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마왕 찾아 삼만리
여기는 지옥의 한복판이다.
“또, 또 브레스를 쏜다! 도망쳐라!!”
“X발! 몇 번째야 도대체!!”
깎아지른 언덕의 꼭대기에서 걸쭉한 초록빛의 안개가 매섭게 몰아닥쳤다.
안개는 삽시간에 언덕빼기의 전역을 뒤덮어버렸다. 그리고 치지지직,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누, 눈이! 눈이 안 보여!!”
“살려줘! 엄마! 엄마아아아!!”
안개가 휩쓸고 나자, 녹아내리는 몸을 부여잡고 버둥거리는 인간들이 즐비했다. 온몸의 살갗이 일거에 썩어들어가 이미 뼈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아비규환의 패닉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오오오오오!!!
그 순간, 포효가 창공을 찢어발겼다.
구구구. 땅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어떻게든 독기의 포화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그 세상천지가 신음하는 포효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미, 미, 미쳤어. 용제는 미쳤다고! 저, 저딴 걸 어떻게 이겨 X발!!!”
“흐아아악! 사, 살려줘!!”
살아남았던 극소수의 용사들은 무기를 냅다 내팽개쳤다. 그리고 언덕의 비탈을 따라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의가 꺾인 것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용기사... 코스크 기룡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쏴, 쏴라! 화염포를 쏘란 말이다!!”
기룡대의 편대장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 여인이 편대 선두에서 외쳤다.
“... 으, 윽!”
“흐으. 흐윽...!”
하지만 휘하의 용기사들은 따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찬 얼굴로 언덕의 꼭대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도 기룡을 조작해 화염을 뿜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두려움은 이미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전염되어 있었다.
“...... 하.”
그 때까지 지면에 두 발로 서있는 건 사실상 나 밖에 없었다.
같이 전투에 참전했던 적랑도 어느 순간 난리통에 헤어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덕의 꼭대기,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존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르르르.
마침 그 거대한 존재도 부패한 눈으로 우리들을 벌레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삐빅. 상태창 패널이 어김없이 눈앞에 나왔다.
[몬스터 정보]
[명칭: 시룡(屍龍) 이스그라드]
[규격 외 존재. 파라미터 측정 불가.]
[상세: 파라이소 대륙 태고의 시대부터 살아왔던 최강의 생명체. 그 중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개체. 비록 시룡이 되어 빙의된 기생체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으나, 압도적인 생전의 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총기를 잃고 구더기가 들끓는 보라색 눈동자.
썩어 문드러진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과, 그 사이 듬성듬성 박힌 이빨.
거대한 아파트 한 채가 움직인다 해도 좋을 거구. 그리고 다 찢어져 넝마가 된 날개까지.
“후우... 하악.”
나는 격해진 숨을 애써 갈무리했고. 이내 양손의 쌍검을 더욱 세게 꼬나쥐었다.
몬스터 설명 패널에도 나와 있지만. 나는 지금 드래곤 레이드를 뛰고 있다.
“하... 내 인생, X발 진짜...!”
왜지.
왜 나는 여기에 있지.
왜 나는 여기서, 수많은 목숨을 버려가며 저 시체 드래곤과 맞짱을 뜨고 있냐.
군대에 처넣어진 대한민국 청년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현 상황의 부조리에 신음하고 있었다.
“진짜 X발... X발 X바알...!”
나는 욕을 숨쉬듯이 내뱉으며 곧장 진화의 흑익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슈르륵. 흑익이 몸을 빈틈없이 감싸며 단단한 중갑옷, 다크레이븐으로 변화했다. 나는 변형을 마치자마자 날개에 마력을 분사해서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위험!’
쿠과과과! 때마침 시퍼런 시독(屍毒)의 안개가 언덕을 전방위로 휩쓸고 지나갔다.
태고룡이 이걸로 세 번째 브레스를 갈긴 것이다.
“끄아아아!”
“아아아악!”
치지지직! 지상의 뚜벅이들한테서 재차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나마도 곧 모두 즉사해버려서 비명조차 뚝 끊어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나도 다른 시체들과 같이 언덕에 뼈만 남기고 낮잠 잘 뻔했다.
“으아아아! 스파르타아아!!”
나는 괴성을 질렀다. 동시에 대포알 같이 언덕의 꼭대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브레스가 쏟아지고 놈이 재정비를 하는 지금. 지금 말고는 저 거대한 시체 괴물에게 접근할 방도가 아무 것도 없다!
“X발... 여긴 지옥이야...!!”
중얼거리는 순간, 문득 주변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하늘을 뒤덮어 그늘을 만든 것이다.
