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사신의 침묵
다행히 샤키엘의 계략에 속은 것은 아니었다. 곧 용제국 시녀복 차림의 여자들이 우르르 다가와 우리를 인솔해갔다.
듣자하니 그들은 바리공주 직속의 시녀들이라고 했다.
“황녀님의 손님분들. 오래 기다리셨죠. 저희를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루시, 유리아는 미궁처럼 넓고 복잡한 황궁의 복도를 그녀들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객실이었다.
“... 내, 내가 나중에 마왕성을 짓는다면, 꼭 이곳의 설계자를 부를 것이니라.”
루시가 보자마자 넋이 나가서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고급진 방이다.
꿀이 흐르는 듯한 비단으로 장식된 침대. 온통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널찍한 방. 한쪽 벽에는 거대한 병풍에 그려진 산수화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는 바리 황녀님의 직속 시녀장, 용혈 계곡의 진설이라고 합니다. 바리 황녀님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편히 쉬어주시기 바랍니다.”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이 앞으로 나와 그렇게 말했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비녀로 고정해 올린 여자 용인이었다.
진설은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혹여 요청사항이 있으시다면 주저 없이 제게 말씀해주세요. 문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
나는 남의 호의를 절대 거절 안 하는 사람이다. 곧장 시녀장 진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는 퇴실하다 말고 퍼뜩 멈춰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예. 왜 그러시죠?”
“혹시 샤키... 아니, 바리 황녀님의 용제 접견은 얼마나 걸리는지 아십니까.”
“... 그, 그것까진 저희가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사안이 중해 보였으니, 수 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흐음.”
애매하군. 그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엔 너무 시간을 버리는데. 근손실 난다.
나는 결국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저 요청사항 있습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 주변에 여신의 신전 있습니까.”
“... 신전이요?”
진설은 좀 당황한 표정이었다.
용족 중심의 나라인 용제국의 황궁까지 와서, 용사들의 신전 찾는 게 어지간히도 이상했던 보양이다.
그래. 내가 봐도 미친 새낀가 싶을 거 같긴 해. 하지만 나도 시급히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에 사신 자매들 얼굴이나 볼 겸. 수호 형님에 대해서 좀 물어봐야겠어.’
요즘 들어 수호 형님이 불러도 자꾸 부재중이다.
옛날에 쉴 새 없이 나불댈 때는 좀 닥쳐줬으면 했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닥치니 요즘은 적적하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마성의 남자 한수호 같으니. 이제 당신과의 티키타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돼 버렸어.
‘걔네들은... 뭐라도 알고 있겠지.’
수호 형님과 동년배인 알테어조차 베스타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 수호 형님의 상태에 대해 알만한 존재는 아신들 밖에 없다.
하지만 똥털은 제 꼴릴 때만 번쩍번쩍 찾아오는 홍길동 같은 년이고. 결국 내 유일한 아신 인맥인 사신 자매를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가만히 베스타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진설이 더듬더듬 말했다.
“시, 신전은 케나인 시가지까지 나가셔야 있습니다만. 황궁 내에 여신의 차원 거울이 얼마 전부터 설치되었습니다. 거기로 데려다 드릴까요?”
“오오? 네.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황궁 내에 차원 거울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용인들 밖에 없을 황궁에 여신의 거울이 왜 배치되어 있는 거지?
‘뭐 이유야 어쨌든. 나는 잘 됐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침대에서 뒹굴던 루시와 유리아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 다 피곤이 많이 쌓였던 모양이다.
“음냐아....”
“우웅....”
세상 곤히 자는군. 저걸 깨우는 건 아무리 나라도 양심이 좀 찔린다. 나는 결국 밀린 피로를 푸는 두 여자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안내 좀 부탁합니다.”
“아 네. 따라오세요.”
그렇게 나는 진설을 따라 방향감각이 이상해지는 황궁 복도를 하염없이 걸었고. 차원 거울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거울을 슬쩍 훑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찐이다. 케른에서 봤던 그거랑 똑같아.’
