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나이스 보트
“… 까마귀님. 자리를 주선해보도록 할까요?”
시기적절하게 들려온 샤키엘의 제안. 속마음을 훤히 꿰인 것 같아 뒤통수가 얼얼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어… 예?”
“기룡대의 편대장에게 보고를 마치면, 곧바로 크라네이드 장군과의 대담을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분명 오랜만의 만남이니, 하실 말씀도 많으시겠죠.”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는 샤키엘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의도가 뭐든 간에,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제안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눈치가 너무 빠른 사람은 정감이 안 가데요.”
“아하하. 주의할게요.”
“어쨌든 뭐, 해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죠.”
“네.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까마귀님.”
나는 괜히 한 번 뻗대다가 순순히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슬쩍 시선을 들어보니 샤키엘이 만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붉게 홍조 띈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아. 까마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소녀는 이 날을 위해서 태어난 거였군요…!”
샤키엘은 한 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서 격정에 찬 얼굴로 몸을 떨었다. 묘사하기도 민망한 온갖 오두방정의 향연이었다.
…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글거리는 샤키엘에게 이끌려 용병부대 지휘관 막사에 도착했다.
“자. 마침 전략회의가 끝났다고 하여 뫼셔왔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 어, 네. 고마워요.”
펄럭. 천막의 입구를 들어내고, 샤키엘을 방패삼아 안으로 슬쩍 들어갔다.
그러자 거대한 탁자와 전략배치도 앞에서 졸고 있는 거한이 한 눈에 들어왔다.
“크라네이드?”
거대한 등딱지를 멘 드래곤 머리통의 거한. 크라네이드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크라네이드는 방금 깬 비몽사몽한 눈으로 잠깐 나를 주시했다. 이내 드래곤을 닮은 그 머리통이 갸웃, 꺾였다.
“… 엉? 비실이?”
아무래도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 두 눈으로 보고도 내가 박정용이 맞는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거 이제 비실이라곤 부르지 마십쇼. 내가 크라네이드보다 강할 걸요?”
나는 도전적으로 웃으며 크라네이드를 똑바로 올려다 봤다.
그제야 크라네이드의 만면에 화색이 감돌았다. 길다란 주둥이가 활짝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시퍼렇게 드러났다.
“아니, 비실이! 여기는 어쩐 일이냐!! 나 보러 왔냐?!”
“예. 댁 좀 보려고 멀리서 찾아왔수다.”
“케케켈! 이 새끼, 한 마디도 안 지는 건 여전하군!”
그렇군. 나는 크라네이드의 얼굴을 보고서야, 황궁에서 느꼈던 의문 한 가지를 드디어 해소했다. 바로 여신의 거울에 대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황궁에 여신의 거울이 왜 설치됐겠는가. 용사가 황궁에 드나들 일이 생겼으니 설치됐겠지.
그리고 용사 중에 케나인의 황궁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인물은, 오성장군인 크라네이드 밖에 없다.
“아무튼 이렇게 보니 더럽게 반갑네요. 시간 좀 돼요? 같이 밥이나 먹죠.”
나는 짐짓 유쾌하게 크라네이드에게 말했다.
크라네이드는 용제국의 귀하신 몸이다. 이렇게 만날 기회가 언제 또 있을지 모르니, 웬만하면 이번에 밀린 해후를 전부 풀고 싶었다.
“암. 당연하잖냐 비실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마침 회의도 끝난 참이라, 내일 출격까지 시간이 남는다. 케켈.”
크라네이드도 유쾌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손이 과장 안 섞고 솥뚜껑만한 데다 힘도 장사다 보니, 칠 때마다 무릎이 주저앉을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막사 밖으로 손짓했다.
“일단 나가죠. 가면서 얘기나 좀 합시다.”
“어 그래. 그러자고. 비실이, 지금 어느 부대에 소속된 거냐? 용사니까 일단 용병부대일 텐데.”
나는 그 질문에 멈칫했다.
그렇군. 당연히 병영에서 찾아왔으니, 이스그라드 토벌군에 소속된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어… 글쎄요. 저 그냥 외인부대인데요.”
“외인부대…? 뭐냐 그건. 잘 곳은 있냐? 숙소가 없으면 내가 힘 좀 써주랴?”
“아뇨. 그건 아마 지인이 알아서 해줄 거라 상관없습니다.”
“지인이라니. 좋은 인맥이라도 있나 보구만? 케케켈.”
크라네이드는 특유의 웃는 소리를 내며 내 뒤를 성큼성큼 쫓아왔다.
