 패도(覇道)에 여자 따윈 사치다. 그래서 두고 갔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이것이 내가 밝힌 진상이다.
참고로 각본은 적랑이 쓰고 연기만 내가 했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십쇼.”
나는 텐트 중앙에 정좌한 채 최대한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송구스러워 보이는 표정 짓는 스킬은 막노동판에서 마스터한지 오래다. 어렵진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인 건지, 결국 두 사람의 긴 한숨과 함께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하아. 정말. 다음부터는… 절대로, 절대 그러지 마세요. 알겠죠?”
“아. 뭔가 또 속는 느낌인데…….”
미안. 속인 거 맞다.
시공회귀나 마녀사냥 등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아 난 잘 모르겠고. 적랑이 수련 빌미로 시켰음. 아무튼 그럼.’이라는 탑솔러식 남탓 스탠스를 고수했다.
물론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다. 사전에 적랑의 귀띰이 있었다.
―무조건. 내가 자네를 수련시킨 걸로 하게. 이미 그렇게 말을 맞춰놨어. 이제 와서 아귀가 안 맞으면… 자네나 나나 큰일날 걸세.
오랜만에 만난 적랑조차, 좀 두려운 눈빛으로 세스나와 설백을 경계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쓸데없는 언쟁보단, 적랑의 오른쪽 어깨에 달린 기계팔이나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열심히 두 여자의 비위를 맞췄다.
‘… 그래도 뭐. 어찌어찌 잘 넘어갔군.’
나는 힘도 잘 안 들어가는 다리를 움직여, 어거지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기습을 당해서 그런가.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다.
엘프리데가 비루한 내 꼬라지를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히히… 그러게 문어발 마냥 양다리 걸치면 안 되지이. 함부로 여자 후리고 다닌 자업자득이야. 히히히.”
“거 조용히 하십쇼 누님.”
X발. 진짜 작업이라도 걸었으면 내가 억울하지라도 않다.
그래. 솔직히 말없이 도망쳐 버린 건 미안하다. 의리도 우정도 싸가지도 없는 짓이니까. 화낼만 해.
근데 그 다음에 이어진 대화의 맥락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아와 샤키엘의 존재 때문에 더 빡세게 혼난 것이다.
“정용님. 그 사이 일행이 좀 더 늘었네요?”
“게다가 전부 여자… 네요?”
“어머나. 아아, 정말이지, 어머나아.”
“대체 뭐였을까. 저분들은 뭐가 우리랑 달랐던 걸까?”
그 뒤로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미친 듯이 나를 조리돌림 했다.
X발 대체 왜지? 혹시 그런 건가? ‘나는 떼놓고 갔으면서, 다른 사람은 버젓이 같이 다니는구나’ 싶어서?
여행을 같이 했던 동료로서, 배신감을 느끼기라도 건가.
“…….”
그러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된다.
예끼 X발 박정용 새끼. 어떻게 생각해도 내가 심했다. 인정.
‘아니. 근데 엘프리데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옆에 앉아서 키득거리는 음침한 누님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른 인물들은 다 여기 있을 수 있다 치자. 어차피 적랑이 그녀들과 함께 용제국으로 오는 건 나도 예상했던 수순이었다.
각오는 했었다. 그게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문제였지.
‘그런데 이 여자는 정말 의외네.’
엉덩이가 가벼운 직급도 아니고, 무려 한 나라의 수장인 칠마존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대체.
내가 그걸 묻자 엘프리데는 태연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나 칠마존 그만뒀어. 몰랐니?”
“엥? 그, 그래요?!”
“늑대 오빠가 카발리어가 아닌 마당에 칠마존이 다 무슨 소용이니. 후후.”
엘프리데는 칠마존 허울을 벗은 것이 어지간히도 속 시원하다는 행색이었다.
그리고 예상 외의 소식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용케 국가가 허락해줬네요?’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희소식을 하나 들려줬다.
“으응. 대타가 있었으니까아. 내 대신에 할센베르크 백작님이 칠마존이 될 거야아. 네가 나보다 잘 알겠지만,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거든. 모함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칠마존이 될 사람이었어.”
“그, 그 변경백이… 칠마존이라고요?”
“응. 헤헤. 내가 너한테 고마운 것도 있고 해서, 특별히 힘 좀 썼어. 잘했지이?”
“… 예. 자, 잘하셨네요.”
나는 믿음직한 변경백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새 나는 실실 웃고 있었다. 잘 됐으면 했던 사람이 잘됐다니, 순수하게 기뻐서 나온 웃음이었다.
엘프리데는 그런 나를 보며 “응. 힘쓰길 잘했네.”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웃음을 숨겼다.
“뭐… 그러면 지나간 일들은 우선 잊고. 재회를 기뻐하며 다들 한 잔 하지.”
그런 일련의 해프닝이 끝나고. 우리는 적랑의 주도로 가볍게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의 말로는 재회를 기념하는 파티란다.
세스나가 퍼뜩 일어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아. 그러면 제가 안주거리를 좀 요리해 올게요!”
“오오. 그래주게나. 세스나 양.“
“후후. 조금만 기다리세요 정용님!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드릴게요!”
세스나가 방글거리며 말하더니, 막사 밖으로 나갔다.
옆에서 설백이 “저도 도울게요.”라고 첨언하며 그 뒤를 퍼뜩 따라나섰다. 샤키엘은 취사 도구를 찾아주기 위해서 같이 나갔다.
30분 가량이 지나자, 세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펄펄 끓는 전골 요리와, 닭튀김 같은 것이 잔뜩 들려 있었다.
“많이 드세요 정용님! 그 약속, 아직 유효하죠?”
