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부당거래
그 뒤로, 레비아탄이 상주하는 운터란트 중앙지대까지 오는데... 대충 한 달이 좀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비아탄을 향해 상승하는 중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내부의 멤버 구성을 슬쩍 살폈다.
“.......”
휘둥그레 뜬 눈으로 연신 창문 밖을 살피는 유리아.
여독으로 지친 건지, 내게 업혀 잠든 루시.
그리고 기별을 받고 우리를 맞이하러 온 잭 오스올드까지.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하하핫. 역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들었습니다. 정말로 용사님께서 자드키엘을 무찔러 주셨다고요!”
잭은 전에 없이 해맑은 얼굴로 나를 귀빈대접 했다.
내가 자드키엘을 무찔렀다라. 뭐... 일단 세간에는 그렇게 공표됐으니. 나는 쓰게 웃으며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하하. 예... 뭐.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역시 용사님은 영웅이십니다! 용사님의 위대한 행보에 제 발명품이 조금이나마 공헌을 했다니! 대대손손까지 자랑하겠습니다!! 음하하핫!”
그는 입을 쉴 새 없이 떠벌거리며 내 칭찬을 했는데. 솔직히 엘리베이터가 반쯤 올라왔을 때는 고막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 새끼 분명 과학자 되기 전에는 LA에서 야구 했을 거다. X발.
“... 으으. 음.”
“....”
참고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다.
자고 있는 루시마저 악몽을 꾸는지 낮은 신음을 흘렸고. 옆에서 유리아는 먼 산을 보며 애써 이쪽을 무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오지게도 안 갔다. 여기는 정신과 시간의 방인가.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느렸던가.’
게다가 이 상황이 불편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꿈꾸는 소년처럼 반짝이는 저 면상도 거짓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속이 참을 수 없이 느글거렸다. 아침 먹었던 게 당장 올라올 것 같다.
나는 듣다못해 잭의 말을 끊어먹었다.
“잭 씨.”
“어, 예?”
“우리 남자대 남자로 까놓고 말해봅시다. 자드키엘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까?”
위이잉. 엘리베이터의 묵직한 기동음 속에서 잠깐 침묵이 오갔다.
잭은 안경을 슬쩍 고쳐 썼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순진하게 물어왔다.
“... 예? 비, 비밀이라니. 어, 어떤 비밀입니까?”
요 며칠 사이. 나는 사기꾼 새끼들 표정 읽는데 도가 텄다.
날카롭게 벼려 뜬 눈으로, 둥그렇게 뜬 잭의 황금색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건 거짓말로 나올 수 있는 표정이 절대 아니다.
“... 아뇨. 아닙니다. 그냥 한 번 해본 말입니다.”
“허어. 그, 그렇군요.”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나 봅니다. 빨리 좀 쉬고 싶네요.”
“죄, 죄송합니다. 하긴 방금 겨우 고된 여정에서 돌아오신 분인데.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잭은 그제야 좀 진정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자중하려는 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아까보다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피곤하실만도 하지요. 엄청난 사건이었으니까요.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거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다니. 가이서스 일대에 ‘창백한 목요일’이라는 별칭까지 생겼잖습니까.”
“... 창백한 목요일이요.”
“예. 직접 목격하신 용사님은 무슨 의미인지...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알죠. 알고 말고.”
참고로 내가 가이서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병자들이 죄다 푸른 먼지가 된지 며칠이나 지난 뒤였다. 때문에 비극 당일의 가이서스가 얼마나 혼란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갔을 때도 사람을 눌러 죽일 듯한 침묵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던 건 기억한다.
“.......”
때문에 문제의 ‘창백한 목요일’ 당시 가이서스의 풍경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온 할렘가가 새파랗게 물든 아름다운 지옥이었을 것이다.
‘내가 만든 거다.’
나는 우드득, 주먹을 부서질 듯이 쥐었다.
그게 옳은 일이었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든 간에. 병자들의 숨통을 끊고 사람들에게 ‘창백한 목요일’의 악몽을 심은 당사자는 일단 나다.
‘그래. 그러니까.’
나에겐 책임이 있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진실에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 나는 이 사건의 진상을... 이 사람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 잭 씨.”
나는 멍하니 엘리베이터 바깥을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잭은 설마 내가 말을 걸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화들짝 놀랐다.
“아 예? 왜, 왜 그러십니까. 용사님.”
“이건 그냥 제가 꿈꾼 내용이니까요. 절대 심각하겐 받아들이지 마세요.”
“아, 하하.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길래 그리 거창한 서두를....”
