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대륙력 1077년 10월 1일, 맑음]
수호 씨를 마지막으로 만난지 100년쯤 되었다.
나는 수호 씨가 말해줬던 디스트릭트10 계곡지역을 주기적으로 순찰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상류지역에 소환된 자드키엘을 목격했다.
―당신은... 인간인가요?
자드키엘은 하얗고 거대한 고치 안에 들어있었다. 주변에 둘러쳐진 붉은 결계 때문에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는 접근할 수 없었다.
대신 고치 안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미성이었다.
―아, 조심하세요! 그 결계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오려 하면, 끔찍한 악몽에 침식될 거예요.
자드키엘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디아나가 직접 만든 피조물. 그 칭호 때문에 긴장했던 게 허탈해질 만큼,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헥터가 건드리지 않은 4마왕은 원래 모두 이런 느낌인가? 가만히 다른 마왕들의 원래 모습을 상상해봤다.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간님, 저한테 이 세상의 얘기를 해주시지 않을래요?
자드키엘은 심심했는지, 내가 찾아올 때마다 연신 대화를 청해왔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신변잡기적인 얘기부터. 내가 고민하던 죄책감. 그리고 자드키엘이 소환되면서 떠맡게 된 사명 같은 것까지 들었다.
나는 그동안 어떤 사람에게도 열지 못했던 마음을, 마왕 자드키엘에게 처음으로 열기 시작했다.
―제가 가진 ‘피안의 악몽’은... 어머니가 남긴 망집의 결정체입니다. 제 사명은 까마귀님이 찾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이 물건을 지키는 거예요. 정말 위험한 물건이니까요.
만약 지키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의미도 없이 그런 걸 물어봤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악몽이, 전염병처럼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요. 한 번 악몽이 퍼지면 돌이킬 수 없어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세상이 찾아올 거예요.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언젠가 찾아올 까마귀님만이, 멸망의 신기를 찬탈해서 전염을 멈출 수 있지만.... 이미 악몽에 전염된 사람들은 모두 푸른 재가 되어 사라지겠죠. 그런 건... 까마귀님도 싫을 거예요.
나도 그런 미래는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그렇게 말했다.
자드키엘도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목소리를 떨었다.
그래. 이젠 그런 건... 지긋지긋하다.
[대륙력 1083년 10월 1일, 폭우]
실패했다.
자드키엘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자드키엘의 결계를 뚫고 들어갈 방도가 없었지만. 돌연 찾아온 십수명의 용사 소대가, 보란 듯이 결계를 통과했다.
그리고 하얀 고치를 갈라 그녀의 몸을 난자했다.
―악... 아악...! 왜, 왜 이러세요... 인간님들... 아, 안돼요...!!
그녀를 죽이면 안 된다.
끔찍한 재앙이 일어날 거다.
미친 듯이 결계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운터란트의 용사 소대는 제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피식 웃었다.
“알아.”
그런 말을 분명히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드키엘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로 무력했다.
―도망치세요. 도망... 어서....
자드키엘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그런 말을 했다.
그녀의 단말마가 아직도 귀에서 맴도는 것 같다.
[대륙력 1084년 1월 3일, 눈]
디스트릭트10의 전역에 원인 모를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거대한 곤충으로 서서히 변질되는 끔찍한 괴질이었다.
자드키엘의 말은 예언이 되어 버렸다.
[대륙력 1084년 2월 25일, 눈]
디스트릭트10 전역이 격리 폐쇄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곳은 디스트릭트10이 아니라 ‘망자의 계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유서 깊었던 유원지 ‘스키드 랜드’와 공장지대는 인적 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시가지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악몽의 한복판이었다.
[대륙력 1084년 6월 21일, 맑음]
운터란트 상층부의 평의회에서 거대한 공중요새 축성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역질을 일으키는 마왕’ 자드키엘을 토벌하기 위해서다.
고위평의회는 물론이고 시민들의 반응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
특히, 망자의 계곡 출신의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어떤 음식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륙력 1084년 8월 3일, 폭염]
망자의 계곡 중류의 시가지에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210명. 무려 200명이 넘는 비감염자를, 15세의 젊은 소년이 무참히 썰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흉기는 기역자 모양의 특이한 곡도. 마을 하나가 그것에 몰살당했다.
“죽여... 버린다. 괴물의 유충들은... 모두. 죽여야 해.”
소년은 호송용 마차에 처박히는 순간까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귀기 어린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어른거린다.
[대륙력 1084년 9월 13일, 흐림]
망자의 계곡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운터란트 상층부가 공식적으로 포기선언 했다.
동시에 공중요새 레비아탄의 건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륙력 1086년 2월 14일, 흐림]
‘오스올드 탐험대’라는 중앙정부의 파견대가 망자의 계곡에 찾아왔다. 비감염자를 색출해 이송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구조된 비감염자는 극소수였다. 이미 이곳의 대부분의 인간은 흑혈병에 감염되어 괴충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괴충화가 진행된지 3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의식이 살아있는 ‘특이 케이스’가 같이 이송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듀이... 듀, 듀라스... 살려줘. 무서워. 살려줘... 언제까지... 숨어야 돼? 들켜버렸어. 죽을 거야. 괴물이 돼 버릴 거야. 무서워. 나 너무 무서워. 살려줘. 듀이...!”
거구의 남자가 엎어져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을 얼핏 봤다.
왜일까. 나는 3년 전의 어떤 소년 하나를 떠올렸다. 끌려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내 눈엔 비슷하게 느껴졌다.
[대륙력 1091년 5월 1일, 흐림]
더 이상 이곳에 살아가는 이는 없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이들 뿐이다.