세스나는 슬쩍 눈웃음을 치며 내 앞 테이블에 닭튀김을 내려놓았다.
나는 입을 퍼뜩 다물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약속? X발 무슨 약속.’
이내 한참 전의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시험의 장막의 기억이었다. 마지막에 그녀와 나눴던 ‘여기서 얻어먹은 만큼 나중에 뱉어내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 음. 근데 세스나.”
“네? 왜 그러세요?”
나는 고개를 퍼뜩 끄덕이는 한 편, 그녀에게 황급히 첨언했다.
“그… 그 때 그건 으레 하는 인사말 같은 거였어.”
“네? 인사말… 이요?”
“어. 심각하게 보답하려고 안 해도 돼. 사실 그런 약속은 이미 한참 전에 잊어먹고 있었거든.”
기껏 세스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말했건만. 정작 내 말을 들은 세스나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야멸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더니 부모의 원수 마냥 전골 건더기를 주워먹기 시작했다.
“…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에요. 제가 보답하고 싶어서. 안 돼요?”
“그렇다면 뭐… 안 될 건 없다만.”
“흥. 쳇.”
콰직. 포크질에서 분노와 야속함이 느껴졌다.
내가 또 지뢰를 밟았나 보군. 더 아가리 놀려봤자 긁어 부스럼 같으니, 그냥 입 닫고 술이나 빨아야겠다.
‘어디.’
나는 적랑이 연신 돌리는 술잔을 받아 마시다, 세스나가 만든 닭튀김 한 점을 집어먹었다.
우물우물.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속살을 한참 동안 씹었다. 그리고 꿀꺽, 삼켰다.
그렇게 한 점 먹은 세스나의 요리에 대한 감상은…
‘맛없진 않은데…….’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맛이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싼마이한 공산품의 맛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X발, 수제 요리에서 이렇게까지 냉동식품 맛이 나지.’
낯선 요리에서 군부대와 PX의 정경이 스쳐지나갔다. 우리 부대 냉동치킨계 본좌였던 슈넨치킨이 딱 이 맛이었다.
뭐지. 왜 공산품 맛이 날까. 요리사가 로봇이라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 그냥 그런 걸로 하자.’
대충 납득한 나는 계속 닭튀김을 집어먹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맛없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입이 저렴해서 이런 자극적인 맛을 좋아한다. 덕분에 손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맛있어요?”
세스나가 어느 순간 툭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따봉을 치켜들었다.
“어. 좋네. 최고야.”
“… 아흐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좋네요.”
세스나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내 칭찬 한 마디에 또 기분이 좋아졌군. 로봇이라 그런가. 아무튼 애가 단순해서 참 다행이다.
그 뒤로 몇 잔의 술과 안주가 이어졌다. 적랑은 잔이 빌 때마다 득달같이 술을 따라줬다.
“자자. 계속 들게. 어여 마시게나 다들.”
“후후. 늑대 오빠아, 오늘따라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야? 아잉 몰라.”
“음. 그래. 넌 몰라도 되니 술이나 처먹어라. 엘프리데.”
엘프리데의 말마따나, 적랑이 전에 없이 적극적이어서 좀 놀랐다. 나와 일행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라기엔 뭔가 좀 어색한 행색이 눈에 띄었다.
나는 안 그래도 쓰린 속으로 다시금 술을 밀어넣었다. 세스나가 만들어준 안주가 없었으면 진짜 토했을지도 모른다.
“정용니임. 진짜아, 왜 도망을 갔어요오. 우리가 그렇게 짐짝이에요?”
“그런 거에요오? 너무해요오. 저도, 저도 나름 노력했는데에…….”
“말 좀 해봐요. 당자앙!”
“남겨지는 우리 기분을 아셔야 된다구요! 정말!”
그리고 난 파티 내내 설백과 세스나에게 집중포화를 맞았다.
다들 잔뜩 취한 주제에 팩트로만 뚜드려 패다보니 변명할 할 말도 없다. 그냥 타는 속으로 술이나 오지게 빨았다.
‘… 로봇도 술에 취하나?’
그런 의문이 좀 들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묵비권을 고수하며 술을 마쳤다.
그렇게 술자리가 나의 희생으로 무르익던 어느 순간.
“음냐… 우응.”
“스으… 스으.”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숨소리만 가득했다.
엘프리데와 세스나, 설백과 샤키엘까지… 모두가 생각보다 금세 곯아떨어졌다. 유리아와 루시는 파티 시작과 거의 동시에 뻗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음냐아… 설백씨이… 붙잡아요오…….”
“도망… 친다아… 안 돼애…….”
세스나와 설백이 간간이 잠꼬대를 흘렸다. 누가 쫓기는지는 안 봐도 알겠다.
한이 진짜 단단히도 맺혔나 보군. 어떻게 피안의 악몽 속 두 사람이랑 반응이 이렇게 비슷하냐. 몸서리를 슬쩍 쳤다.
“자네와 독대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그래.”
“하하. 그러네요.”
그리고 지금.
나는 유일하게 아직까지 깨어 있는 적랑과, 단 둘이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의 1년 전인가? 내 저택에서 대화를 했었지. 벌써 그립군 그래.”
“그렇겠죠 뭐.”
오랜만에 직시한 적랑의 눈은 여전히 형형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자들의 눈. 알테어도 나이트레아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지.
그 눈빛을 마주하자 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 크흠. 적랑님.”
나는 본능적으로, 적랑이 뭔가 중요한 얘기를 꺼낼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 쪽에서 슬쩍 찔러봤다.
“서론은 그만하시고, 그냥 바로 본론으로 가시죠.”
내 당돌한 제안에 적랑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알겠네. 그게 자네였지.”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