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번외 4―1. 알테어 일지
[대륙력 6x3년 x월 1x일, 맑음]
“심란하면 일기라도 써보든가. 머리가 복잡할 땐 도움 된다더라.”
수호 씨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며 이 일지를 건네줬다.
파라이소의 전체 인구 9할 가량을 몰살시킨 주역치곤, 지나치게 태연했다.
평소엔 담대했던 헥터조차 마녀의 계승식 이후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는데. 이 사람만큼은 섬뜩할 정도로 변화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죠?
계승식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은 없나요?
나는 그에게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옳은 일이었고. 디아나가 원했잖아. 내 죄책감이 중요한가?”
그 대답으로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미 한참 전부터 완전히 미쳐있었다. 그러니 더는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강렬한 기억을 가장 처음에 남긴다.
마녀의 기사, 한수호만큼 인상적인 인물은 아직까지 본 기억이 없다.
[대륙력 6xx년 4월 1x일, 맑음]
슈엘츠의 무녀. 여신 프로피샤의 딸. 최후의 예언자. 그리고 마녀의 기사를 사랑한 여인.
“좋은 세상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노력해 주세요 알테어님. 그리고... 그 불쌍한 사람을, 너무 원망하지 말아줘요.”
많은 이명을 가지고 있던 루나 루에바가 그런 유언과 함께 죽었다.
나는 생전에 그녀가 남겼던 아리송한 예언들을 취합해 수호씨에게 가져갔다. 그녀의 부고를 들려주자 수호 씨는 딱 한 마디 했다.
“그래? 유감.”
수호 씨는 그 때도, 꼬마 마녀님이 갇혀 있는 대성당의 정문을 망부석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루나님.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부탁은 좀 지켜주기 어렵겠네요.
[대륙력 72x년 8월 xx일, 뇌우]
“그 때 세상은 멸망했어야 했어. 아신들이 옳았다.”
죽은 듯이 100년을 넘게 연명했던 내게, 어느 날 헥터가 찾아와서 그런 말을 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패악질을 일삼는 용사들뿐만이 아니다.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야. 하나같이 그 희생을 치러가면서까지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꼬마 마녀님의 계승식 이후로 칩거해 살던 나와 달리, 헥터는 새로운 세계의 안정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만큼 현재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게 많았을 거고. 대부분 안 좋은 부분을 봤던 것 같다.
“한수호는 이미 나와 갈라섰다. 요즘의 그놈은 전보다 한층 더 알 수가 없다. 멸망의 성흔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디아나만 쳐다보고 있더군. 이미 단단히 미친놈이야.”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 계획에 나를 동참시키려 했다.
“알테어. 함께하자. 나는 이 세계의 균형을 지킬 거다. 용사든 원주민이든, 심지어 마왕이라도. 아무도 이 뒤틀린 세상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서... 디아나의 수명이 다해 이 세상이 자멸하도록 만들 것이야.”
나는 헥터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 대신 나도 세상에 나가 보겠다고 했다.
우리가 부활시킨 이 세상을 직접 체험하고, 그 뒤에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겠다고 했다.
“후회할 거다. 알테어.”
헥터는 헤어지기 직전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을 좀 귀담아 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대륙력 891년 1월 x3일, 흐림]
나는 대륙 남방의 운터란트라는 척박한 나라로 찾아갔다.
거기서 루나님이 부탁했던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회복술사다. 내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어려운 이들을 도와가며 살았다. 하지만 마왕의 지속적인 출현으로 발생하는 기아와 난민은... 도저히 나 혼자 감당할 재난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운터란트의 정부에 찾아갔다.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전설 속의 존재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3용사 알테어님.”
내게 적합한 무기를 만들어줄 마도공학자로 ‘칼슨 오스올드’라는 이가 전담으로 붙었다.
‘궁니르’라는 대마왕 병기의 프로토 타입을 나로 실험하겠다고 했다.
“알테어님. 이 궁니르는 정말 강력한 병기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이 따릅니다. 신체에 많은 조정이 가해질 텐데, 무척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고 답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칼슨은 감명 받은 양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적을 멸살하는, 죽음의 천사가 되어주십시오.”
