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어디 있냐. 내 점심밥들아.’
숲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온몸의 감각을 선명하게 확장시켰다.
이건 두 번째 의식을 마친 뒤로 얻은 부수능력이었다. 히어로센스가 40을 넘고 나서는, 내 의지로 온몸의 감각을 초인적으로 확장시키는 게 가능해졌다.
‘숲이면 시각보단... 청각을 확장해볼까.’
처음엔 조절하기 어려웠지만. 줄기차게 쫓아오는 현상금 사냥꾼들 때문에 지금은 밥 먹는 것보다 익숙하다.
이건 그만큼 밥 먹는 게 부실해졌다는 소리기도 하다. 세상 슬프군.
“음?”
어느 순간. 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민감해진 귓가로 숲의 바람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사이엔 앙칼진 비명과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꺄아앗!”
인간의 발소리. 그리고 인간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나는 거기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쫑긋 세운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 제발, 도와...! ... 세요!”
사박사박, 가벼운 발소리 뒤로 무수한 발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오른쪽 방향에서 내쪽으로 달려오는 여자가 하나. 그 뒤로 발소리가 열 명.
추격을 당하고 있군. 보폭의 속도나 형태를 봐선, 추격자 쪽은 제법 고레벨의 인간들 같다.
“후우.”
나는 빠르게 견적을 내리고 짤막한 탄성을 흘렸다.
후다닥. 곧장 소리가 들려온 곳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위험할 뻔했네. 역시 스캔해보길 잘했다.’
아니. ‘도망치듯’이 아니다. 도망친 거 맞다.
지금 나 지명수배자다. 내 코가 석자요 목구멍은 포도청이다.
아무리 내가 관심병자에 여자 앞에서 가오잡길 좋아한다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영웅행세 할 짬이 안 된다.
저 여자를 혹여 구해준다 치자. 쟤도 내 현상금 액수 알면 뒤통수에 칼 꼽으려고 할걸?
‘극락왕생 하십쇼. 목소리 이쁜 누나.’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놀랍도록 고요한 걸 봐선, 최소한 전문적으로 고용된 암살자들이 분명했다. 살수가 꼬일 짓을 한 본인 업보를 탓해야지. 별 수 있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가던 길을 갔다.
“... 마귀! 까마귀님! 어디, 어디 계신가요!!”
그러나 직후 들려온 소리 때문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여자가 까마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
나는 슬쩍 나무 위를 쳐다봤다.
쌀쌀한 겨울 하늘.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다양한 새들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까마귀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숲은 애초에 까마귀가 사는 숲이 아니었다.
‘잘못 들었나?’
아니. 그건 왠지 아닐 것 같은데.
까마귀‘님’이라고 했다. ‘니미’를 잘못 들은 건 분명히 아니다.
저 여자가 직녀가 아닌 이상에야 까마귀한테 극존칭을 붙일 이유가 없다.
‘아... 이거 어째....’
느낌이 쎄했다. 호구센서가 머릿속에서 경종을 미친 듯이 울렸다.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금 귀를 기울여봤다.
“까마귀님! 인도하는 까마귀님! 제발...!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역시나. 저거 나 부르는 거 맞았다.
“아 X발.”
게다가 주의 깊게 훔쳐듣고 나서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중간에 방향을 바꿔 도망쳤음에도 말이다.
‘아니. 설마....’
혹시나 해서 도망치는 방향을 다시 바꿔봤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여자의 발소리도 내 쪽 방향으로 꺾였다. 여자가 정확히 나를 조준해서 달려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
이젠 가만히만 있어도 사건이 날 찾아오는군. 기가 막힌 내 인생에 건배다.
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잠깐 못 박혀 있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쌍검을 뽑아들었다.
“아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퍼엉! 지면을 박차고 목소리의 발원지로 달려 나갔다.
나 저렇게 애타게 찾는 사람이면 적어도 등에 칼 꼽히진 않겠지. 그런 소인배적인 계산을 하면서 말이다.
* * *
나는 곧 문제의 추격자들을 조우할 수 있었다.
‘찾았다.’
푸쉬익. 잠입 스킬로 기척을 최대한 줄였다. 그리고 인근의 수풀에 숨어, 문제의 추적자 일행들을 주시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상황일까. 저게.’
단풍처럼 붉은, 용제국 특유의 하늘거리는 동양풍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하나.
그리고 그녀를 바짝 추격하는 흑장속 차림의 남자들이 열명 남짓.
“하악, 하아....”
숨을 가쁘게 헐떡이는 여자는 드레스가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그 사이로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서 온통 피투성이였다.
문제는 남자들 쪽도 마찬가지다. 이쪽은 오히려 팔 하나가 절단되거나, 척봐도 치명상 급으로 온몸에서 피를 쏟는 놈도 있다. 상처 자체는 남자들 쪽이 더 심했다.
‘... 그렇게 강해보이진 않는데.’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추격당하는 여자를 쳐다봤다.
각도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안 보이지만. 하얀 머리칼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치렁거려서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해 상태창을 띄웠다.
[명칭: 케나인의 바리]
[별칭: 패왕의 일곱 번째 딸]
[LV. ???]
[체력: ??? ?마력: ??? ?신체상태: 출혈(중), 현기증]
[힘: ??? ?민첩: ??? ?지능: ???]
나는 마빡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아. 이 X발 혐미르의 눈. 또 시작이네.’
정체만 확실해지면 개입하려 했건만. 나는 잠깐 그 자리에서 고민했다.
나도 원숭이는 아닌지라 학습을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얼마나 큰 스노우볼로 나중에 닥쳐오는지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다.