“당신은 운터란트한테 속고 있습니다. 흑혈병은 자드키엘이 아니라, 레비아탄을 건조시키기 위해서 이 나라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겁니다. 자드키엘은 오히려 그 역병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
나는 절대 농담 같지 않은 표정으로 세세한 농담을 주절거렸다.
쿵쾅대는 잭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이 강림했다. 나는 바싹 굳은 잭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얼버무렸다.
“꿈이라니까요. 뭘 그렇게 진지하십니까. 쪼크요 쪼크.”
“... 꾸, 꿈이요. 그... 그렇죠. 하하. 꿈... 꿈이 아니고서야. 하하... 요, 용, 용사님도 참. 그런 재미 없는 조크를...!”
팅. 청명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레비아탄에 도착했다.
나는 유리아와 루시를 데리고 곧장 나이트레아가 있는 상아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잭은 잠깐 생각에 잠겨 내 뒤를 쫓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 뭔가. 보거나... 들으셨군요. 거기에서.”
잭이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흘깃 뒤를 돌아봤다. 잭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왜, 왜... 그런, 알고 싶지 않았던 걸... 그런 재미도 없는 현실을. 제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용사님.”
잭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조금 싸늘하게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알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알 의무도 있다고 봅니다. 조또 모르고 푼수 같이 실실거리는 모습이 좀 암 걸리길래 그랬습니다.”
“.......”
“당신이랑 마음 맞을만한 사람을 두 명 정도 알거든요. 혹시나 이 족같은 나라한테 복수하고 싶다면... 제가 용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슬쩍 찔러보십쇼. 정보를 좀 드리겠습니다.”
“.......”
“아. 지금 제가 한 말들, 죄다 십덕새끼 라노벨 망상인 거 아시죠?”
나는 방긋 웃으며 잭의 손을 어거지로 쥐어 챘다. 강제로 악수를 나눈 뒤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잭이 처음에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내가 스칼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응원하겠습니다. 무슨 선택을 하시든지.”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잭은 여전히 멍하게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망부석 같은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가, 이내 뒤도 안 돌아보고 요새의 가도를 가로질렀다.
나는 어느 순간, 목청을 한껏 높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턴싸개 잘 썼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건 연구실에 반납하고 갈게요!”
나보단 이제 당신이 더 필요할 테니까.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레비아탄 북쪽 지역. 높게 치솟은 하얀 상아탑에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압축된 분노가 발걸음에 찐득하게 묻어나왔다.
* * *
일단 상아탑에 도착한 나는, 루시와 유리아를 입구 부근에서 대기시켜 놨다. 용건이 끝나면 언제든 바로 용제국으로 출발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잭에게 통보한대로 스턴싸개를 연구실에 돌려놓고. 곧장 끝장을 보러 나이트레아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이게 답니까 누님? 중력 100배 수련을 마친 박정용의 전투력을 너무 얕보셨네.”
나는 대차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 등 뒤로는 목과 몸이 따로 노는 강화슈트 병사들이 수십 구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업무용 책상에 훌쩍 올라간 채, 나이트레아의 목에 베스타크를 들이밀고 있었다.
“예 뭐. 내가 사실 쎄쎄쎄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당연히 알고 있죠 누님?”
지금 상황의 전말은 이렇다.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곧장 나이트레아한테 자드키엘 사살 결과를 보고를 했다.
중간부터 내 얘기가 뭔가 이상해진다 싶자, 나이트레아는 곧장 손뼉을 쳤다. 그러자 집무실 사방에서 운터란트 특공병사들이 광학미채 위장을 풀며 등장했다.
그래서 모두 쳐죽여 버렸다. 끝.
“환영식까지 준비해 놓은 거 보니. 이거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이곳은 유혈이 낭자하고 인간의 사지가 나뒹구는, 문자 그대로 ‘장기자랑’의 현장.
살벌한 배경 치고 우리는 지나치게 평온한 분위기였다. 협박하는 나는 물론이고 협박당하는 나이트레아도 마찬가지다.
‘나는 수틀리면 레비아탄을 추락시킬 각오로 왔으니 그렇다 치고.’
나이트레아는 준비해뒀던 암살 병력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이제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담이 센 년이었다.
“글쎄. 운터란트 최고위 기술관이라는 업무 특성상, 아는 극비사항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뭘 말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오히려 나이트레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발해왔다.
꿈틀.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나이트레아는 그런 내게 보란 듯이 어깨를 튕기며 말했다.
“말해봐. 신입 마녀사냥꾼. 무슨 안건으로 내게 역정을 내는 거지?”
“... 뭐라고?”
“이 요새를 띄우기 위해 흑혈병을 이용한 사안이 문젠가? 아니지. 자드키엘을 죽이면 흑혈병이 퍼지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 자체가 궁금한 건가?”