자, 그래. 어쩌다 보니 대화할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오게 됐는데. 사실 지금부터가 좀 문제다.
‘… 무슨 얘기부터, 꺼내면 좋나.’
알드콘의 부고. 그리고 스칼로의 근황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까.
아직 그걸 생각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가는 내내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 * *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하던가?
열심히 고심했지만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빠꾸없이 부딪쳤다.
가감없이 사실 그대로, 크라네이드에게 스칼로와 알드콘의 근황을 전한 것이다.
“… 켈켈. 그러냐? 그 빨간 난쟁이 놈이 죽었다고.”
간부용 식당 대용으로 설치된 널찍한 천막 안.
크라네이드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다만 백자에 담긴 술을 연신 나발로 불었다.
나는 크라네이드의 혼잣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칼로랑 제가 직접 봤으니… 확실합니다.”
“켈켈켈. 뭐, 그래. 그렇게 입이 험한 놈들은 원래 제 명에 못 살아.”
“…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가 아니고. 그렇다니깐. 나도 원래 살던 세상에서 그랬다. 켈켈켈!”
한바탕 시니컬하게 웃은 크라네이드가 안주용 다과들을 한 움큼 집었다. 그리고 으적으적 씹어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것보단 술이 고파서 밀어 넣는 행색이었다. 겉으로는 호탕하게 말해도, 그의 나름대로 꽤 슬퍼하고 있다는 소리다.
“한 잔 해라. 보고 있지만 말고.”
크라네이드가 내게 술이 담긴 백자를 내밀었다. 나는 볼 것도 없이 나발 째로 쭉 들이켰다.
생각보다 도수가 센지 목구멍이 확 뜨거워졌다. X발. 기침이 나오려는 걸 가오 상할까봐 간신히 참았다.
“… 켈켈.”
크라네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특유의 무시무시한 이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안주용 다과의 무더기가 재차 그 안으로 희생되었다.
“그래. 개구리 양반은 그래서 어쩐다냐? 운터란트에 복수라도 한다냐?”
“글쎄요. 거기까진 안 들었어요.”
“그 중요한 부분을 왜 안 듣냐. 안 한다 그러면 부추겨서라도 시켜야지 인마. 켈켈.”
“스칼로의 몫이니까요. 무슨 선택을 하든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죠.”
크라네이드가 입에 우겨넣었던 다과를 꿀떡, 목구멍으로 밀어 넘겼다.
그리고 새파란 도마뱀의 눈으로 나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너 이 새끼, 생각보다 멋진 새끼구나.”
“이제 아셨수? 저 존나 멋진 사람입니다.”
“켈켈켈.”
크라네이드가 다시금 다과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다과는 어느새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는 허공을 휘적인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퍼뜩 중얼거렸다.
“그래. 그놈은 알아서 잘 할 거다.”
“그래야죠.”
“개구리 양반은 시험의 장막 때부터 현명했지. 우리 네 명 중 가장 현명했다고.”
“… 예. 그랬죠.”
챙. 크라네이드가 내민 술병에 내 술병을 가볍게 부딪쳤다.
이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묵묵히 술병을 쭉 기울였다. 워낙 술이 독해서 나는 중간에 한 번 끊었지만, 크라네이드는 그대로 원샷해 버렸다.
“크아아. 쓰구만.”
크라네이드는 텅 빈 술병을 거칠게 상 위로 던졌다.
탱그랑, 청명한 소리와 함께 크라네이드는 벌떡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길조를 물고 온 제비인 줄 알았더니. 시체 소식 물고 온 까마귀였군 그래. 켈켈켈.”
“…!”
아마 개같은 상황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던진 비유였겠지만. 나는 ‘까마귀’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뭔 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만. 전처럼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비실이.”
그리고 깨달았다. 등딱지를 이고 있는 크라네이드의 뒷모습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크라네이드는 텐트를 나가기 직전. 자기 어깨를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이깟 쓸데도 없는 감투 따위. 버려서라도 도와주러 가마.”
어깨에는 금실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견장이 달려 있다. 아마 오성장군의 표식일 테다.
펄럭. 입구를 열어젖힌 크라네이드가 쥐어 짜내듯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니까 너까지 죽지 마라. 절대로.”
스르륵. 그의 거대한 신형이 천막 너머로 사라졌다.
정적이 감싸인 막사 안엔 어지럽게 늘어진 술상과, 나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가득했다.
“… 고맙수다. 크라네이드.”
