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드래곤 라이딩은 못 참지
“까마귀님. 외람되지만 잠시 시간 좀 빌려도 괜찮을까요?”
그 뒤론 샤키엘의 간곡한 부탁으로, 잠깐 숲의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처음엔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잔뜩 경계했지만. 그녀를 따라 들어간 숲의 참상을 보고는 입을 곱게 다물었다.
‘이건....’
숲의 초목들이 온통 새빨갛게 물든 참극의 현장이었다. 용제국 고위직의 동양풍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갈기갈기 찢긴 채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샤키엘은 슬픔에 잠긴 눈으로 쓰러진 사내들을 하나씩 쳐다봤다. 그리고 참상의 중앙까지 걸어가 조심스럽게 무릎 꿇어 앉았다.
“다들 미안해요. 부디 편히 가시길.”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듯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정체를 대강 추측했다. 아마 샤키엘을 지키려다 쓰러진 호위무사들인 듯했다.
“... 감사합니다. 이제 가시죠.”
잠깐 동안 침묵 속에서 기도한 샤키엘은 후련한 얼굴로 일어났다.
나는 샤키엘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내 손길에 따라 군말없이 일어났다.
나는 샤키엘의 앞에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 일단 좀 걷죠. 일행들이랑 만나기로 한 장소가 있어서.”
“아아. 네. 좋아요. 까마귀님의 일행이라니, 정말 기대되네요.”
“뭐... 네. 허허.”
그러냐. 나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루시가 또 뭐라고 노발대발할지도 기대되고. 샤키엘의 정체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생각에 벌써 이빨들이 씰룩거리는 것 같다.
“일단 당신이 한 말은 전부 믿겠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정황증거와 일련의 행동으로 신뢰는 확실히 갔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면 이해할 수 없지만. 미친년이라면 납득되기 때문이다.
샤키엘은 낮게 웃으며 “어머,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체는 그쯤이면 됐고. 방금 그 상황이나 좀 설명해 주세요.”
“... 그 상황이라면?”
“습격한 사람들이요. 왜 습격당했습니까. 공주님 기생충 감염된 게 탄로났나?”
“아. 그거라면... 습격자들은 과격파에서 고용한 암부(暗部)들일 거예요. 제가 벽지 시찰을 핑계로 황실을 은밀하게 빠져나왔는데, 그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아요.”
“과격파....”
나는 샤키엘이 전에 해줬던 얘기를 떠올렸다.
현재 용제국 정부에선 이스그라드의 유해를 없애야 한다는 과격파와, 보존할 방법을 모색한다는 온건파가 싸우고 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시선을 가늘게 뜨고 샤키엘을 쳐다봤다.
“그렇다는 건 댁은 온건파라는 뜻? 게다가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성가신 위치군요.”
“역시 까마귀님. 하나를 알려드리면 열을 깨우치시는 현명함이 대단하세요.”
“아니 그... 허흠험!!”
이 여자, 내가 칭찬에 약한 줄은 어떻게 알았어.
어찌 저리 가려운 곳만 살살 긁어주냐. 똥꼬 헐겠다 X발. 자꾸 어깨춤이 덩실거려서 탈골될 것 같단 말이다.
‘이, 이대로는 안 돼.’
정신차리자. 살면서 나 좋다고 접근한 여자들 중에 속셈이 없는 경우가 없었다. 아직 저 여자의 진짜 속내도 모르잖아.
옛날처럼 미녀한테 마냥 호구 같던 내가 아니야. 매운맛 박정용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휘저어 심기일전하고, 말투를 좀 더 단단하게 굳혔다.
“그러면 아까 했던 말이랑 앞뒤가 안 맞는데요?”
“어머, 어떤 부분이 그렇죠?”
“나한테는 같이 으쌰으쌰 해서 좀비드래곤을 무찌르자면서요. 그걸 용제국이 알아서 토벌해주겠다는데, 왜 댁은 온건파에 서서 그걸 막냐고요.”
순간 샤키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보다 3배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스그라드 토벌은, 당신이 없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까마귀님.”
일말의 여지도 없는 확신이었다.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것 같은 행색이다. 아니, 보고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샤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오히려 내게 물어왔다.
“까마귀님. 고룡을 직접 보신 적이 있나요?”
“... 아뇨. 없는데요.”
“그건 인간이 감히 적대할 수 있는 생물이 아닙니다 까마귀님. 생물을 넘어선 현상. 숨 쉬는 자연재해에 가깝죠.”
“.......”
혹시 농담인가 싶어서 샤키엘을 잠깐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웃음기가 한 점도 없었다.
“괴물에는 괴물입니다. 두 번의 계승 의식을 치르고,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까마귀님이 아니면... 이스그라드가 폭주했을 때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많은 병사들을 모아서 공격해봤자, 오히려 샤키엘의 위기감을 자극해서 폭주만 부추기게 될 겁니다. 그건 끔찍한 최악의 수예요.”