나이트레아는 두 번에 걸쳐 질문했고. 나는 두 번에 걸쳐 안색을 바꿔야 했다.
첫 번째는 알테어의 말이 결국 전부 사실로 드러나서 놀랐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안 그래도 추궁하려던 부분을 알아서 실토하길래 놀랐다.
“첫 번째는 간단해. 용사들을 제외한 모든 운터란트인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왕과 마족이 두렵다. 근 수백 년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왔어. 우리는.”
나이트레아는 태연하다 못해 냉정한 어조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나이트레아가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레비아탄의 건조에는 정말 막대한 자원과 인력의 희생이 필요했지. 그리고 희생이 이루어지려면 국가 단위의 결속이 필수적이다. 하층민들의 결속과, 자발적 희생을 끌어내기 위한 윤활유를 살짝 뿌렸을 뿐이야.”
“허어. 윤활유 이 지랄.”
“운터란트의 평의회 전원이 동의한 프로젝트였다. 우리를 수탈하고 핍박하고, 약자의 심정도 모르는 이계인 따위에게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 솔직히... 지금도 심히 불쾌해.”
나는 나이트레아의 파란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눈이어서 그랬다.
“흐. 흐흐.”
저 파란 눈동자만 붉게 바꾸면. 알테어와 완전히 똑같은 눈빛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징글징글한 사상범. 올곧은 광기에 찌든 시선 말이다.
어쩌면 저들의 눈에 비치는 나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드키엘과 흑혈병의 관계를 알게 된 경위는 더 간단하다. 생각을 해봐 신입. 알다시피 나도 마녀사냥꾼이잖아? 운터란트 정보부의 힘을 얕보면 곤란하지.”
뒤틀린 정의감이 번들거리는 푸른 눈으로, 나이트레아는 계속 떠벌거렸다.
“그냥 마녀의 계승의식과 관한 고대문헌을 이 잡듯이 뒤졌을 뿐이야. 네가 가이서스에서 찾아낸 유리아 루에바의 먼 선조, 루나 루에바. 그녀가 남겼던 예언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다 알게 되었다.”
그렇군. 루나 루에바.
성녀의 문장 아이템에 명시된 최후의 예언자. 유리아의 먼 선조라고 했지.
아스타르트의 동굴에 있던 석판. 마녀의 살해와 계승식에 대한 예언도 그녀가 했다고 했었다.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 건가.
“... 그것도 급하게 방주를 건조한 이유 중 하나겠네?”
“그래. 맞아. 우습게도 적랑은 마녀살해 의식의 정보를 자기가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던데. 아마 엘프리데 쪽도 웬만한 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다.”
“하.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네.”
“그 말대로야. 우스운 일이지. 어쩌면 우리 마녀사냥꾼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머저리 집단일지도 모르겠어.”
나는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나이트레아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나이트레아는 유유자적하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을 홀짝였다. 목을 가볍게 축인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드키엘의 결계를 성녀의 힘으로 뚫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땐 정말 놀랐다. 그 비렁뱅이 꼬마한테 그런 힘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운터란트의 상위용사들은, 뭐랄까. 편법을 써서 결계를 우회했거든.”
“... 편법?”
“여신의 신전에 있는 차원 거울. 그걸로 어떻게 한다는 소리는 들었다만... 놈들이 워낙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해서 정확한 매커니즘은 모른다.”
“자랑이다 새꺄.”
“뭐, 솔직히 용사놈들의 역겨운 사고방식은 알고 싶지도 않아. 서로 모르는 게 상책이지. 후훗.”
순간 눈이 부릅뜨였다.
웃고 있다. 나이트레아는 무려 악동처럼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이죽거리는 나이트레아의 입 쪽으로 칼끝을 겨누었다. 실로 번개 같은 칼놀림이었다.
“뭘 빠개 X발년아.”
웃음기 전혀 없는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욕한 건 이세계 전생 후 처음이었다.
“야. 웃기냐? 상황이 마냥 우습지. 내가 존나 상냥해 보이냐?”
나는 입매를 씨익 비틀어 올렸다. 순간 나이트레아가 입술을 콱 다물며 숨을 삼켰다.
내 표정에 깃든 찐득한 분노를 읽은 듯하다.
“평생 웃게 해줄게. 내가.”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움직였다.
서걱. 나이트레아의 왼쪽 입술이 귀 끝까지 찢어졌다.
“...!!!!”
나이트레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허겁지겁 왼쪽 볼을 싸매기 바빴다.
새빨간 핏줄기가 철철철, 그녀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럴 것 같았어. 잭은 몰라도 너는 몰랐을 리가 없지. 이 나라의 존나게 높으신 년이니까. 너 같은 컨트롤타워가 하나쯤은 있어야, 얘기가 앞뒤가 맞는다고. 응?”
