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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36화 (212/280)

236화

“네, 네놈... 정체가 뭐냐!”

나름 고레벨로 구성된 암살자들이 셋이나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했다. 당연히 대장놈의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씨익, 입매를 잔인하게 비틀며 중얼거렸다.

“귀 먹었냐? 경추의 요정이라니까.”

짧게 한 마디 마친 직후. 나는 마갑 스케어크로우를 발동시켰다.

아찔한 고양감과 숨 막히는 압박감, 그리고 새카만 암흑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너희들은 그 동안... 목뼈의 건강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우드득, 꾸드드득!

흑익이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싸며 관절 뒤틀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암흑의 천으로 둘러싸였던 시야가 어느 순간 확 밝아졌다. 거기엔 인간 박정용 대신, 거대하고 기괴한 형상의 허수아비 괴물이 하나 있었다.

나는 뒤틀린 아가리를 쩍 벌렸다.

“경추 딱 대. 평생 압수다 X발놈들아.”

무저갱의 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흐, 으흐억! 괴, 괴물이다!!”

“저, 저런 건... 본적이 없어!!”

워낙 그로테스크한 목소리와 외형 때문일까. 아니면 놈들이 나름 고레벨이라,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탁하고 끈적한 광기를 감지한 것인가.

훈련된 암살자들조차 일부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수준이었다.

“다, 당황하지 마라! 공격진을 짜! 어서!!”

대장이 서둘러 그들을 통솔하려 했지만. 정작 본인조차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허둥대는 그들을 보며 킬킬거렸다.

“새끼들 귀여운 거 보라지.”

그륵, 그르륵.

왼손에 새하얀 손톱. 오른손에 새카만 손톱을 마주 긁었다. 쇠붙이 긁는 소리가 잡목림으로 서늘하게 울렸다.

“내가 그동안 말이야. 현상금 사냥꾼들 상대하면서 배운 게 좀 있단다.”

나는 중얼거리며 그들에게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갔다. 말소리도 발소리도 등줄기에 흐르는 희열 때문에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키잉! 내 의지를 읽은 손톱이 한껏 날카롭게 벼려졌다.

“스텝 원. 집단을 조질 때는 우선 대장부터.”

손톱의 예광이 번득인 순간. 나는 이미 암살단 리더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리더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에서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 어?”

카가가가각!!

한 템포 늦게, 내가 할퀴고 지나간 지면에 다섯 개의 굵직한 검흔이 새겨졌다.

거센 충격파가 사방에서 몰아닥쳤다. 산산조각 나버린 리더의 육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선 하나.”

나는 손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후두둑. 손톱에 엉긴 새빨간 피와 살점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려 암살자들을 쳐다봤다.

“스텝 투. 자비를 베풀면. 대개 뒤통수로 뻑치기가 날아온다.”

우웅. 귓전을 때리는 공명음이 울렸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혼탁한 시야가 바짝 수축했다.

그들의 요동치는 심장박동, 격렬한 숨소리. 그리고 높아진 체온까지. 놈들이 느끼는 당황과 공포가 시각화되어 한 눈에 들어왔다.

“하하하하하!!”

척수를 후려치는 고양감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괴물의 비웃음이 천 속의 공허에서 뿜어져 나왔다. 찐득한 광기가 사방을 윙윙 울렸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내 마지막 양심인 루시도 없네?”

나는 웃음을 뚝 끊고,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했다.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다는 말을 좀 돌려서 해봤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정신 차렸을 땐 뿔뿔이 도망치는 암살자들을 일일이 도살하는 내가 있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짜릿해지는 살육의 행진이었다.

* * *

나는 앙상하고 길다란 왼팔을 힘차게 뻗었다.

그리고 시동어를 외쳤다.

“글레이프니르!!”

촤르르륵! 뱀처럼 구불거리는 사슬들이 시커먼 공허에서 쏟아졌다.

