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용제와 용의 딸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된 아룡의 비행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이어졌다.
쉴 새 없는 강행군 끝에, 우리는 용제국의 수도 케나인의 외곽 성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연신 싱글거리는 링크와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선생님!”
“네. 저도 좋았습니다.”
물론 뜨거운 악수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뒤에 이어질 확실한 정산이 중요하지.
철그럭. 링크의 손에 묵직한 돈 주머니를 얹어줬다. 그 광경에 링크는 물론이고 뒤에서 쳐다보던 용치기 일족들도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첨언했다.
“기대 이상으로 빠르고 승차감도 좋아서, 약속보다 좀 더 넣었습니다. 금화 천 냥입니다.”
“아, 아니 선생님... 처, 천 냥씩이나...!!”
링크가 돈주머니를 신주단지 마냥 받아들었다.
원래 계약금은 700냥이었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액수였는데 거의 1.5배를 챙겨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또 나중에 이용해주십쇼!”
우리가 케나인 성문 안으로 진입하자, 용치기 일족 전체가 일렬로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슬쩍 보다가 어느 순간 눈을 덜컥 멈췄다. 프리시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손을 슬며시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기분은 좋네.’
프리시스의 무표정한 눈매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쉬워해준다는 것 자체가 좀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그들의 배웅을 등 뒤로 받으며 케나인에 무사히 입성했다. 나는 이국적인 거리의 풍경에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가 용제국이구나. 안에서 보니 진짜 이국적이긴 하네.”
기와가 수 겹으로 높게 올라간 거대한 황궁이 멀리서 우뚝 서있다.
수도 전체를 반으로 가르는 널찍한 대로. 그 양쪽에 민가와 상가, 그리고 귀족의 사택으로 보이는 정원 딸린 넓은 기와집이 줄지어 있다.
‘시가지’라는 말보다도 ‘저잣거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동양적인 냄새가 풀풀 났다.
‘마르크트레스도 여기에 비하면 정통판타지군.’
복식 또한 확실히 마르크트레스와 달랐다.
여자들은 대부분 개량 한복과 비슷한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고, 남자들은 저고리나 두루마기와 비슷한 치렁거리는 차림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다 용병부대다.’
물론 내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체 일부가 드래곤의 형상을 띈 용인들. 즉 용제국 귀족들의 얘기다.
그 외 용제국 대다수의 인구를 담당하는 용사들은 사실상 개성만점의 외관에 천차만별의 갑옷 차림이다. 이건 사실 만국 공통이라 딱히 의미가 없었다.
“여기 점소이! 국밥 언제 나와!”
“지금 나갑니다요!”
“막걸리도 아직이다!”
“예예! 잠시만요!”
석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주막에서, 손님들이 연신 ‘점소이’를 부르고 있다. 금발 코쟁이들이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을 말아먹고 있다.
판타지 색채가 30분 씹은 껌의 단물처럼 쭉 빠진 모습에 탄식하고 있자니. 별안간 옆에서 루시도 같이 탄식했다.
“흐음. 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케나인 시가지를 둘러본 루시의 한줄평이었다.
다른 도시에 들렀을 때랑은 사뭇 다른 반응이다. 나는 곧장 루시에게 물었다.
“여전하다니. 전에도 와본 적이 있냐?”
“있다. 120년 전과 놀라울 정도로 바뀐 게 없어. 다른 인간들의 도시는 10년만 지나도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거늘. 꼭 여기만 시간이 멈춘 것 같구나.”
“그, 그러냐.”
‘전에’의 썰이 100년 전까지 훌쩍 뛸 줄은 상상도 못했네. 좀 놀랐다.
나는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니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샤키엘이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도시에 변화가 없다는 건, 그만큼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다는 반증이랍니다. 케나인의 경우엔 마왕 출현에 의한 피해가 적은 것도 이유겠죠?”
아무래도 내가 루시와 나누던 대화를 주워들었나 본데. 루시랑 어떻게든 말을 더 섞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봐도 최악의 주제 선정이었다. ‘마왕에 의한 피해’ 소리가 나오자, 죄 많은 영혼 루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 그, 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 뭐. 거 참 미안하게 됐구나... 쳇.”
루시가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며 샤키엘을 노려보더니, 이내 할 말이 없는지 땅만 쳐다봤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 것이,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샤키엘은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변명하듯 몇 마디 주워섬겼다.
“그, 루스티카. 딱히 당신을 겨냥하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냥 용제국의 근위기사단인 코스크 기룡대가 고금을 막론하고 대단하다는 의미였어요.”
“... 흥. 퍽이나.”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당신이 날뛰었던 건 불가항력이었잖아요. 소녀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답니다. 우리는 같은 처지의 자매잖아요. 네?”
“됐다 됐어. 입 발린 위로는 듣고 싶지 않다!”
완전히 삐져서 대화를 거부하는 루시. 샤키엘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대신 내가 옆에서 탄성을 흘렸다. 문제의 ‘코스크 기룡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룡대라. 나도 직접 본 적 있었지.’