조정 작업은 들은 대로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감내해 냈다.
나는 어떻게든 헥터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수백 년 전 계승식 날.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비참함과 죄책감이 무의미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운터란트에 출몰하는 마왕을 무아지경으로 사냥했다.
어느샌가 나는 일반인들에게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선망과 희망을 보내줬다.
그 때만큼은 죄책감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대륙력 912년 9월 xx일, 폭염]
죽음이 임박했다.
이미 300년 가까이 살면서 내 몸은 노쇠할 만큼 노쇠했다.
헥터의 흑마법으로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나는 수호 씨처럼 꼬마 마녀님한테 불사의 몸을 직접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살아있는 몸에 구더기가 끓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그렇게 자위하면서 죽었으면,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테어님이 힘없는 이들의 희망으로 존속할 방법. 아직 딱 하나 있습니다만....”
왜 그런 선택을 해버렸을까. 왜 그런 말에 혹해버렸을까.
세상에 대가 없는 행복이란 어디에도 없는 법인 것을.
[대륙력 915년 7월 x1일, 흐림]
“이 일은 대외비니, 함구해주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알테어님.”
운터란트의 비공식 최신기술, 마도공학 인공신체로 노쇠한 몸을 교체했다.
책임자의 이름은 안톤 오스올드. 내게 궁니르를 만들어줬던 칼슨 오스올드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내막을 알게 된 계기는 실로 단순한 것이었다.
“아버지. 그럼 제38실험장은 언제 폐기할까요?”
육체 교환의 술식이 성공한 날.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두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살아있는 성공작이 있는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최대한 빨리 폐기해.”
“네. 그럼 당장 내일 폐기작업 착수하죠.”
“그래. 이번 실험 건은 잘 해줬다.”
“아닙니다. 이 나라의 모두를 위해서인걸요.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껴 그들을 곧장 추궁했다. 그들이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리려 하자, 무력행사에 들어갔다.
결국 두 부자는 인공신체 기술에 관한 모든 사실을 토해냈다.
내 육체를 완성시키는 데까지. 엄청난 수의 인체 실험이 자행됐다는 모양이다.
“요,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알테어님을 살리려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인공신체를 실험했다는 생체 실험장을 찾아갔다.
... 그 때 느꼈던 복잡한 기분을 서술하기엔, 필력의 한계를 느낀다.
“알테어님은 운터란트의 살아있는 희망이자 영웅입니다! 당신이 사라졌을 때, 운터란트의 시민들이 느낄 고통과 절망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운터란트에는 꺾이지 않는 희망의 상징이 필요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입니다...!”
내 옆에서 칼슨의 구구절절한 변명이 들려왔고.
눈앞에서는 팔이 아홉 개 달린 갓난아이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어미의 배를 스스로 갈라, 탯줄을 질질 끌며 우리에게 기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르륵. 그륵. 으아아앙!
아기가 목놓아 울며 어미의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한 순간. 이성이 끊어졌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칼슨의 잘린 머리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중간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괴성을 지르며 궁니르를 마구 발사했다. 실험장은 끔찍한 실험체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왕 사냥을 핑계로 운터란트 정보부의 눈을 빠져나왔다. 3일 전의 일이다.
일지를 쓰는 지금 깨달았다. 거기는 제38실험장이었다.
내가 목도했던 끔찍한 참상이 최소 37번 이상 되풀이됐다는 소리였다.
괴물.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괴물들 아래서 만들어진 나도 역시, 괴물일 테다.
[대륙력 977년 5월 19일, 맑음]
운터란트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숨어 살던 와중이었다.
마르크트레스와 미텔란트에, 사상초유의 재앙급 마왕들이 활개친다는 소문을 어쩌다 들었다.
언데드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꺼지지 않는 푸른 화염을 몸에 두른 채,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 청염의 마왕. ‘아스타르트.’
이미 그들의 손에 죽어가는 사람이 수천 수만을 넘어, 수십만 단위를 바라본다고 했다.