[대륙력 1092년 1월 1일, 혹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흑혈병 병자들이 자드키엘을 토벌하겠다며 망자의 계곡 심층부로 향했다.
원주민이고 용사고 할 것 없이 흑혈병 병자들은 전부 그랬다. 그들에게선 생에 마지막 불꽃다운 끈적한 광기가 느껴졌다.
“나라는 우리를 버렸다! 이젠 우리 손으로 마왕을 쳐죽이는 수밖에 없어!!”
“오오오오!”
그러나 대부분은 가는 도중에 괴충이 되었다.
그래도 희망을 부여잡은 소수는 진실을 목도했다. 자드키엘의 시신을 목격하고는 실성해서 제들끼리 싸우거나. 자기 목을 망설임 없이 찔러 자살했다.
끝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자드키엘의 붉은 결계에 억지로 몸을 들이 밀었다가, 그 자리에서 괴충으로 변이해 버렸다.
“자드키엘은... 이미, 죽었어. 벼, 벼, 병을 퍼트리는 건... 마왕이 아니라고...!”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이 하나 생겼다.
괴충화로 죽는 이보다 자살자가 더 많아진 요즘으로선, 정말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나라가, 운터란트가 우리를 속였어!! 빨리! 다른 병자들에게도 알려야 해...!”
같이 떠났던 수많은 일행 중 나머지는 전부 진상을 알고 자살해 버렸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직접 봤음에도, 그는 모두에게 절망적인 사실을 전파하겠다고 단언했다.
나는 궁니르로 그 사람의 심장을 찍어 눌렀다. 청년은 단숨에 납작한 쥐포가 되었다.
“끄... 허억... 왜, 왜...!”
그 남자의 단말마와 함께 진실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자드키엘. 당신 말 대로네요. 악몽 같아요.
악몽이네요.
[대륙력 1093년 1월 3일, 눈]
한 1년 정도, 좁은 골방에 틀어박혀 골똘히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망자의 계곡에 찾아왔고.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버렸다.
본인만 곱게 죽으면 또 모르겠다만. 자신이 처한 진상을 깨닫고 실성했는지, 죄없는 이들을 학살하거나 강간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요 1년 사이 깨달았다.
이 진실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세상엔 그런 진실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저주스러운 육체의 진실을 알았던, 그 때처럼 말이다.
[대륙력 1093년 6월 6일, 폭우]
비가 억세게 내리는 틈을 타, 칼테루스 선상감옥에 침입했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사람이 죽는 것을 막으려면. 내 계산으론 적어도 세 명이 필요했다.
계곡 하류와 상류는 통로가 너무 넓어서 셋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중류의 좁은 세 갈래 길이라면. 한 명이서도 충분히 길 하나를 수비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무력이 강한 이들로 선정해야할 건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점찍은 이들이 있었다.
‘인간사냥꾼’이라 불리는 듀라스. 그리고 ‘고독(蠱毒)’이라 불리는 모스크덴을 거기서 꺼내왔다.
두 사람 모두 기억에 있었다.
워낙 인상이 깊어서, 이 일지에도 똑똑히 적혀 있는 이들이었다.
[대륙력 1093년 7월 1일, 맑음]
나는 구해낸 두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 세상엔, 사람들의 희망을 짓밟고 부수려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
망자의 계곡에 찾아오는 놈들은 전부 그렇다. 안 아픈 사람들까지 괴물로 만들려 하는 나쁜 사람들이다.
우리 셋이서 힘을 합쳐, 그들을 막아내야 한다. 더 이상 선량한 사람들이 괴물이 되거나 죽지 않도록 막아내자.
“받들겠습니다. 여신이여.”
“그럴게. 내가... 사람들을 지킬게요. 여신님.”
두 죄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탈주용사’라는 이름으로 망자의 계곡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대륙력 1097년 12월 24일, 맑음]
그들은 나를 ‘여신’이라 부르며 따랐다.
대체 나 같은 게 왜 여신일까. 언젠가 모스크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를, 감옥에서... 빼내줄 때. 여신님은... 정말로. 여신님이었어.”
모스크덴은 뒤집어쓴 깡통 안에서 헤죽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그들의 여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곡 하류의 병자 마을에서 수녀님을 돕기로 했다.
자드키엘의 피에서 자라는 꽃을 달여, 흑혈병자들의 병을 억제하는 방법을 전수해줬다. 수녀님은 뛸 듯이 기뻐했다.
대의는 없다.
그냥 자기만족이다.
[대륙력 1102년 4월 5일, 비]
듀라스는 가끔 구시가지의 망한 극장에서, 홀로 피아노를 칠 때가 있었다.
피아노 위에는 에테르 축음기가 있다. 거기선 듀라스의 음울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 동요가 흘러나왔다.
―오늘 나는 캐서린의 아빠를 먹었네.
―캐서린 도망쳐. 멀리멀리 도망쳐.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도록.
―다음은 누굴까. 누가 우리의 식탁에 오를까.
―다음은 누굴까. 누가 우리와 친구가 될까.
굉장히 섬뜩한 동요는 항상 거기서 중간에 끊어졌다.
나는 듣다가 궁금해져서 “그래서, 그 다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듀라스가 그 날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는 까마귀 가면 안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말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신이여.”
항상 진지한 그답지 않은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슬쩍 웃었다.
“괴물의 유충은 제가 전부 잡아 죽였습니다.”
이어진 말에 웃음기가 싹 증발했다.
어떤 괴충보다도 끔찍하게 변모해버린 가련한 피해자. 그가 연주하는 우울한 선율을 뒤에서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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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1108년, 7월 13일]
까마귀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