사슬은 살아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마지막 암살자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렸다.

“으아아악!! 사,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

암살자는 눈물을 줄줄 쏟으며 애원했고.

퍼걱! 파육음과 함께 그 표정 그대로 내 손톱에 얻어맞았다. 다진 고기가 된 암살자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우우. 끝났다.”

방금 그 놈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스케어크로우를 해제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참고 있던 복부의 쓰라림이 일거에 몰려왔다. 시선을 내려보니 자잘한 검상이 나 있었다.

몇몇 암살자들이 죽기 직전에 발악하다 남긴 것이다.

“아 쓰읍... 개따갑네 X발.”

나는 씨근거리며 곧장 물의 에테르를 입 안으로 흘려넣었다.

스케어크로우는 다 좋은데, 변신하고 나면 아이템의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변신 도중엔 회복조차 못할뿐더러, 손톱을 제외한 무기들도 사용이 불가하다.

“후우... 색즉시공 공즉시색....”

긴 한숨과 함께 그 자리에 잠깐 엎어졌다.

스케어크로우든 다크레이븐이든. 흑익의 마갑 시리즈를 사용하고 나면 이렇게 빡센 현자타임이 찾아온다. 왜 그런지는 시전자인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인간성이 마멸되어가는 감각인 건가?’

잘은 모르겠다만. 어쩌면 흉마를 사용한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탈하면서도 복잡한 기분이다.

“후우.... 우, 움직이자.”

무기력증이 좀 완화되자, 나는 곧장 여자와 조우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암살자들을 척살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다. 그래서 반쯤은 여자가 이미 줄행랑치지 않았을까 예상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자는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 당신은...!”

여자가 내 인기척을 느낀 건지 퍼뜩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수풀 위에 주저앉아서 자가 치료를 하던 중이었다. 나를 눈에 담자 만면에 호의와 화색이 가득해졌다.

나는 그 태도에 흠칫 몸을 물렸다.

‘저 반응 뭐냐. 존나 낯설다.’

이상하다. 스케어크로우로 변신한 모습을 분명 이 여자도 봤을 건데.

현상금사냥꾼들이 으레 보여주던 공포에 질린 표정이면 모를까. 살인광 모드를 커밍아웃한 후에도 저런 시선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뭐 어쨌든... 치료나 도와줘야겠군.’

좀 이해는 안 됐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지금은 여자의 상처가 워낙 심해서 심문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나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에테르병을 불쑥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한 잔 빠십쇼. 상처에 직빵이니까.”

“아. 네. 감사... 합니다.”

여인은 내 만병통치약(?)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병의 주둥이를 입가에 갖다 댔다. 나는 타이밍을 맞춰 물의 에테르를 활성화시켰다.

파아앗. 그녀의 몸에 났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일거에 말끔하게 회복되었다.

“어머나. 신기해라!”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기 몸을 훑어봤다.

감탄사가 무슨 사극 연극톤 같다. 저게 용제국 평균인 건가. 아님 저 여자가 특이한 건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는데. 그녀가 별안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저, 정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됐습니다. 뭐 대단한 거 했다고.”

솔직히 나도 오랜만에 스트레스 풀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 죽이는 걸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막장 감성이 된 나 자신한테 건배다.

“아니에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이미... 흐윽.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갑자기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는 여자에게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살펴봤다.

“.......”

일단 나는 말을 잃었다.

내가 여자 얼굴 보고 입 다무는 경우는 둘 밖에 없다. 너무 내 취향이거나, 너무 취향이 아니거나.

지금은 전자다.

‘도내 최고급 미녀 실화인가.’

나이는 대충 20대 후반 정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인간을 벗어난 생김새들이었다.

귀 옆으로 지느러미 같은 이상한 촉각이 늘어졌고. 관자놀이엔 양의 뿔 같은 굵직한 뿔이 달렸다. 게다가 치맛자락 밑으로는 비늘로 뒤덮인 도마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것까지 스캔한 시점에서 그녀의 종족을 간파했다.