혹시나 유사품이 아닌가 싶었지만, 내가 아는 그 모습이라 안심했다.
“좋아.”
나는 늘어진 거울 중, 무럭무럭 검은 기운을 뿜는 거울을 향해 다가갔고. 이내 단숨에 손을 집어넣었다.
‘바로 가볼까.’
우우웅. 특유의 공명음이 울리더니, 거울은 시커멓고 음울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뻗은 손끝부터 시작된 이물감이 전신을 감싸고, 거울은 내 신형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시이이고오옹조오오아아아!!”
나는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 대고 비명처럼 외쳤다.
순간이동 게이트의 끔찍한 이물감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나는 사방이 시커먼 이면세계에 도착해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트리플 헤드 미소녀에게 다채로운 욕을 얻어먹었다.
“거짓말쟁이.”
“구라쟁이.”
“제발 죽었음 좋겠다.”
똑같이 생긴 세 얼굴이, 똑같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한 마디씩 내게 꽂았다. 화려한 업계포상이 나를 감싼다.
그래서 그녀들이 누구인고 하면. 이 이면세계의 주인인 사신 세 자매. 운터드레드와 타나트닉스, 그리고 케이어시스다.
“계약자. 거짓말 했어.”
“바로 다시 와서 놀아준다면서.”
“1년이 바로야?”
“빨리 죽었음 좋겠다.”
“아니면 내가 죽여줄 수도 있는데.”
“그게 좋을 거 같다.”
사신 자매의 서릿발 풀풀 날리는 눈빛세례가 심히 따가웠다.
스르릉. 그녀들의 위로 떠 있는 거대한 낫이 당장이라도 내 목을 자를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이건 진짜 위험하군. 나는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나, 나도 나름 바빴어 인마. 이거 보이냐?”
나는 등에 메고 있는 멸망의 대검을 들이밀었다.
“그.”
“것.”
“은?!”
사신 자매들이 드라군 놀이를 시전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반쯤 감겨 있던 눈들이 동시에 번쩍 뜨였다.
“와아. 멸망의 대검!”
“아스타르트를 죽였구나.”
“피안의 악몽도 있네. 자드키엘도 끝났나봐!”
흥미 어린 얼굴로 멸망의 대검을 살펴보던 사신자매들이, 곧 내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셋이서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뭐, 뭐야. 왜 이래.’
눈깔 안쪽을 후벼 파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 쏟아지길 잠시.
이내 사신 자매들은 감탄 어린 목소리를 앞다투어 꺼냈다.
“그 사이 의식을 두 개나?”
“열심히 했네 계약자.”
“으응. 이건 칭찬을 해줘야겠는걸.”
“죽었으면 좋겠다는 건 취소!”
“나도 취소!”
“음, 나는 안 취소!”
... 케이어시스가 좀 뒤끝을 보였던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불같이 화내던 것은 멈췄다.
그녀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제들끼리 중얼거리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아까와 같은 인물이 맞다 싶을 정도의 감정 기복이었다.
“잘했어 계약자.”
“특별히 우리를 팽개쳐둔 건 용서해줄게.”“뭐 원하는 거 있으면 들어줄게. 말해봐.”
그렇게 말하는 사신 자매들이었다.
재차 말하지만 나는 남의 호의를 절대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평소처럼 손을 번쩍 들고 바로 요구사항을 말했다.
들어 올린 손에는 칠흑의 양날검, 베스타크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 이 칼의 정체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
“아.”
“오.”
“와.”
세 자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을 쳐다봤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들이 히죽,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내 내 얼굴 주위를 팔랑팔랑 맴돌았다.
“만났구나? 마녀의 기사.”
“어땠어. 마음은 잘 맞아?”
“왠지 계약자랑은 잘 맞을 거 같은데.”
... 마음이야 뭐, 생각보다 너무 잘 맞아서 놀랄 정도였다.
나는 말없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신 자매들도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입 꼬리를 배실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계약자는 그 사람과 흉마의 냄새가 엄청 비슷하거든.”
