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스무 마리의 붉은 아룡이 높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루루루루!”
“크우우우!”
아룡들이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펼쳤다. 평원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푸화악! 아룡들이 일제히 도움닫기를 하며 날갯짓을 시작했다. 광풍이 몰아닥쳐 뜯겨나간 수풀이 마구 흩날렸다.
“이륙한다!!”
링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아룡들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아룡에 타고 있던 우리 일행은 온몸을 짓누르는 부양감에 탄성을 참지 못했다.
“우와아악!”
“꺄아아악!”
특히 샤키엘에게 매미처럼 매달린 루시와, 내 등에 바싹 붙은 유리아가 무아지경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지면이 빠르게 멀어져간다. 그럴수록 비명소리의 데시벨도 급격하게 높아졌다.
“...?”
... 아니. 유리아는 놀랄 수도 있다 치고.
루시는 왜 저러냐. 쟤 등에 날개도 달려있지 않나. 저거 설마 그냥 장식이었나?
혼자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이 들었다.
“좋아! 순풍이다! 고도 상승해!”
링크가 탄 아룡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음파 증폭마법이 적용된 울림통을 통해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쪽까지 확실히 전해졌다.
“구우우우!”
“키오오오!”
허공을 잠깐 선회하던 아룡들이 일제히 고도를 쭉 높였고, 이내 편대 대형을 구성하며 속도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이륙할 때는 워낙 아룡이 다이나믹하게 움직여서 스릴이 있었지만. 막상 속도와 고도가 안정되자 쉽게 적응됐다.
‘흐음. 생각보다 버틸만 하네.’
나는 전부터 흑익을 사용한 곡예비행이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룡의 비행속도는 흑익과 비슷하거나, 살짝 느린 수준이었으니까.
“으아아! 햐아아아악!!”
반면 유리아는 내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비명만 질러댔다.
그녀의 허리에는 칭칭 감은 밧줄이 아룡 구디의 몸통과 이어져 있었다. 내 앞에서 아룡을 컨트롤하는 용기수, 프리시스가 안전책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물론 이건 루시에게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져 있다.
“박. 계집애 시끄러. 집중 안 돼.”
어느 순간, 내 앞에 탄 프리시스 쪽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뚝뚝 끊겨 들려온 그녀의 말을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뒤에 타고 있던 유리아를 번쩍 들어 내 앞으로 앉혔다.
“에흑?!”
나는 한 손으로 유리아를 놓치지 않도록 꽉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론 입 주위를 가렸다.
그녀가 퍼뜩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어차피 바람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 으. 으으으.”
유리아는 낮은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격렬하게 꼼지락거리던 몸도 어느새 조금씩 떨림이 잦아 들어갔다.
‘진압완료.’
이제 좀 조용해졌군.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러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무심결에 주변을 훑어봤다가 벅찬 탄성을 흘렸다.
“이야. 하하, X발!”
사방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거대한 산맥. 그리고 태양빛을 머금은 거대한 강줄기가 한 눈에 들어왔다.
까마득한 평야에 듬성듬성 자리한 마을과 도시가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탁 트이는 광경이었다.
“진짜 끝내주네.”
흑익으로는 이런 초고도에서 비행할 수 없다.
발동시간이 3분이 채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높이 올라갔다간 변신 풀리고 고공낙하해서 빈대떡 되기 딱 좋기 때문이다.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 나머지 공활한 하늘에 대고 외쳤다.
“하하하! 봐라! 인간들이 마치 개미떼 같구나!!”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는 정복감. 이것 때문에 돈 많은 새끼들이 하나 같이 높은 빌딩에서 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박. 너도 시끄러. 떨궈버릴 거야.”
그리고 프리시스가 듣다못해 한 마디 했다.
“쓰읍.”
나는 분부대로 닥치고 풍경만 감상했다.
* * *
우리는 그야말로 잘 때 빼고 모든 시간을 비행에 쏟았다. 식사까지 아룡 위에서 건량으로 때울 정도로 수도행을 서둘렀다.
덕분에 하루하루 쌓이는 피로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피곤할 정도니 다른 일행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용사아... 나, 나 죽을 거 같다. 제발 살려다오... 아니. 차라리 죽여라 죽여....”
“으아우....”
이틀째 한밤중이 되었을 때.
용치기들이 물색한 장소에서 야영 준비를 하던 와중이었다. 루시와 유리아가 시푸르뎅뎅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멀미와 피곤, 그리고 겨울밤의 엄청난 추위 때문에 둘 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일 낮까지만 참아. 일단 푹 쉬어라.”
“으으... 아,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다아.”
나는 두 사람을 모닥불 근처로 끌고 와서 불을 쬐게 했다.