나는 듣다 못해 무거운 침음을 삼켰다.
내가 그 숨 쉬는 자연재해와 맞서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그 용가리가 정돕니까?”
“그 정도입니다.”
“.......”
“전세계 모든 용사들이 일거에 덤벼도 가능할지 의심스럽군요. 생전의 이스그라드는 불가능이 확실하지만... 시룡(屍龍)이 된 이스그라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전세계 모든 용사들이 덤벼도 간당단당하다니. 실화냐.
그리고 그런 괴물을 나한테 잡으라고 떠넘기고 있다니. 이 여자 인성 실화냐.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샤키엘은 뒤늦게 발언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까마귀님. 저희는 적어도 이스그라드의 약점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가능성이 훨씬 올라간 상태입니다.”
“약점이라면... 샤키엘 본체요?”
“네. 어떻게든 가까이 접근해서, 샤키엘이 깃든 이스그라드의 자궁만 파괴하면.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스그라드는 다시 영면에 들 거예요!”
과장스럽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샤키엘. 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눈을 돌렸다.
“무, 물론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겠지만요.”
“... 에휴.”
그리고 양심이 찔렸는지 이내 조그맣게 첨언했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샤키엘은 서둘러 얘기를 마무리시키려 했다.
“어, 어쨌든. 무고한 생명들이 의미도 없이 소모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바마마께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이유예요.”
“아 예... 그러셨군요.”
대충 전말은 모두 이해가 됐다.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샤키엘의 마지막 말로 한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용제 본인도 이스그라드 토벌에 찬동하고 있다.’
왜지. 좀비가 된 이스그라드가 용제국에 입히는 피해가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인가?
물론 빙의체인 샤키엘이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통제불능의 기미가 보인다고는 들었다만. ‘기미가 보인다’라는 건, 아직까진 그리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소리 아닌가?
‘이건... 용제국 황실의 이해관계가 얽혔겠군.’
아무래도 경제 쪽보단 정치 쪽의 냄새가 났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정치는 질색이야. 그쪽은 샤키엘이 알아서 하겠지.’
뭐, 그쪽은 내가 자세히 알 필요도 없다. 나는 샤키엘 말마따나 이스그라드 모가지 따서 의식만 진행하면 될 뿐이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잡담을 하는 사이, 나는 루시와 만나기로 했던 해안가에 도착했다.
“오, 용사!”
거기엔 익숙한 두 인물의 실루엣이 있었다.
그들이 퍼뜩 아는 척을 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터번까지 칭칭 감았던 두 사람이 천천히 얼굴을 드러냈다.
내 예상대로 루시와 유리아였다.
“호외다. 호외!”
루시가 터번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개선장군 행차하듯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내 마을에서 가만히 들어보니 말이다. 귀한 정보를 하나 입수했느니라.”
“귀한 정보?”
“그래. 후후. 듣고 놀라지나 말거라.”
루시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수했다는 ‘귀한 정보’를 떠벌거렸다.
“샤키엘은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고. 용제국의 제7황녀가 이 주변에 시찰을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더구나!”
루시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만. 일단 끝까지 듣기로 했다.
“오호. 그런데?”
“내 비책을 하나 떠올렸다. 이참에 그년을 납치해서 말이다. 용제라는 놈을 겁박하는 게야! 오랜만에 시원하게 한탕해서 제대로 된 밥이나 좀 먹....”
그리고 거기까지. 루시의 말도 발도 우뚝 멎었다. 아마 내 옆에 있는 하얀 머리 처자... 샤키엘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옆에서 같이 오던 유리아도 멀뚱거리는 시선으로 샤키엘을 쳐다봤다.
“... 응?”
“아, 우?”
한동안 미묘한 시선의 교차가 이어졌다. 샤키엘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우후훗.”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루시와 유리아의 뜨거운 시선은 슬쩍 돌아 내게 향했다.
해명을 원하는 루시와 유리아의 얼굴에 대고 툭 말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납치해왔다. 한 탕 크게 해 보시든가.”
내 입가엔 자포자기의 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나는 곧 세 번째 의식의 주인공인 샤키엘이 바로 그녀라는 것까지 밝혀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밝힐 수밖에 없었다. 루시가 워낙 죽일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뭔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스티카. 제가 바로 미지의 마왕, 샤키엘이랍니다.”
그 뒤로는 샤키엘과 루시의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샤키엘의 태도가 워낙 사근사근해서, 대화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 해보였다.
“얘기로만 들었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네요. 저는 조금 설레요.”
“...... 흥.”
“샤키엘, 바리공주... 아니면 제7황녀. 어떤 식으로 불러도 좋아요. 어차피 저는 당신의 그릇을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 외견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요.”
“...... 흐흠.”