“그래서 마녀가 널 선택한 걸지도 모르겠네. 후후.”
... 흉마의 냄새라.
뭐,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엘프리데가 느꼈다던 ‘그거’ 말하는 거다. 음침한 여자들 한정으로 나를 핵인싸로 만들어주는 페로몬이라 해야 하나.
나는 베스타크를 쓰다듬는 사신 자매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수호 형님... 마녀의 기사가 불러도 통 대답이 없어. 왜 이러는지 알아?”
그러자 사신 자매들이 행동을 우뚝 멈췄다. 세 명이 동시였다.
아주 찰나였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들의 시선이 어지럽게 허공에서 교차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내 잠깐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실없는 미소가 표면에 떠올랐다.
“대답이... 없어?”
“절교 당했어?”
“손절 당했네.”
... 이 X발. 비겁하게 팩트를 들이밀다니.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이 새끼들아.
나는 사신들의 반응에 쌍심지를 세웠고. 그녀들은 아랑곳 않고 극딜을 계속 먹였다.
“뭘 잘못했어 계약자.”
“평소 행실을 생각해 보는 건?”
“사교성이 없구나 계약자? 그렇게 생기긴 했어.”
이 새끼들이? 전후사정은 모르겠고 일단 내가 잘못했다 그거냐?
아니. 이게 아니지. 얼버무리려 해도 소용없다. 내가 물어봤던 순간, 그녀들 사이로 지나갔던 미묘한 분위기를 난 분명 캐치했다.
“너희들. 분명 뭘 알고 있잖아. 뭔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줘?”
“....”
“....”
“....”
하지만 사신 자매들은 여전히 곤란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 뿐이다. 나는 한동안 그녀들을 진지하게 노려봤다.
얼마나 대치가 이어졌을까. 이내 나는 한숨과 함께 체념했다.
“... 그래. 알았다. 더는 묻지 않을게.”
지금까진 묻지 않아도 신나서 먼저 말을 걸어오던 사신들이 저러고 있다.
분명 그녀들도 뭔가 사정이 있어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미안해 계약자.”
“하지만... 그 사람이랑 약속했어.”
“절대. 아무에게도. 설령 계약자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아신들은 약속을 무조건 지켜.”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응.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
아니나 다를까. 사신 자매들이 머뭇거리며 그렇게 변명했다.
나는 침음을 흘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약속이라.’
수호 형님과 약속해서 함구하고 있다는 건. 수호 형님도, 이런 상황이 될 걸 미리 예상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는 건 형님의 지금 이 침묵은... 본인이 의도한 것이란 말인가? 이 새끼 사실 전부 들리면서 읽씹하고 있었던 거? 나 진짜 까톡 차단당한 거냐?
“뭐, 일단 알겠다.”
나는 코웃음을 슬쩍 쳤다.
그리고 팔을 활짝 벌려 그녀들에게 가슴을 들이밀었다.
“다음에 또 시간 나면 보자고.”
이 세상에서 나가려면 사신 자매들의 거대한 낫으로 잘려야만 한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니 빨리 죽여 달라는 제스쳐였다.
스르릉. 사신 자매들은 곧잘 이해하고는, 허공의 낫을 번쩍 들어 나를 겨냥했다.
“... 미안해 계약자. 사실, 우리도 자세한 것까진 잘 몰라.”
“우리도 그 사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야. 목적은 우리도 알고 싶어.”
“그러니 계약자. 의식을 마치고, 멸망의 성흔에 가. 마녀를 만나면... 싫어도 모두 알게 될 거야.”
서걱. 사신 자매들은 각자 몇 마디씩 남기더니 나를 내리쳤다.
막간에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결국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알아봐라’라는 말을 길게 늘인 것과 다름없었다.
“... 큭.”
반으로 토막나 흩어지던 나는 피식 웃었다.
무책임한 사신 자매들을 딱히 책망하지는 않았다.
번득이는 낫의 칼날 위로 그녀들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