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운명적 만남?
“소녀가 바로 샤키엘입니다.”
여인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내게 당당히 들이밀었다.
‘아니... 잠깐만.’
나는 물론 당황했다. 혼란한 와중에 필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운터란트에선 그렇게 찾아도 정보 하나 없던 샤키엘이... 이렇게 쉽게?’
처음엔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의외로 나는 금방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 박정용. 이세계 짬밥만 곧 3년차에 들어간다. 게다가 무수한 죽음을 반복했다 보니, 얇고 길게 살아남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삶의 밀도부터 다르다.
‘일단 진정이나 하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사 박정용. 내 멘탈은 이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단단해졌다.
이 정도 반전으론 이제 잘 놀라지도 않는다 이 말이야.
‘그래. 사실여부는 둘째 치고.’
다른 건 몰라도. 눈앞의 여자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눈앞의 하얀 머리 용인 여자가 자기를 뭐라 지껄이든. 직면한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잠깐 거기 앉아보세요.”
“네. 까마귀님 명령이라면 기꺼이.”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바리공주... 아니. 자칭 샤키엘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내 분부대로 수풀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시네요. 까마귀님.”
“... 잘 아시는구만.”
자칭 샤키엘은 바닥에 앉은 채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 자잘한 행동까지 기품이 있고 우아해서, 솔직히 거부감이 물씬 들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태생이 쌍놈이라 격식 있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한다.
‘묘하게 순종적이라 더 부담스럽네. X발.’
하지만 지나치게 호의적인 저 태도만 빼면. 확실히 윗사람 특유의 오라는 있었다.
지금까지 숨통 제대로 붙은 4마왕을 루시 밖에 못 봐서 그런가. 차라리 이쪽이 루시보다 더 마왕답다면 마왕다웠다.
루시는 말투만 늙은이지 알맹이가 천상 애새끼다. 반박시 루시알못이다.
“그... 자칭 샤키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샤키엘은 볼을 슬쩍 부풀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칭은 빼주세요. 소녀는 진짜 샤키엘입니다. 아니면 그냥 바리공주라 불러주실래요?”
“... 예. 그럼 샤키엘. 뭣 좀 물어나 봅시다.”
“좋아요. 얼마든지요 까마귀님.”
계속 내려다보기도 목 아프다. 나는 주변의 나무 그루터기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고 덤덤하게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본인이 누구라고요?”
“까마귀님이 죽여야 하는 의식의 제물. 당신을 100년 가까이 기다려온 샤키엘입니다. 지금은 용제의 일곱째 딸인 바리공주로서 살고 있답니다.”
“잠깐 타임.”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사실 저게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제일 이해가 안 된다.
“네. 왜 그러세요 까마귀님?”
샤키엘은 내 제스쳐에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얼굴만 보면 나보다 누님인데, 반응이 새끼 강아지 마냥 너무 순종적이라 기분이 좀 복잡미묘하다. 나는 골이 아파오는 걸 느끼며 하나씩 짚어나갔다.
“바리공주면서 샤키엘이다? 공주면 공주고 마왕이면 마왕이지 아까부터 뭔 소립니까? 이중국적 같은 건가.”
“아. 대단한 건 아니에요 까마귀님. 소녀가 빙의(憑依)기생수라서 그렇습니다.”
대단한 거 아니라면서 대단해 보이는 명칭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나는 즉각 캐묻기 시작했다.
“빙의... 기생수요? 갈고리촌충이랑 친척이에요?”
“그, 그건 아닌데... 개념은 대충 비슷하다고 해둘게요. 아하하.”
바리공주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기생수는 오른손에 파고들어 신축성 지리는 칼날로 변하는 외계생명체다. 앞에 ‘빙의’까지 붙은 거 보면 진짜 그런 쪽인가?
나는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지그시 보냈다.
“하아. 까마귀님이 저에 대해 궁금해 하시다니. 소녀는 지금 너무 기쁘답니다.”
내 눈빛을 찰떡 같이 알아들은 샤키엘이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뭐야 X발. 쟤 진짜 아까부터 왜 저러냐. 나는 알 수 없는 그 반응에 흠칫 경계했고. 그러든 말든 샤키엘은 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머니에게 창조될 때, 모든 종족의 여성개체에 기생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답니다. 숙주의 자궁 깊은 곳에 잠복해... 서서히 숙주의 정신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지요. 그래서 빙의 기생수라고 표현한 거예요.”
“... 워, 워우.”
샤키엘은 충격적인 자기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은 쇼킹한데 정작 본인 얼굴은 담담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살인하는 모습을 남들이 볼 때 저런 느낌일까 싶었다.