설마 싶어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손바닥이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 이런. X발.”
짤막한 욕을 주워섬겼다. 머릿속이 순간 백지가 됐다.
어쩌다 이런 지옥에 발을 들이게 된 걸까. 그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그래. 그 때부터였지.’
또 하나의 샤키엘을 만났을 때다.
그 때 장대한 드래곤 레이드의 서막이 올랐다. 물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오오오오!
이스그라드의 포효가 온몸을 징징 울렸다.
내 육체는 거대한 드래곤의 손바닥과 시시각각 가까워졌고. 머릿속은 주마등처럼 그 때의 상황을 재현해 나갔다.
그리고 퍼어어억! 파리채에 맞은 파리 마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케흛헉!”
우지끈. 와장창!
몸의 안팎에서 박살음이 서라운드로 울렸다. 흩어지는 핏방울과 갑옷쪼가리 속에서 나는 정신줄을 놓았다.
미지의 마왕, 샤키엘과 처음 만났을 때가 머리맡에 아른거린다.
천천히 사고가 정지되고, 눈앞은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나이트레아와의 담판 이후 다시 4개월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지금은 12월 말. 대륙 전체를 뜨겁게 달구던 여름은 지났고. 어느새 혹한의 겨울이 찾아왔다.참고로 운터란트 전역엔 내 목의 현상금이 걸린 상태다. 테러 및 국가전복기도라는 명목 하에, 어마어마한 액수로 말이다.
[WANTED: 163417413번째 용사 ― 박정용]
[위 인물을 죽이거나 생포할 것.]
[보상: 생포 시― 슈엘츠 금화 10만 냥 / 사살 시― 슈엘츠 금화 5만 냥]
사실 그럴 만도 하다.
국가요직의 집무실에서 그만큼이나 깽판을 쳤고. 운터란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 나니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냐고?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X발 다 꺼져 새끼들아!”
뭘 어떻게 하냐. 나는 이제 명실상부 대륙 최강의 사나이다.
현상금사냥꾼 나부랭이들이 막으면 어쩔 건데. 그냥 앞길 막는 놈들 죄다 쳐죽이면서, 용제국으로 열심히 북상했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죽이지는 못했다. 죽이려 할 때마다 루시가 워낙 완강하게 거부해서 말이다.
“안 돼! 전처럼 또 미쳐가지고 발광할 거잖아! 죽이지 마! 죽이려면 나를 죽여라! 내 허락 맡기 전엔 절대! 아무도 함부로 죽이지 맛!!”
대충 이런 느낌이다.
최강이 됐으면 뭐하냐. 나 요즘 루시한테 잡혀 산다.
어쨌든 뭐, 박정용의 가녀린 소녀감성 보호를 위해 현상금사냥꾼들을 죽이지 않는 것까진 좋다.
그런데 목격자와 추격자를 깔끔, 신속, 정확하게 제거하는 살인과 달리... 방생은 여러모로 사후관리가 귀찮다.
“들었어? 그 미치광이 테러범 용사가 이 주변에 있다던데?”
“저, 정말인가? 이 마을도 위험한 거 아냐?!”
“어딜 가든 용사놈들이 문제라니까. 세상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족속들.”
그렇다. 아무리 은밀하게 이동해도 생존자들에게서 내 동선이 줄줄 샌다.
덕분에 운터란트를 횡단하는 내내 죽은 듯이 숨어서 이동해야 했고, 중간에 마을을 들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운터란트의 황야지대를 빠져나오는 데만 4개월이나 걸린 것이다. 거짓말 안 섞고 이렇게 거지같은 여행은 이세계 생활 중 처음이었다.
“자네 말이야, 그 소문 들었나?”
“아아. 알지. 금세기 최저, 최흉, 최악의 대악당 ‘밝 쟌뇽’ 말인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소문. 해괴망측한 소문이 생존자들에 의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더 문제다.
“소문에는 솔방울로 에테르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을 배처럼 타서 운터란트 대운하를 건너갔다던데?”
“놈과 마주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대. 운터란트 방위군도 하룻밤만에 맥없이 몰살당했다더군.”
“요즘은 현상금 사냥꾼들도 함부로 안 덤빈다며?”
“워낙 잔인하게 사람을 도륙내 놓는다잖나. 무서울 만도 하지.”
대충 이런 식이다. 내가 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내 죄목으로 줄줄이 추가됐다.
아니 뭐, 그래. 하룻밤에 국가 방위군을 몰살? 나한테 그럴 힘이 있었으면 헥터나 알테어한테 그렇게 똥고생할 이유도 없었겠다만. 일단 어디서 중력 100배 수련을 받았다고 치자.