두 사람은 따듯한 모닥불 근처에서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꾸벅꾸벅 졸다가 세상모르게 곯아 떨어졌다.
나는 지친 얼굴로 새근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뭐, 아직까진 괜찮다만. 확실히 힘들긴 하군.’
링크의 말로는 내일이면 수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수도에는 아직 ‘운터란트 최악 최흉 최저 테러리스트 박정용’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테니, 좋은 여관방 잡아서 푹 쉴 수 있다.
‘아니지. 무려 황녀님이 내 옆에 있는데?’
그래. 어쩌면 샤키엘 빽을 잘 이용해서, 황궁에 좋은 객실 하나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만 참도록 하자.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닥불을 멍하니 주시했다.
용치기 일족들조차 강행군에 지친 건지, 하나같이 아룡에 기대서 퍼질러 자는 중이다. 주변은 온통 적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이 조용하니 잡생각이 뇌리를 떠다녔다.
‘아마 수도에는... 적랑이 먼저 도착해 있을 거다.’
나는 배낭 구석탱이를 가만히 뒤졌다. 아직도 버리지 않은 운터란트의 기록단말기를 꺼내기 위해서다.
‘마지막 교신이 왔던 게 벌써 1개월 전... 1개월 전에 이미 운터란트 국경을 넘었을 확률이 높아.’
나와 나이트레아가 갈라선 것을 모르는 적랑은, 가끔 내 단말기로 근황을 보내왔다.
본인이 현재 인공신체 시술을 받고 있다는 것. 수술이 끝나 회복 중에 있다는 것. 바로 용제국 수도 케나인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기타 등등.
그것이 끝난 시점이 정확히 1개월 전이었다.
‘전투에 관한 조언들도 몇 개 가르쳐줬지.’
대표적으론 적랑의 기술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초인의 감각을 속이는 법.’
적랑은 내가 마녀사냥꾼이 되었기 때문인지, 교신을 통해서 흔쾌히 그 비법을 가르쳐줬다.
‘어떤 내용이었더라....’
나는 새삼 단말기를 열었다. 그리고 저장된 화상 통화 목록을 뒤졌다.
수개월 전. 적랑과 나눴던 통화가 단말기 패널 위로 재현되었다. 적랑과 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 그렇게 레벨이 상향평준화되면. 그 뒤부턴 기술 싸움이지.”
“기술이요?”
“싸움의 기술 말일세.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적랑이 입을 다물었고. 동시에 화상 너머에서 그의 기척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눈앞에 서있는 걸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감각이 포착하지 못한다.
감각과 이성의 괴리. 나는 분명 저걸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얄팍한 잔재주지만. 고수의 싸움에선 이것만큼 유용한 게 없지.”
적랑은 화면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다시금 적랑의 기척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전투 응용력이 뛰어난 자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고 싶은 것이기도 했네. 이름하여....”
“초인의 감각을 속이는 법?”
“.......”
이번엔 적랑이 눈을 부릅뜰 차례였다.
저 땐 나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저건 이미 사라진 전생에서 적랑한테 오체분시 당할 때 들었던 거였으니까. 나는 몰라야 정상이다.
“놀랍군. 이런 걸 마음이 통했다고 하는 건가?”
화면 속 적랑은 다행히 껄껄 웃으며 넘어갔다.
하긴 시공회귀의 비밀을 모르면,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그 정도지. 쓴웃음을 머금은 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온다.
“... 예 뭐. 그랬나 보네요.”
단말기 안에서는 대충 그런 대화가 오갔다.
그 뒤로는 기술의 요령에 대한 적랑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질 뿐이다. 나는 단말기를 끄고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결국 저건 아직까지 제대로 쓰진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을 좀 연습해본 덕분에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있다.
마르크트레스의 독자적 스킬인 ‘기공술’ 숙련도를 극한까지 올리면, 적랑과 유사하게 상대의 감각을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건 높은 히어로 센스. 기공술. 그리고... 내 감각의 운용이었어.’
다만 내가 사용하는 건 숙련도나 속도 면에서 적랑에게 비할 바가 못 된다. 실전에 무리 없이 써먹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현재 사실상 폐기 상태다.
‘그리고 이 메시지도 벌써 몇 십일 전....’
나처럼 쫓기는 몸이 아닌 적랑은 도시를 우회하며 다닐 필요가 없다. 나보다 한참 빨리 용제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랑이 케나인에 있다는 건 아마....
‘걔네들도 같이 있을 거고.’
설백과 세스나의 얼굴이 뇌리를 슬쩍 스쳤다.
만나겠지? 만날 거다 아마.
‘... 왜 튀었냐고 추궁당하려나.’
뭐라고 변명하지.
