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용제 접견
“커헉! 후우…….”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방을 빠르게 스캔했다. 이면세계로 들어가기 직전과 완전히 똑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진설이 거울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풍경까지 똑같다.
‘아니. 얘는 왜 아직도 있냐?’
가슴이 철렁했다. 자세가 너무 똑같아서 시공회귀 일어난 줄 알았잖아.
내가 뻘쭘하게 서서 진설을 쳐다보자, 그녀도 흘깃 나를 보더니 고개를 한껏 조아렸다.
“용사님. 바리 황녀님께서 전언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용건이 생겨서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그리고 진중하게 고친 눈빛으로 진설을 가만히 쳐다봤다.
진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황궁의 북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용무가 끝나면 일행을 데리고 최대한 빨리 찾아와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최대한 빨리요.”
진설은 ‘최대한 빨리’를 거듭 강조했다.
아마 바리 황녀… 샤키엘이 그러라고 시킨 듯하다.
뭔가 용제와의 대화가 잘 안 풀렸나? 상황이 급박해졌나 보군.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객실로 다시 안내 해주십쇼. 일행을 데리고 바로 궁을 나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일행을 데리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설을 재촉해 달리다시피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타타타탁, 분주한 두 개의 발소리가 길고 끝없는 복도로 울려 퍼졌다.
* * *
“아, 까마귀님…!”
서둘러 황궁 북문으로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삿갓을 쓴 샤키엘이야 그렇다 치고. 붉은 아룡들의 등에 타고 있는 은발 청안의 인물들… 우리를 태워줬던 용치기 일족들이 함께 있었다.
“이야. 다들 황궁까진 웬일…….”
나는 의아한 한 편,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곧장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직후에 들어올린 손을 퍼뜩 내렸다.
샤키엘의 앞에 처음 보는 용인 남성이 하나 서 있다.
‘… 저 놈은, 뭐지?’
나는 한눈에 그놈이 보통 용인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기본적으로 키가 2미터에 달하는 보통 용인보다도 기골이 훨씬 장대하다. 그리고 드래곤을 닮은 특유의 얼굴엔 백발수염이 성성해 연륜이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X발. 저렇게 고급진 옷은 처음 본다.’
주변에 시녀들을 왕창 대동한 데다, 금실로 짜인 휘황찬란한 비단옷를 입고 있다. 귀한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볼 수가 없다.
용인 남자도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샤키엘에게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렸다.
“흐음. 바로 자네로군. 내 딸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드래곤 슬레이어.”
“예?”
“실제로 보니 딸의 허풍만한 기백이 느껴지진 않는구먼. 속 빈 강정이 딱 이 짝일까.”
“뉘신데 초면에 저를 평가하고 지랄이슈?”
용인남자는 별안간 해괴한 소리를 지껄였다. 불쾌한 품평도 함께 말이다.
상대가 귀인인 건 귀인인 거고. 싸가지 없는 건 없는 거다. 나는 처음 보는 아신한테도 펀치를 날렸던 사람이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바리 공주님. 이 싸가지 없는 틀딱은 뭐냐?”
내가 샤키엘에게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고. 샤키엘은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이내 그녀가 설명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앞을 용인 남자가 막아서더니.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정체를 밝혔다.
“짐을 모르느냐. 이 나라의 영원한 패왕. 용제 디스칼트다.”
이건 좀 많이 놀랍다.
나는 용인 남자에게서 퍼뜩 물러섰다.
“… 요, 용제?!”
“출궁한 딸을 암부들에게서 지켜줬다 들었다. 노고를 치하하고, 아비로서 감사할 따름이다.”
“어… 아, 아니. 아닙니다.”
물론 상상도 못할 정체… 까지는 아니었다.
샤키엘이 일단 껍데기는 황녀인데다, 놈의 복장을 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다.
나는 멀뚱하게 용인남자… 용제 디스칼트를 쳐다봤고. 그는 별안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용제의 어전이다. 어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느냐?”
“… 제가요?”
“그렇다.”
“왜요?”
“…?”
“…?”
나는 인터넷 어디에 돌아다니는 공익요원 썰마냥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근데 그렇잖아.
‘지가 용제국 황제면 황제지 내 주인님이냐?’
난 애초에 용제국 사람도 아니고. 인간이 마족보다 눈에 띄게 천대받는 정조역전국가에 오래 있을 마음도 없다. 그러니 굳이 저놈에게 예의 차릴 필요도 없다.
내가 오히려 때려보라는 양 고개를 빳빳이 들자, 용제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흐하핫. 기백이 없다는 말은 취소하노라. 재미있는 친구구나, 딸아.”
“화, 황공하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바마마.”
“됐다 됐어.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신선해서 좋구나. 근 100년만이다.”
옆에서 샤키엘이 어쩔 줄 몰라하며 대신 사과했다.
이건 좀 예상 밖이군. 괜히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질색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자존심 굽히고 고개나 한 번 숙여줄 걸 그랬다.
내가 입맛을 다시며 눈치를 살살 보고 있자니.
“자네.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겠는가?”
문득 용제가 파충류 특유의 세로 동공을 빛내며 물어왔다. 나를 시험하는 듯한 눈빛과 말투였다.
나는 그 눈빛을 가만히 감내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해봐야 알죠. 안 해보고 왈가왈부해서야 되겠습니까.”
“호오.”
