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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38화 (214/280)

238화

샤키엘은 숨을 잠깐 고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제 이전에 먼저 다른 샤키엘을 죽여야 합니다. 저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최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 그렇군요.”

“멸망의 신기도 그녀가 가지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제 숙주의 힘이 그녀보다 한참 미약하여... 허망하게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숨을 삼켰다.

멸망의 신기.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 단어 하나에 일련의 이야기에 대한 신뢰도가 떡상했다.

“음. 으음....”

나는 긴 침음을 흘렸다. 샤키엘이 담담하게 전해준 것들을 머릿속에 어떻게든 우겨넣었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 또 하나의 샤키엘은... 그냥 쌍둥이 동생 같은 겁니까? 아니면 원래 하나였던 개체가 여럿으로 분열한 느낌인가?”

“으음. 둘 다 조금 다른데 비슷한 느낌이네요. 처음부터 ‘샤키엘’이라는 마왕은 여러 개체가 공존하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각각의 개체가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서로 감지가 가능해요.”

“흐음.”

나는 긴 침음을 흘렸다.

진짜 저 여자가 샤키엘이고. 저 말대로 다른 샤키엘이 멸망의 신기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껏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이해되긴 한다.

‘퀘스트 창의 부재.’

눈앞의 샤키엘과 조우했을 때, 세 번째 의식의 퀘스트 창이 등장하지 않았다.

퀘스트 보상인 멸망의 신기를 가지고 있는 게 동생(?) 쪽이라면... 오히려 본체에 가까운 게 그쪽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러면 퀘스트창이 나오지 않아도 납득이 된다.

“그러면 걔는 어디 숨어있는데요. 당신처럼 또 용제국 황족? 그러면 좀 골치 아픈데.”

나는 점점 얘기가 복잡해지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샤키엘도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녀는 이스그라드의 유해에 숨어 있습니다.”

순간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물어봤다.

“어디라고요?”

“용제국의 용인들이 조상신으로 모시는 태고룡 이스그라드입니다. 또 하나의 샤키엘은 태고룡이 죽기 직전에 그 드래곤의 태내에 깃들었습니다.”

“태, 태고룡...?”

나도 그동안 용제국에 대해 들은 게 많다. 이스그라드가 뭔지는 안다.

태고룡 이스그라드. 약 80년 전에 죽은 걸로 알려진 용제국 케나인의 선조룡.

수천 년 전에 전멸했다는 다른 용가리들과 다르게, 최후까지 살아남았다는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직접적으로 세상에 간섭은 안 했지만... 용제국의 우두머리인 용제가 그의 후손을 자처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1년 전에, 설백이 불사교와 엮였던 반지 건도 있었어.’

그 반지 이름이 아마... ‘이스그라드의 전조’였다.

그래. 틀림없다. 저 용가리의 이름이 괜히 익숙했던 게 아니었다.

여러 방면으로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용가리 새끼구나. 나는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 그 용가리가 암컷이었어요?”

“네. 저도 샤키엘이 빙의하기 전까진 몰랐습니다.”

“허, X발.”

약 80년 전. 이스그라드의 죽음으로, 완전한 고룡시대의 종언이 선고되었다. 뭐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무려 잭 오스올드가 내 앞에서 한 말이었지.

이걸 다시 말하면. 이스그라드의 사망은 용제국이 확실히 인정했고. 세간이 다 아는 사실이라는 소리다.

“근데 죽기 직전에 깃들었으면... 용가리랑 같이 죽은 거 아니에요?”

기생체는 숙주가 죽으면 같이 죽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 의문이었다.

샤키엘은 고개를 슬슬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드래곤의 육체가 가진 엄청난 마력 때문인지... 샤키엘의 검은 마력과 이스그라드의 정신이 융화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불완전하게 되살아났습니다.”

“... 아니. 미친...!!”

X발. 이걸 사네.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잠자코 샤키엘의 말을 마저 들었다.

“지금도 또 다른 샤키엘은, 이스그라드의 썩어 문드러진 시신을 가지고 의미 없이 연명하고 있지요. 곧 그녀의 인격이 드래곤의 강대한 육체 때문에 완전히 압살될 겁니다.”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샤키엘.

어째 말하는 투가 심상치 않길래,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그러면... 뭐 큰일이라도 납니까.”