놀랍게도 나는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괴물과 괴물의 싸움으로 괴물들이 죽는 것에, 어떤 감흥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다만 이례적 마왕의 출현은 꼬마 마녀님의 신변에 변화가 있다는 소리였다. 나중에 수호 씨를 찾아가서 전말을 들어봐야겠는 생각은 들었다.
그는 지금도, 꼬마 마녀님이 잠든 대성당 앞을 묵묵히 지키고 있을 테니까.
[대륙력 982년 3월 14일, 흐림]
오랜만에 수호 씨를 만나러 멸망의 성흔에 찾아갔다.
멸망의 성흔. 마녀의 계승식 때문에 멸망한 신성국 슈엘츠를 부르는 이름이다.
신성국 슈엘츠 전역에는 ‘절멸의 안개’라는 저주가 걸려 있다. 세계 유지를 위한 계승장에 어떤 불순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녀님이 취해놓은 조치다.
“오우, 오랜만이네 알테어.”
평범한 인간은 안개 속으로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를 쏟고 죽어버린다.
하지만 꼬마 마녀님이 허락한 극히 일부는 아무런 탈 없이 드나들 수 있다. 나도 수호 씨도 헥터도... 그 중 하나다.
수호 씨는 여전히, 반쯤 무너진 대성당의 깊은 성소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디아나 만나러 왔냐?”
마녀의 기사라는 이명이 무색하게도. 사실 그는 기사보다는... 잔뼈 굵은 파수꾼 같았다.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파수꾼이라니. 역설적이라서 오히려 이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잡담을 좀 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수호 씨가 충격적인 말로 서두를 끊었다.
“디아나도 결국은 죽어. 최대한 오래 버텨도 앞으로 200년. 그 안에 죽을 거야.”
그리고 수호 씨는 꼬마 마녀님이 준비 중인 계승의식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가 말해준 계획은 현재 바깥의 상황과 큰 괴리가 있었다. 나는 불사의 마왕과 청염의 마왕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다닌다고 사실대로 말해줬다.
“엥?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걔네 분명 디아나가 착한 애들로 설정해 놨을 텐데?”
수호 씨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X발 뻔하구만. 헥터새끼가 또 X발 이상한 중2병 동아리 만들어서 개짓거리 쳐하고 댕기나 보네. 아니 그 새낀 언제 철드냐? 병신새끼.”
수호 씨는 단숨에 견적을 내리고 헥터를 쉴 새 없이 욕했다.
그러면 당신은 이젠 어쩌실 건가요. 나는 수호 씨에게 물었다.
“디아나가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나는 깜짝 놀랐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노골적으로 티가 났기 때문이다.
수호 씨가 꼬마 마녀님의 요청에 반하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기 때문이다.
“내 육체도 조만간 한계가 오거든? 그래서 디아나의 흑마법으로 베스타크에 의식을 깃들일 거야. 이렇게 만나는 것도 아마 이게 마지막일 거다. 매진임박 타이밍에 잘 왔어.”
그 말에 나는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마녀님에게 끔찍하게 집착하고. 일편단심으로 사랑해주던 루나님까지 헌신짝처럼 버린 그 미치광이를... 나는 꽤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직선적인 성격과 행보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호 씨의 올곧은 성격을 항상 부러워했다.
“앞으로 50년 뒤엔 용제국에 샤키엘이 소환될 거고. 100년쯤 뒤엔 마지막으로 자드키엘이 운터란트에 소환될 거야. 헥터가 개짓거리 못하도록 자드키엘이라도 네가 좀 지켜줘. 인생을 헛 살았는지 너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 아무런 인간사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또 세상의 명운과 관계된 일에 연루하라니. 죽어도 싫었다.
“...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아신들이 조력하고 까마귀도 있으니까... 헥터가 아무리 방해해도 어떻게든 될 거야. 나는 루나의 예언을 믿는다. 그 애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그러나 수호 씨가 지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나는 마지못해 그의 부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 생각보다 그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