나는 뒤늦게 감사를 중얼거리고 남은 술을 자작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맙다는 말 전한다는 초기 목적은 대실패했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자조적으로 웃었다.
* * *
나는 알딸딸한 상태로, 샤키엘이 마련해준 내 침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참고로 주량에 비해 꽤 과음했지만,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혀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까마귀님. 괜찮으신가요? 너무 취하신 것 같습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얼른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까부터 샤키엘이 옆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지금 내 상태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한 뒤 정중히 말해줬다.
“어허. 무슨 말이야. 난 취하지 않았수다.”
“후우. 취한 사람이 꼭 그런 말을 하죠.”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러네.”
그럼. 안 취했고말고.
다만 기분이 최고로 HIGH할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샤키엘이 네 명이었지? 나머지 세 명은 또 다른 자매들? 아니면 악몽의 파편이 변신한 건가?
‘에이. 아무려면 어때.’
그래. 미녀가 네 명이니 기분도 네 배로 더 좋네. 내가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봐준다. 악몽의 파편들아.
나는 비틀거리며 언덕을 달려갔고, 동시에 손을 뻗었다.
“자 이리 오너라아아! 이몸이 오셨느니라! 하하하!”
펄럭! 샤키엘이 나를 위해 준비해줬다는 간부용 막사 입구를 열어젖혔다.
천장의 랜턴으로 밝게 비친 텐트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일행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루시와 유리아. 설백과 세스나. 그리고 엘프리데와 적랑까지.
거의 내 이세계 지인들의 총출동 수준이다.
“그래 깍두기 원투! 나 없는 동안 집은 자알 지키고 있었…….”
나는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들떠서 마구 떠들어댔고.
뭔가 잘못됐음을 뒤늦게 감지했다.
“… 하힣?”
다시 한 번 모여 있는 인물들을 주욱 훑어봤다.
널찍한 간부용 막사. 중앙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무려 여섯이나 되는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게다가 하나 같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술기운이 일거에 싹 가셨다.
“샤키엘.”
나는 부축해주던 샤키엘을 불렀다.
그녀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받아줬다.
“네. 까마귀님. 말씀하세요.”
“혹시 이거 꿈인가요?”
“아뇨. 틀림없는 현실입니다.”
“근데 왜 보이면 안 될 것들이 보이죠?”
“어… 그것이 까마귀님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타이밍 좋게, ‘받아들여야 할 현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유독 압박감 가득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두 여인이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청발청안, 그리고 흑발흑안의 여인 둘이서 나를 양쪽에서 지그시 압박해왔다.
“… 그, 오랜만이네. 설백. 세스나.”
설백과 세스나는 내 인사에 가만히 미소를 띄웠다.
둘 다 웃고는 있는데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러게요. 저엉말 오랜만이네요. 정용님.”
이내 세스나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심장이 갈비뼈 뚫고 튀어나가는 줄 알았다.
세스나는 가만히 내 손등을 들어올렸고. 이내 손끝으로 음미하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정용님. 제가 있잖아요. 설백 씨랑 많은 이야기와 토론을 나눈 끝에, 극적으로 타결된 협상안이 있어요. 궁금하시죠. 들어보실래요?”
“… 어, 응?”
“정용님을 반으로 갈라서 한쪽은 제가 갖고요. 한쪽은 설백 씨가 갖는 거예요. 그리고 완성체가 필요하면 그 때만 붙여서 서로 빌려주는 식으로 하려고요. 괜찮죠. 네?”
“…….”
“괜찮은 걸로 할게요. 어차피 정용님한테 발언권은 없어요.”
드르륵! 세스나는 깔끔하게 통보 후 양손에서 전기톱을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 맛이 간듯한 푸른 시선을 일렁이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리랑 주둥이는 잘라서 별도로 특별보관할 거예요 정용님. 다시는 그 때처럼… 거짓말 쳐놓고 도망칠 수 없게 말이죠.”
사사삭. 문득 등 뒤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설백이었다. 그녀가 어느새 막사 입구로 다가가 출입문의 단추를 하나씩 끼우고 있었다.
“역시 적랑님 말은 거짓말이었네요 세스나 씨. 막사 안에… 아무도 없었어요.”
설백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방글거리는 표정을 보니, 방금 들은 세스나의 말이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졌.다.’
멋들어진 크루즈선이 강물 위로 유유히 떠가는 영상이 뇌리에 흘렀다. 의미는 딱히 없고, 그냥 주마등 같다.
… 보트 멋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