마르크트레스에서 얼떨결에 국빈회의에 참여했을 때. 크라네이드와 함께 있던 용제국의 두 용인 여성이 기억난다. 그녀들이 바로 코스크 기룡대의 용기사들이었다.
미텔란트의 칠마존. 마르크트레스의 카발리어. 그리고 운터란트의 레비아탄에 비견되는 이 나라의 비대칭 전력. 용제가 자랑하는 막강한 정예기사단이랬던가.
“후우. 그럼 가시죠 까마귀님.”
이내 샤키엘이 연신 총총걸음으로 내 앞을 앞서나갔다. 결국 루시의 화를 푸는 건 포기한 모양이다.
그녀의 발걸음과 시선이 향하는 곳은, 케나인을 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대로의 끝자락.
용제국의 황궁이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마지막을 향해서요.”
샤키엘은 특유의 붉은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며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황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우리가 입궁하려 했을 때, 당연히 용인들로 이루어진 문지기가 당연히 우리 앞을 막아섰다.
“정지. 패왕의 증명패를 보이시오.”
황궁은 기본적으로 용제 일가의 허락이 있어야만 입궐할 수 있다. 저 패왕의 증명패라는 게 그 통행증 같은 거다.
샤키엘은 아무 말도 없이 쓰고 있던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샤키엘... 정확히는 바리공주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병들이 눈을 터질 듯이 부릅떴다.
“추, 충! 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경례를 박았다. 혼비백산해서 허둥거리는 꼴이 시트콤 부럽지 않았다.
나는 대궐의 본관으로 샤키엘을 따라 걸어 들어갔고. 이내 물었다.
“쟤네는 왜 저렇게 오바싸바를 치고 지랄한답니까?”
“보통 황녀쯤 되면 호위병을 잔뜩 대동하고 다니니까, 설마 제가 황녀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게다가 소녀의 환궁이 예정된 날짜는 일주일 후랍니다.”
“아하.”
나는 그 설명에 대충 납득했다.
하지만 거기서 샤키엘은 잠시 허공을 망연히 쳐다봤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내 음험한 기운이 도사린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어쩌면 제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놀라웠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 그 말은?”
“만약 그렇다면. 궁에 돌아온 것 자체가 자충수가 될 수도 있겠어요. 저의 음해세력이 일개 경비병까지 장악했다는 소리니까요.”
샤키엘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녀는 똑바로 앞을 보며 걷다가, 이내 퍼뜩 내게 미소지었다.
“까마귀님. 저는 아바마마께 습격자에 관한 보고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 같이 가드릴까요?”
그렇게 물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리공주의 아버지는 이스그라드 토벌을 찬동하는 용제다. 그녀를 해하려 했던 적대세력의 정체가 용제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샤키엘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기만 하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외부인을 어전에 들였다간 제 쪽이 공연히 의심을 살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제 직속 시녀를 붙여드릴 테니, 객실에서 일행분들과 함께 쉬어 주시겠어요?”
“... 예. 그러죠.”
정중한 권유였지만 사실상 통보였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샤키엘은 넓은 복도를 홀로 가로질러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조심하십쇼. 괜히 본진에서 비명횡사하지 마시고.”
“... 어머.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예. 비꼬는 걸로 보였수?”
주저없이 대답하자 샤키엘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나를 향해 끔벅이던 두 눈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은은하게 붉은색으로 물든 얼굴에 굉장히 위태로운 웃음이 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까마귀님. 제가 목숨을 바칠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 그러십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샤키엘은 복도 끝자락을 향해 사라졌다.
좋아. 이제 몰래 뒤를 밟아서 무슨 대화 하는지나 지켜볼까... 하는 생각이 스친 순간. 샤키엘이 가다 말고 한 마디 더 얹었다.
“아. 행여나 어디 움직이실 생각 마시고, 거기에 가만히 서 계세요 까마귀님.”
“어, 네?!”
“황궁 전체엔 도깨비 환술이 걸려 있어서, 잘못 움직였다간 평생 궁 안을 헤매게 된답니다. 한 번 헤매면 저희도 못 찾으니까 꼭 주의하세요.”
“... 아, 예. 무, 물론이죠.”
제 멋대로 움직이려 했던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루시도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도 당연히 내 뒤를 따라올 생각이었나 보다.
유일하게 얌전히 있던 유리아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봤다.
“.......”
“.......”
“.......”
그렇게 샤키엘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휑한 복도 한복판에서 잠깐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루시가 정적을 깨부쉈다.
“... 용사. 우리 혹시 저년한테 속은 거 아니냐?”
“글쎄. 일단 자살할 준비는 하고 있는다.”
“... 그, 그러진 마라. 그런 짓 했다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뭐 어쩌라는 거야 미친년아.”
우리는 비렁뱅이 마냥 복도에 쭈그려 앉아 괜히 틱틱거렸다.
그렇게 오매불망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