‘용인이네. 용제국 귀족층이었군.’

어쩐지 말투가 기름지다 싶더라니, 곱게 자란 여자가 맞았다.

산발한 순백색 머리카락 아래로 인자하게 굽은 붉은 눈을 반짝이는데. 전체적으로 성숙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미녀였다.

‘분명히... 미녀긴 한데.’

내가 말문이 막힌 건 그녀가 미녀라서가 아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엄청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하얀 머리 미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다가, 이내 탄성을 흘렸다.

“... 어?”

그래. 저 색. 이제 보니까 머리칼과 눈이 너무 익숙한 색감이었다.

외관이 조금 다른 걸 빼면... 저건 루시랑 너무 똑같지 않아?

나는 혹시나 싶어 목소리를 조금 깔았다.

“이봐요. 당신 정체가 뭡니까.”

내 물음에 여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더니, 선녀옷처럼 하늘거리는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물론 그래봐야 워낙 너덜거려서 치부만 간신히 가리는 정도였다.

“... 죄송합니다. 소녀가 경황이 없어서 결례를 그만.”

여인은 흐트러진 긴 머리를 다시 올려 묶어 비녀로 고정하고, 정갈한 표정과 우아한 동작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보는 내가 감탄이 다 나오는 고풍스러운 행색이었다.

“소녀는 용제국 케나인의 영원한 패왕, 용제 디스칼트의 일곱째 딸입니다.”

예상했던 정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악하기엔 충분한 정체였다.

“...... 요, 용제의 딸? 이 나라 공주님?”

“네. 맞아요. 이름은 바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방금까지 팽팽 돌아가던 뇌의 시스템이 다운되었다. 나는 현실부정을 시도했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오함마 꺼내와야 쓰겄는데?”

“정말이랍니다. 호칭은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하얀 머리의 여인. 이름은 바리.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무려 용제의 딸.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상태창에서 ‘패왕의 일곱 번째 딸’이라는 이명을 본 것 같기도 하다.

“... 아니. 이게 아니네요.”

내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니. 자칭 공주님은 별안간 달뜬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도 한숨처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가벼운 조크였죠?”

“아뇨. 당신께는 제 진짜 정체를 밝혀야겠다 싶어서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는걸요.”

“...?”

몰래카메라 선언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더니 아니었다.

그녀는 한층 더 이해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 예?”

“역시 이 느낌은 당신이었군요. 위험을 무릅쓰고 변방의 항구도시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었어요. 드디어...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됐어...!”

바리공주가 별안간 내게 성큼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신형을 물리자 바리공주는 그만큼 다시 접근했다.

내가 절찬리에 당황하는 사이, 그녀가 양손을 천천히 올렸다.

“으엥? 아니, 왜, 왜 이러십니까...?!”

스르륵. 바리공주가 내 턱을 슬쩍 쓰다듬는다.

그녀가 무슨 스위치를 잘못 건드렸는지, 숨이 저절로 턱 막혔다.

“아직도... 절 모르시겠나요 까마귀님?”

까마귀님. 바리공주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순간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저 호칭에 이끌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별명을... 댁이 어떻게 압니까.”

새삼 눈앞의 백발 미녀에 대한 경계심이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나는 턱 주변을 맴도는 그녀의 손을 짜악, 야멸차게 쳐냈다.

“아앗. 아파라....”

바리공주는 달아오른 손을 부여잡고 미미하게 웃었다. 안타깝다는 듯, 어느 정도는 원망스러운 듯한 미소였다.

“후훗. 역시나. 못 알아보시는요. 조금 야속하네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소녀가 바로 샤키엘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 정체를 실토했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당신이 취해주길 손꼽아 기다려왔던, 미지의 마왕. 그게 바로 소녀랍니다.”

이번 건 예상대로면서, 동시에 경악스러운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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