‘위험요소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여자의 정체가 모종의 이유로 파악이 안 되는 이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현명했다.
결정했다. 잠깐만 더 개꿀잼 직관하다가 나가자.
“포기해라. 바리공주.”
어느 순간, 그들이 멈췄다.
쫓기던 여자 쪽이 발을 멈추니 자연스레 추격전이 끝난 것이다.
흑장속의 남자들이 헐떡이는 여자를 천천히 조여 들었다. 여자는 순식간에 퇴로를 틀어막혀 사면초가에 빠졌다.
“쓸데없는 저항은 거기까지다.”
흑장속 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이 암살자 무리의 리더인 듯했다.
“용제놈이 자랑하던 네 친위대도 전멸했다. 홀로 남은 네가 무얼 할 수 있나. 무능한 공주여.”
“하아. 하아... 닥치세요. 무뢰한.”
“아까부터 누굴 애타게 찾는 것 같던데. 지나가던 협객이 기적처럼 나타나길 바라기라도 하나?”
암살자 대장은 흑장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며 비웃었다. 상처가 심하지 않은 다른 암살자들도 같이 비웃었다.
키잉! 이내 그들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여자에게 동시에 겨누었다.
‘원래는 여자 쪽에 호위대가 있었다 이거지.’
암살자들의 검상은 그들과 교전하다 입은 건가 보다. 대충 아귀가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삐빅. 앞장서 떠벌거리는 남자의 상태창을 눈앞에 띄웠다.
[명칭: 소황의 이스트그랑데]
[별칭: ‘소황의 그림자’ 단장. 암부(暗部) 13호.]
[LV. 311]
[체력: 2800/2800 ?마력: 1300/1300 ?신체상태: 정상]
[힘: 301 ?민첩: 598 ?지능: 31 ?히어로 센스: 21]
다행히 이번엔 제대로 상태창이 표시되었다.
다만 수치를 제대로 확인했음에도, 나는 미미르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 뭐야. 레벨이 개 높잖아. 정체가 뭐지?’
암살자 수장의 레벨이 무려 300대다.
혹시나 해서 다른 멤버들도 하나씩 살펴보니, 최약체가 250을 웃돌았다.
이건 기본적인 무력수준부터가 절대 평범한 암살집단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암살자들을 둘러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용인이 아닌데다 히어로센스가 달렸어. 저건 무조건 국가 용병단이다.’
용제국의 문화는 운터란트 만큼이나 특이한 게 많다.
사람들의 복식이나 생활까지, 판타지가 아니라 통짜 무협에 가깝다. 문자조차도 대륙 공용어와 함께, 용각(龍刻)문자라는 한자와 비슷한 체계를 쓴다.
판타지적인 색채가 있다면 지배계층인 용인들의 드래곤을 닮은 생김새. 그리고 이름을 짓는 특이한 방식뿐이다.
‘소황의 이스트그랑데면... 일단 소황 사람이라는 건가.’
저런 식으로 ‘어디 출신의 누구’까지가 전부 이름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걸 묻는 건, 한국인한테 왜 김치 먹냐고 물어보는 격 아닌가? 그냥 문화가 그렇단다.
‘어둠의 국립 용병단 같은 건가.’
어쨌든 저 정도 무력 구성이 사설 용병부대에서 나올 리는 없다. 용제국의 상비군인 국립용병단 중에서도, 정예들만 득득 긁어모아야 겨우 저런 수준이 될 거다.
국가의 구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비밀리에 창설된 암살집단이 아닐까. 나는 견적을 대충 그렇게 내렸다.
‘그러면 저 여자가, 그런 놈들한테 노려질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나는 여자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바들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몸 상태를 봐선 서있는 것이 고작인 듯했다.
“음...!”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눈을 부릅뜨며 백색 장발의 여자를 향해 베스타크를 힘껏 던졌다.
푸직. 질펀한 파육음이 숲을 울렸다.
“크, 헉!”
베스타크는 여자의 등 뒤로 접근하던 암살자에게 적중했다. 그림자처럼 흐느적거리던 신형이 뚜렷해지며 피를 울컥 뿜었다.
여자는 물론이고 암살자들의 부릅뜬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단숨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뭐, 뭐야!”
“습격이다!”
놈들이 당황하든 말든. 물론 나는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곧장 어검술을 발동해 베스타크를 조작했다. 휘리릭, 암살자의 몸에서 빠져나온 베스타크가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그의 몸을 훑었다.
푸화악! 피보라가 일어났다. 무수한 혈선이 그려진 남자의 몸뚱이가 힘없이 엎어졌다.
“... 거기 누구냐!”
암살단 리더가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쳐다보며 외쳤다.
‘오호. 위치가 바로 뽀록났네?’
꼴에 레벨 좀 먹었다 이건가. 어검술의 마력의 흐름을 간파하고 내 위치를 특정했다.
나는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스스. 잠입 스킬을 해제하고 놈들 앞에 당당히 걸어 나갔다.
“안녕 얘들아. 만나서 반가워.”
우직, 우드득! 태평한 내 인사와 별개로, 파육음이 연신 울렸다.
암살단 리더를 중심으로 양 옆에서 난 소리였다. 마침 두 명의 사내가 예리하게 잘린 뒷목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엎어지고 있었다.
“나는 경추의 요정 박정용이다.”
우우웅. 시체 주변에서 에스파다와 멸망의 대검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먼저 날렸던 베스타크까지 일거에 내 주변으로 돌아왔다. 나는 세 개의 검을 저글링 하듯 공중에 띄운 채 놈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