그냥 철판 깔고 모른 척 해버릴까. 아니, 오히려 그쪽이 손절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차라리 그래줬으면 좋겠군.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나는 이내 잡념을 털어내 버렸다.
고민해 봐야 소용없는 문제는 고민하면 나만 손해다. 그냥 나중에 닥치면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옆에서 바스락, 인기척이 느껴졌다.
“... 무슨 생각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빛이 일렁이는 은색 단발이 보였다.
프리시스였다. 그녀는 내 대꾸가 없었음에도 내 옆에 바싹 주저앉았다. 나를 흘깃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거기. 내 자리.”
순간 무슨 소린가 싶어서 한참을 생각하다 간신히 이해했다.
... 내 자리라니. 내가 지금 앉은 곳이 자기가 찜해놓은 모닥불 명당이라 이건가?
황당한 나머지 프리시스를 가만히 마주보자, 그녀는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째려보기. 곤란.”
두 마디 툭 내뱉고. 무슨 생각하는지 통 모르겠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모닥불을 주시했다.
몸매 s급, 동정인 내가 전화번호라도 건네야 할 것 같은 말투다.
“밤은 싫어.”
모닥불을 쳐다보던 프리시스가 대뜸 내뱉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 모아 거기에 턱을 묻었다. 그리고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 깨있으면. 잡생각 들어. 싫어.”
솔직히 좀 놀랐다.
요 이틀 동안 프리시스가 내게 한 말이라곤 ‘밥’, ‘쉬자’, ‘조용히 해’. 딱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과묵한 걸 넘어서 사회성이 부족한 여자인데... 아무래도 새벽 감성이 도졌나 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원론적인 얘기를 했다.
“그럼 자라.”
새벽감성 타임에 괜히 깊게 대화하면 저 여자 흑역사만 늘어난다. 내 나름 배려해준 거다.
프리시스는 나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잠이 안 와.”
“올 때까지 자려고 노오력해라.”
“자기 싫어.”
“너 이중인격이냐?”
“... 악몽. 꿔버려.”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하. 자지 않은 게 아니라, 자다가 악몽 때문에 깬 거였군.
내가 납득하고 있자니. 프리시스는 끌어 모은 다리를 꽉 껴안았다. 왜소한 그녀의 체구가 더욱 작아 보이는 자세였다.
“엄마... 죽을 때가, 떠올라. 싫어.”
나는 축 늘어진 프리시스의 꼬리를 잠깐 흘겨봤다.
전원 인간으로 구성된 용치기 일족에, 뜬금없는 반룡인 하나.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건 깊게 관여해서 좋을 게 없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툭 내뱉었다.
“내 별명 중에 하나가 ‘악몽의 사냥꾼’이다.”
“... 응?”
“내일 졸음운전 하다가 땅바닥에 사이좋게 처박히면 네가 책임질 거냐? 악몽 꾸면 내가 찾아가서 박살내준다. 안심하고 자라.”
딱히 깊은 생각을 하고 내뱉은 건 아니었다. 진짜 졸음운전 할까봐 안심하고 자라고 약 좀 팔았다.
다만 프리시스는 좀 이상하게 받아들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잠깐 나를 주시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악몽 안 꾸게, 해줄 거야?”
“어. 찍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마와 혀끝을 쿡 찍었다.
아마 뭔 제스쳐인지는 모를 거지만. 한없이 진지한 내 표정 때문인지 프리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세상에, 그런 능력이 어딨어. 이상한 사람.”
“너만하겠냐.”
나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었다. 프리시스는 웃다 말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떨구고 쭈그려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불편한 자세로 잘도 곯아 떨어지는군.
‘나도 잠이나 자자. 쓸데없이 고민하지 말고.’
두서없고 영문 모를 대화였지만,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좀 정리됐다.
감사의 의미로 프리시스를 제대로 모닥불 근처에 눕힌 다음. 내가 두르고 있던 두터운 모포를 그녀에게 덮어줬다.
작업을 마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린 그 순간.
“완전 선수시네요.”
내 앞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샤키엘이 방글거리고 있었다.
“오우야 X발 깜짝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모닥불 앞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샤키엘은 자고 있는 프리시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은색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 같으면 방금 반했을 거예요 까마귀님. 듬직해서 멋지네요.”
“... 거, 거 빈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빈말 아닌데.”
다행히 샤키엘은 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자기 아룡 근처로 가서 잠들었다.
아니. 고작 나 놀리려고 자다 일어나서 저런 거냐? 아님 시끄러우니 좀 닥치라고 에둘러 시위하는 건가?
‘... 주변에 종잡을 수가 없는 년들 투성이네 아주. X바.’
나는 몸서리를 치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미뤄뒀던 피곤이 일거에 들이닥쳤다.
금방 수마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