“샤키엘이 이성을 잃으면 이스그라드의 유해가 통제불능에 빠져 날뛰겠죠. 그러기 전에 까마귀님께서 막야 주셔야 합니다.”

“아....”

나는 탄성을 흘리다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숨을 삼켰다.

기다려 봐. 저게 뭔 소리야. X발 이제 하다하다 드래곤 레이드까지 뛰어야 된다는 소리야?

아무리 들어도 그런 거 같은데?

‘와. 산넘어 산이네 진짜.’

내가 먹구름 투성이인 앞날에 한탄하는 사이, 샤키엘은 걱정에 찬 목소리로 마저 설명했다.

“용제국의 황실도 되살아난 선조룡을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갖은 해악을 끼치는 태고룡의 유해를 퇴치하자는 과격파와, 국가사직을 보존해야 한다는 온건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요.”

샤키엘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나는 그녀의 말이 영 터무니없음에도, 신뢰도가 부쩍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저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증언을... 전에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을 골몰하다 가까스로 떠올려냈다.

―용제국 놈들, 국빈회의를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룡대를 엄청 믿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만....

―뭔가, 내부적으로 좀 다른 일 때문에 어수선해 보였다.

기억의 출처는 용제국의 사절로 국빈회의에 왔던 크라네이드. 무려 1년 전의 마르크트레스 때 그에게 들었던 말이다.

헥터 카사스의 임팩트에 밀려 어렴풋해진 기억이건만. 새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까마귀님. 부디 또 다른 샤키엘을 격멸해 주세요.”

내가 멍하니 있자 덥석. 샤키엘이 내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흠칫 놀라며 손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굳세게 내 손을 잡고, 반짝이는 붉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시룡 이스그라드를 죽이고... 저를 죽여서. 다시 이 세계에 내일의 여명을 밝혀주세요. 불쌍한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을 이루어주세요. 나의 까마귀님.”

다른 건 솔직히 아직도 긴가민가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마지막 그녀의 애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자기 목숨 버려가면서까지 이 족같은 세상을 살릴 이유가 있수?”

분명히 나는 눈앞의 하얀 머리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이것저것 질문했었다.

하지만 어째 질문을 거듭할수록 그녀의 정신머리가 점점 더 이해가 안 됐다.

벙찐 나와 달리 샤키엘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슬프지만 이것이 옳으니까요. 어머니의 헌신적인 뜻에 전적으로 동의했기에, 저는 이 짐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고 있답니다.”

말이 마왕이지, 말하는 건 성녀님이 따로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겨누었던 칼끝은 어느새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놈팽이한테 칼침 맞고 뒈지는데.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억울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런 운명적인 만남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음...?”

잠깐만. 기분 탓인가. 지금 샤키엘의 말하는 본새가 살짝 이상했다.

나는 눈썹을 비틀어 올리고 되물었다.

“... 낭만이 어째요?”

“낭만적이죠. 저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했어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80년 세월동안 줄곧 이 날만을 기다렸답니다. 당신의 손에 죽을 이 날만을. 정말 사랑스러운 절망이 아닌가요?”

“... 얼씨구.”

샤키엘은 베스타크 칼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이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게 향했다.

“아아. 그래요. 저는... 당신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린 끝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어느샌가 당신을 사모하게 됐답니다. 까마귀님!”

맹목적으로 번들거리는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이게 만화였다면 눈동자 안에 하트가 그려졌을 거다. 사랑은 모르겠고 광기에 가까운 눈이었다.

뭐라 할까. 그 숨막히는 분위기에 황급히 샤키엘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토, 통찰의 눈!’

그래. 스킬 뒀다 국 끓여먹냐. 이럴 때 안 쓰면 어디다 쓰려고.

나는 허겁지겁 성녀의 문장 특수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 이런 미친 소리가 진심일 리가 없어!’

지금 샤키엘이 내뱉었던 말 중 무엇 하나라도 거짓말이 있다면. 성녀의 문장이 발동되어서 하얗게 빛난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거짓말을 낱낱이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속내를 드러내라...!’

나는 부릅뜬 눈으로 샤키엘과 성녀의 문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 그래. 그렇구나.’

쥐고 있던 성녀의 문장은 미동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 나도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후우. 끼리끼리 논다고. X발.”

이 여자는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어지간히 미친년이라, 진짜 나한테 죽으러 찾아왔다. 그게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

생각이 짧았다.

미친놈 주변에 안 미친년이 꼬일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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