“해보지도 않고 이렇다 저렇다, 호언장담부터 하는 새끼들은 아가리를 전부 봉합해야 돼요. 제가 가서 잡아본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샤키엘이 옆에서 ‘제발 좀 닥쳐주세요 까마귀님’하는 시선을 열렬히 보냈지만. 무시했다. 나는 내 아버지한테 당장 뒤져도 할 말은 하고 살도록 교육받았다.
용제가 내 대답을 음미하듯 긴 침음을 흘렸고. 이내 눈을 번쩍 뜨며 호탕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핫! 실로 옳은 말이로다. 황궁의 대신들이 자네를 좀 본받으면 좋으련만.”
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잔뜩 드러내며 한동안 웃었다. 그리고 이내 내 어깨에 솥뚜껑 만한 손을 번쩍 가져다 댔다.
“이름을 내게 이르거라. 예비 드래곤 슬레이어.”
“… 박, 정용인데요.”
“깨끗한 용(淸龍)이라. 실로 좋은 이름이다. 용은 언제나 옳은 법이니라.”
“그, 그러십니까.”
… 한자와 비슷한 체계의 용각문자를 쓰는 나라라 그런가.
아무래도 내 이름이 한자 뜻풀이까지 그대로 번역된 모양이다. 용덕후인 디스칼트는 용이 들어간 내 이름이 마음에 드나보다.
용제가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한 번 불어넣더니, 그대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대를 위시한 승전보를 기대하겠노라. 그래준다면, 내 그대의 이름을 만손까지 용제국의 귀인으로 전할 것이니.”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용제는 시녀를 대동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남기고 가는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용제의 말을 되씹었다.
‘승전보라. 꼴에. 황제랍시고 괜히 거창한 말 쓰긴…….’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한동안 용제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 * *
용제가 떠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남은 인원들을 살폈다.
‘이제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왜 모였냐는 건데.’
아룡들 앞에 용치기 일족이 뻘줌하게 고개를 조아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용제 소동으로 샤키엘이 용제 딸내미라는 걸 눈치 챘나 보군. 나는 가장 앞에서 포복한 링크를 억지로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링크 씨. 여기엔 왜 있습니까?”
“아… 으, 하핫. 그, 그게.”
링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굉장히 반가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딱 봐도 자기 같은 쌍놈 냄새가 풍기니 안심하는 것이다.
링크는 샤키엘 쪽으로 눈을 흘겼다. 그리고 곤란한 어조로 하소연 하듯 말했다.
“수도에 도착한 김에 식료품을 보급하고 있던 와중에요. 거기… 그, 화, 황녀님께 붙들려 버려서요. 급하게 다시 수송의뢰를 하고 싶다기에… 화, 황공하게도. 예.”
“그, 목적이 뭔데요?”
“아니 글쎄. 태고룡의 무덤까지 간다지 뭡니까. 거긴 지금 좀, 많이 위험한 곳인데…….”
“태고룡…….”
링크는 의미도 없이 머리를 자꾸 긁적였다.
수도 행을 수락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번은 좀 진지하게 곤란해 하는 행색이었다.
나는 퍼뜩 샤키엘을 쳐다봤다.
“… 태고룡의 무덤까지, 굳이 지금 아룡을 타고 간다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거기는 문제의 이스그라드 유해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샤키엘은 내 의문 섞인 시선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내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내 나는 익숙한 아룡, 구디 앞까지 끌려왔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없이 아룡의 등에 나를 태워버렸다.
“한시가 급하니 설명은 일단 가서 하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어, 응?”
“반룡인 용기수님. 까마귀님을 잘 부탁드려요.”
어리둥절한 나를 내버려둔 채, 샤키엘은 꾸벅 인사했다.
그 앞에는 구디에 미리 타고 있던 프리시스가 있었다.
“걱정 마. 나. 운전 잘 해.”
프리시스는 특유의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조는 희박하지만, 반가운 기색은 완전히 숨길 수 없었다.
저건 나를 향한 반가움인가? 후우, 주체할 수 없는 이몸의 인기란.
“그새에 또 만났구나. 이번에도 안전운전 부탁한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유리아까지 내 앞에 태운 다음 프리시스를 쳐다봤다. 그녀도 이륙하기 직전 나를 흘깃 쳐다봤다.
프리시스는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입매를 말아 올렸다.
“오늘. 악몽 안 꿨어. 고마워.”
실없는 소리였다.
나도 슬며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러냐. 잘됐… 케흛.”
푸화악! 내 말을 잘라먹고 아룡 구디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전보다 훨씬 격하게 몸이 덜컹거렸다. 까딱하면 혀를 깨물 뻔했다.
“목표는 태고룡의 무덤!! 편대비행 안 해도 되니까, 각자 전속력으로 이동해! 한 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것이 의뢰주의 지령이다!”
먼저 높이 날아오른 링크가 마력 확성기로 그렇게 외쳤다. 그 말에 따라 아룡들이 하나씩 하늘에 붉은 궤적을 남기며 시야 끝으로 사라져갔다.
쇄애액! 우리는 그렇게 케나인의 하늘을 치솟아 북쪽으로 날아갔다.
‘아니,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가히 수도로 날아오던 속도의 두 배는 빠른 듯했다. 나는 아룡들의 엄청난 기세에 식겁해서 숨을 삼켰다.
이내 흑익으로 유리아의 안면부를 가려줬다. 역풍 때문에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던 유리아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뭐냐 대체. 이렇게 급하게 가야할 일이라니…….’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의 진로 앞을 빤히 쳐다봤다.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자리 잡은 진회색 평원의 한복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고원.
완만하게 솟은 거대한 언덕이 멀리서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