더 가관인 것도 있다.
“내가 들은 건 하룻밤 만에 융단폭격으로 가이서스의 남자들을 몰살하고, 마을 여자들을 죄다 임신시켰다던데?”
“그게 X발 사람이야?”
“너는 그놈이 아직도 사람으로 보이냐?”
“아니?”
“근데 뭘 물어.”
야 X발. 상식적으로 하루 만에 마을 아녀자를 어떻게 전부 임신시키냐.
소문 퍼뜨리는 너희들 다 모쏠동정이지? 생각하는 수준이 가만 보면 나랑 비슷하다.
제발 음란물 그만 보고 일상을 살아가주길 바란다. 나에 대한 관심도 꺼주면 더 좋고.
[WANTED: 163417413번째 용사 ― 박정용]
[위 인물을 죽이거나 생포할 것.]
[보상: 생포 시― 슈엘츠 금화 100만 냥 / 사살 시― 슈엘츠 금화 80만 냥]
그래서 처음엔 일가족이 평생 놀고먹을 현상금이었던 게, 연말쯤 되니 웬만한 성채 하나를 일시불로 지를 수준까지 불어났다.
쫓기는 인생에 적응되니, 현상금 스코어 올리는 게 생각보다 재밌더라. 밀짚모자 모 해적도 이 맛에 해적질했지 싶다.
정확히는 그거 보는 재미라도 없으면 인생 고달파서 못 산다.
“으음. 초상화가 실물보다 낫네 어째.”
나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수배전단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내 대충 바닥에 버려두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여기엔 좀 동물들이 있으려나.”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운터란트와 용제국의 접경 구역. ‘소황’이라는 마을 인근이다.
판타지보다는 차라리 무협이 어울릴 법한 동양풍의 마을인데. 작은 규모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거대한 항만이 구비된 게 특징이다.
인구 유동도 굉장히 활발해서 사실 마을보다는 지방도시에 가까웠다. 주변 도시들 중에선 여기가 용사들을 위한 인프라도 가장 발달해 있다.
‘진짜... 배고파서 숨지겠네.’
그 이유는 여기도 용사 시험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과거형인 이유는, 정작 그 용사시험장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 있어서 그렇고.
어쨌든 나는, 그 소황 옆에 있는 작은 잡목림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얘네는 잘 하고 있나 모르겠네.’
나는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조금 돌렸다.
멀찍이 항구도시에 정박한 배들이 그림처럼 늘어져 있었다. 배들의 모양조차 서양식 범선이 아닌 동양식 배에 가까워서 느낌이 새롭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기를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아니. 무슨 정보 모으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나에 비해서 유리아는 얼굴이 거의 안 알려졌다. 나이트레아에게 보여준 적도 없고. 그 뒤론 철저히 가리고 다녔으니까.
그래서 현재 루시와 유리아를 소황 안으로 잠입시켰다. 둘이서 샤키엘에 대한 정보를 모아오기로 했는데... 어째 아무리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뭐, 나도 아직 식량 못 구했으니 할 말은 없군.’
졸지에 이세계 청년가장 신세가 된 박정용.
불사의 마왕 루시와 계약한 불사신 용사이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국가 규모 현상수배자.
내 인생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새삼 기구한 팔자가 서러워졌다.
‘겨울이라 사냥도 여간 쉽지 않네. 차라리 낚시를 할 걸 그랬나.’
내가 왜 한 겨울에 숲에 들어와 사냥을 하고 있냐고?
상술했던 이유로, 운터란트와 접경지역인 이 마을 내부엔 내 현상금 수배지가 쫙 깔렸다.
마을에 휴지보다 썩어나는 게 내 수배전단이더라. 똥 싸면 내 수배지로 닦고, 밥 먹을 땐 냅킨 대신 쓸 수 있을 수준이었다.
“후우.”
그리고 유리아와 루시의 조악만한 근력으로는 식량을 담아오는 데 한계가 있다. 덕분에 대부분의 식량은 내가 현지조달 해야 한다.
최대한 눈에 안 띄도록 숨어 사는 처지라 스킬도 함부로 못 쓰는 중이다.
“쯧.”
큰일났다. 오늘은 무조건 고기 먹이기로 약속했는데. 나는 두 여인네를 떠올리며 낮게 혀를 찼다.
이대로 가면 루시와 유리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또 건량으로 때워야 한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나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 돌아온 두 여자를 좀 기다리게 하는 한이 있어도, 숲에서 뭐라도 챙겨 와야 한다.
나는 세 자루 검과 부속장비들을 잠깐 점검했다. 점검을 완료한 뒤엔 곧장 숲 안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