“제게 잠식당한 개체는 무조건 여아만을 잉태합니다. 숙주가 잉태하면, 저는 그 태아의 정신을 장악해서 건강한 새 육체로 이동합니다. 그러면 제가 빠져나간 모체는 껍데기만 남아 잠깐 연명하다가, 금방 숨이 끊어지지요.”
“허어. 그렇습니까.”
“네. 최초에는 저도 용제의 첩에 기생했어요. 지금은 2대째의 삶이지요. 까마귀님을 만날 때까지, 저희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살도록 설계되었답니다.”
나는 샤키엘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탄성을 흘렸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그런가. 신기하면서도 살살 졸려오는 게, 동물의 왕국 나레이션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혐오감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그... 흥신소 일수꾼보다 기분 나쁘게 사시네요. 갈고리촌충 상위호환이었네.”
표정도 말도 반쯤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면전에 대고 내뱉은 건 좀 심했나 싶긴 했지만. 전부 사실 아닌가. 철회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 그,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런데 샤키엘의 반향이 생각보다 컸다.
샤키엘이 충격먹은 듯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풀 죽은 얼굴로 꿍얼거렸다.
“너, 너무하세요. 그런 말을... 누구도 아닌 까마귀님한테 듣다니. 흐흑....”
“...?”
웬걸. 눈가엔 눈물까지 찔끔 맺혀 있었다.
“소녀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까마귀님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기나긴 세월을 버텨오며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런데 이런... 으흑. 흐흑!”
샤키엘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저런 대사까지 치면서 울고 있으니, 내가 굉장히 몹쓸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억울하다. 나는 진실을 호도했을 뿐이다.
“그, 사는 방식이 족같은 게 그쪽 탓은 아니죠. 고개 드세요. 당신 죄인 아닙니다.”
그대로 방치하기도 뭐하니, 나는 심심한 위로를 던졌다.
생김새가 워낙 루시와 비슷해서 그런가. 우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자 가슴이 시큰거렸다.
샤키엘은 울다 말고 간절한 눈빛을 던졌다.
“흑...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 찍고.”
“다, 다행이에요. 까마귀님이 저를 싫어하게 된 줄 알고 그만....”
내 단호한 대답에 샤키엘은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 반응은 나로선 많이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쪽이 샤키엘이라 이거죠. 뭐, 갑작스럽지만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런데.”
“아무튼요. 그러면 더더욱 당신이 날 만나려고 찾아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 하다고요?”
샤키엘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나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얼굴 한복판에 스르릉, 베스타크를 빼내 겨누었다.
“진짜 샤키엘이라면 모른다고는 못 하겠지. 댁은 나한테 뒤져 이제.”
베스타크의 시커먼 칼끝이 그녀의 콧잔등을 가볍게 스쳤다.
키이잉. 청명한 소리가 우리 사이에 흘렀다. 샤키엘은 눈썹 한 번 미동도 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망치진 못할망정 왜 찾아와. 너도 오래 살다보니 노망났냐? 아랫 동네 빨간머리 박격포병 할머니처럼?”
나름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뇌까렸다.
하지만 샤키엘은 여전히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오히려 환영한다는 양, 검날을 붙잡고 자기 목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당황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 되었다.
“네. 언제든지요. 목숨을 바칠 준비는 진작에 마쳤답니다.”
“...... 허?”
“까마귀님이 용제국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희미하게 당신이 느껴졌어요. 기다리다 지쳐버려서... 실례인 줄 알지만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절 찾는 수고를 덜어드리려고요.”
달관한 듯한 샤키엘의 행색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수개월 전, 망자의 계곡에서 미네르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알아요? 그쪽에서 먼저 죽여 달라고 찾아올지. 푸후후.
아니, X발 세상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설마 미네르바는 여기까지 미리 보고 그런 말을 던졌던 건가? 아니... 그건 너무 억측인가?
샤키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눈을 떴다.
“하지만 그 전에, 저희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 때까지만 제 죽음을 보류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샤키엘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갑자기 말이 바뀌는군. 나는 곧장 눈썹을 튕겼다.
“해야 할 일?”
“네. 사실... 샤키엘이라는 마왕은 단일 개체가 아니에요 까마귀님. 제가 아닌 또 하나의 샤키엘이 아직 용제국에 버젓이 살아 있답니다.”
“!!”
진지하게 이어지는 샤키엘의 목소리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샤키엘은 하나가 아니에요. 군체 생물입니다.
눈앞에서 자칭 샤키엘이 하는 말과, 과거 미네르바가 해줬던 말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 이제 자칭 샤키엘이라고 하기도 뭐하군. 이 정도 정황증거면 샤키엘이 아닐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녀의 말을 한층 경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