나는 나이트레아가 고통에 떨 시간을 주지 않았다.
스르릉. 즉시 그녀의 반대편 볼에 베스타크 칼끝을 갖다댔다. 나이트레아는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통과 혼란이 범벅된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뇌까렸다.
“이번엔 반쪽짜리 조커 코스프레였지. 한 번 더 빠개면 반대편 볼따구까지 꿰뚫어서 인디언 추장님을 만들 예정이다. 허락없이 빠개지 마라 썅년아.”
“.......”
“알겠으면 고개 끄덕.”
내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하자 나이트레아가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만족하고 베스타크를 살짝, 아주 살짝만 뒤로 물렸다.
나는 안도하는 나이트레아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머리칼을 잡아당겨 강제로 눈을 맞춘 채 계속 말했다.
“내가 너 왜 안 죽이는지 아냐?”
“... 으, 윽?”
“적랑이 곧 기계팔 달러 여기에 오잖아. 개년이라도 기술자는 중요한 법이지. 응.”
“.......”
“이게 무슨 뜻이냐면. 행여나 나한테 쳐맞았다고 적랑한테 화풀이 했다간, 이 요새가 네 대가리랑 같이 땅 속에 처박힌다는 소리야. 알겠지?”
노파심에 일단 경고해 놨다.
나이트레아는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고분고분하니 좋네. 쳐맞기 전에 진작 그러지 X발년아.”
붙잡은 나이트레아의 머리통을 테이블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콰아앙! 나무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졌다.
“컥... 억.”
나이트레아의 이마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이내 그녀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나는 반쪽난 책상 위에서 훌쩍 내려왔다. 여전히 피를 콸콸 쏟아내는 그녀에게 상체를 가까이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서로 족같잖아?”
나이트레아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파란 머리칼을 슬며시 쓸어 넘겼다.
이내 쓰러진 나이트레아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갔다.
“저런 씨봉방년한테 맡길 생각을 했다니. X발. 내가 미쳤지.”
나는 유리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전에 생각했던 대로 유리아를 나이트레아에게 맡겨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잠깐만 그 말로를 상상해 봤다.
“으음....”
어두운 방 안. 인체실험의 실험체가 되어 온몸이 뒤틀린 유리아가 나를 돌아본다. ‘용사님... 놀자...?’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유리아.
안 돼. 그런 미래는 받아들일 수 없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래서 반려동물 입양 보낼 때 사람을 신중하게 고르는구나.’
동물이라곤 멍멍이 포함해서 식용 밖에 안 키워본 내가, 반려동물 브리더에게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성녀님이랑은... 좀 더 같이 다녀야 할 팔자인갑다.’
그래. 두 사람을 떠올리고 보니, 한가하게 걸어 다닐 때가 아니었다.
나이트레아가 정신을 차리면 나를 잡으려고 개발악을 할 게 분명하다. 수배령이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
짐짝의 구성이 1+1이 됐으니 추격을 뿌리치기도 분명 빡셀 것이다.
‘안 그래도 빡센 박정용 인생, 앞으로는 더 빡세지겠군.’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고. 곧바로 루시와 유리아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내 뜀박질은 금세 멈춰야 했다.
“... 음?”
루시와 유리아보다 먼저 내 앞길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잭이었다. 그가 상아탑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정보. 주십시오. 용사님.”
표독스럽게 번들거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문득 잭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 보니, 상아탑의 높은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 80년 전. 마지막 고룡이었던 이스그라드의 죽음으로, 고룡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는 말했다.
증오스럽다는 듯이, 발아래의 거대한 공중요새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이제 더는, 자드키엘 때처럼 구원을 바라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기생충 같은 강철의 드래곤을... 제 손으로 직접 추락시킬 겁니다.”
잭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전에 봤던 그 정중한 인사였다.
“제 선택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용사님.”
뭐랄까.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벅차올랐다. 결연한 잭의 얼굴을 보니 절로 뿌듯해졌다.
나는 실실 히죽거리며 똑같이 정중한 인사로 답례했다.
“알려드려야죠. 용사님의 부탁인데.”
나는 흔쾌히 잭에게 알테어와 스칼로의 소재를 알려줬다.
그 뒤론 일행을 데리고 서둘러 용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하늘을 빤히 쳐다봤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푸르고 드높았다.
“거, 죽으러 가기 딱 좋은 날씨네.”
여러모로 가슴이 답답했던 두 번째 의식이었다.
그래도 나쁜 년 면상에 칼빵 한 대 놔줘서 그런가. 새로운 용사의 탄생을 내 눈으로 지켜봐서 그런가.
잃은 건 많았어도, 나름 기분이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