“자매라고 할 수 있는 당신과 느긋하게 대화할 날이 오다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것도 다 까마귀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덕택이겠죠? 후후.”
“...... 흐음?”
아니. 자세히 들어보니 화기애애의 건덕지도 없군.
샤키엘만 신나서 떠들고 루시는 추임새만 넣고 있었다.
“... 흥. 운명 같은 소리. 네, 네놈이 철거머리 마냥 따라붙은 것 뿐이잖느냐.”
어느 순간, 띠껍게 샤키엘을 꼴아 보던 루시의 눈가에 쌍심지가 섰다. 샤키엘의 마지막 발언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정도론 샤키엘의 멘탈에 데미지를 줄 수 없다. 샤키엘은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그야... 만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꿈에 그리던 그분께서 온몸으로 느껴지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뭐, 뭣이?!”
“하지만 제가 가만히 있었어도, 결국 까마귀님이 저를 찾아와서 우리는 만나게 됐겠죠? 그걸 좀 앞당겼을 뿐이에요. 시간도 절약되고 좋잖아요?”
“크으그그윽!”
루시는 할 말이 없는지 그대로 입을 닫고 침몰했다.
반면 샤키엘은 말하다 말고 몸을 배배 꼬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거칠게 쉬며, 내게 열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결국 우리는 언젠간 이렇게 만나고, 저는 까마귀님께 몸도 마음도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죠. 스스로 말하려니 좀 부끄럽네요. 후후.”
“뭐, 뭐라고? 뭐라는 거냐 이년이?”
“아아! 이 얼마나 애절한 운명인가요. 실로 사랑스러운 비극이네요! 루스티카, 이해되시죠? 저의 애틋한 사랑... 당신이라면 이해되시죠??”
“히이익...!”
예상범위를 아득하게 초월한 이 구역 진짜 미친년의 발언.
마주보고 대화하던 루시는 물론이고, 옆에서 구경하던 유리아도 흠칫 숨을 삼켰다. 루시가 퍼뜩 나를 쳐다보더니 샤키엘을 삿대질했다.
“용사아아! 얘, 얘 이상한 년이다!! 빨리 죽여버리자 그냥! 본인도 너한테 뒈지고 싶다잖냐!!”
이상한 걸론 어디서 안 꿇리는 루시가 기겁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샤키엘 저 마왕은 단단히 미친 게 맞다.
‘하지만 당연히, 샤키엘을 지금 죽일 순 없지.’
샤키엘은 일단 용제국의 제7황녀이기도 하다.
또 다른 샤키엘을 죽이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반대로 최악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저런 거물을 지금 죽였다가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그러니 샤키엘을 죽이는 건... 어디까지나 드래곤 레이드가 끝난 다음의 일이다.
“죽이긴 뭘 죽여. 네 성질이나 죽여.”
결국 나는 그렇게 루시의 불만을 일축했다.
배낭을 싸고 무기들을 점검한 뒤, 곧장 걸음을 북쪽으로 옮겼다.
“어쨌든 목적지도 확실해졌으니, 빨리 가기나 하자. 불만은 안 받아.”
일단 당장의 목적지는 용제국의 수도, 케나인.
거기서 바리공주를 황궁에 떨궈 놓은 다음. 나는 이스그라드 유해가 안치된 케나인 북동쪽의 거대한 바위언덕, ‘태고룡의 무덤’까지 가야 한다.
“으으. 마음에 안 든다. 용사도 저년도. 전부 다!”
“아하하....”
불만이 두 볼에 잔뜩한 루시와 곤란하게 웃는 유리아가 내 뒤를 따라 걸어왔다.
하지만 샤키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까마귀님. 케나인으로 가시는 거죠?”
그러더니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를 흘깃 돌아보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저 여자 좀 무서워서, 저절로 대답하는 말투에 경계가 서렸다.
“그렇죠. 그쪽이 가야한다면서요.”
“그렇다면 걸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 좋은 방법?”
“네... 아, 양반은 못 되네요. 마침 이리로 지나가는군요.”
샤키엘은 방긋방긋 웃다 말고 퍼뜩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광활한 하늘 구석을 꿰뚫는 붉은 비행체의 편대가 있었다.
넋을 잃고 쳐다보는 내 귓가로 샤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치기들의 아룡(亞龍)을 이용하시죠. 걷는 것보다 100배는 빠를 테니까요.”
“아룡?”
나는 그제야 눈에 힘을 주고 붉은 편대를 제대로 쳐다봤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하늘 저편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붉은 비행체의 정체는... 날개가 달린 집채만한 도마뱀들이다.
“저건...!”
내가 상상한 용의 형상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
쌔끈하게 빠진 뒷태를 쳐다보던 내 눈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 예. 꼭 타죠.”
X발. 드래곤 택시는 못 참지.
나는 오히려 앞장서서 드래곤 편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폭발하는 로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