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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30화 (206/280)

230화

내가 며칠에 걸쳐 가이서스에 도착할 때까지. 루시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아스타르트 때에 비해도 꽤 긴 수면시간이었다. 이틀이 지날 때부턴 슬슬 걱정이 들었지만, 딱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므로 속만 태웠다.

“으음....”

오히려 먼저 눈을 뜬 것은 유리아였다.

그녀는 병자마을을 빠져나와, 에라크마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눈을 뜬 상태였다.

“... 으?!”

유리아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엄청난 기세에 나도 모르게 식겁했다.

“아! 아아!”

유리아는 미친 듯이 사방을 살폈다. 이내 내 얼굴을 퍼뜩 마주하고 빤히 응시했다.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울상을 지으며 양손으로 내 볼을 마구 문댔다.

“으... 아! 으으!”

유리아는 무언가 전하고 싶은지 몸을 허우적거려 바디랭귀지를 시도했다.

나는 슬쩍 필기도구를 내밀었다. 그녀는 바로 받아들고 문자를 휘갈겨 내게 보여줬다.

[그 벌레는요?]

... 그러고 보니 유리아가 기절하기 직전에 본 게, 피안의 악몽이 내게 돌진하는 광경이었구나.

적혀 있는 문자의 내용을 한참 후에야 이해했다.

[괜찮아요 용사님? 벌레 어디갔어요???]

물음표가 세 개나 박혀 있다. 정말 많이 궁금한가 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줬다.

“먹었어.”

“으에!?”

“생각보다 맛있더라. 대가리는 반쯤 남겼는데 먹을래?”

“에엑!!!”

유리아의 안색이 단숨에 새파래졌다.

그녀가 입가에 손을 대고 퉤, 퉤 하며 뱉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내가 가만히 있자, 답답한 듯이 메모지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빨랑! 뱉으세요!!!]

느낌표가 세 개나 붙어 있다. 정말 많이 걱정되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유리아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뻥이야. 알아서 잘 처리했어.”

“아....”

유리아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볼을 부풀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장난에 속아서 화났나 보다.

나는 나중에 가이서스 일대의 꼬치구이 순례를 다녀주기로 약속해서 간신히 유리아의 화를 풀 수 있었다.

“가자. 가이서스로.”

“우웅.”

그렇게 유리아를 옆에 대동한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루시를 들쳐 업고. 며칠에 걸쳐 가이서스의 임시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는 임시거처에 들어가기 무섭게 눈을 떴다. 실로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우음.”

나는 퍼뜩 그녀를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길 가만히 기다렸다.

“으으. 머리가 너무 아프다....”

루시는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연신 비틀거리는 루시를 부축해주자, 그녀가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내 루시는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용사. 이젠... 몸은 괜찮으냐?”

“엉?”

몇날 며칠 기절했던 여인네의 첫 대사치곤 맥락이 없었다.

순간 이해가 안 돼서 나도 눈을 뻐끔거렸지만. 곧 루시가 쓰러질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전체적으로 양호하다.”

“... 다행이구나.”

루시가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미소를 보니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뭘 말해야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나답지 않게 잠깐 망설였다.

잠시 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야. 루시.”

“음? 뭐냐. 또 어디 아픈 게냐?”

“그게 아니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봐라.”

“뭐, 뭐냐. 꼴에 같잖게 심각한 얼굴로.”

나는 마녀 살해와 계승 의식에 관한 것을 루시에게 털어놓았다.

그 사이 유리아는 오가는 말이 이해가 안 돼서인지, 지루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다가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흐음.”

반면 루시는 딱히 표정변화 없이 내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루시는 잠깐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툭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미의 뒤를 이어서 그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세상이 끝장난다 이 소리냐?”

“잘 알아들었네. 그 소리다.”

“대충 이해는 하겠다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게냐? 뜬금없어도 유분수지.”

루시가 눈썹을 튕기며 되물었다.

지금까지 자기한테 상의도 안 하고 잘만 싸돌아다니다,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지랄이냐? 딱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루시의 붉은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결정하라고. 이대로 계속 내가 계승 의식을 진행할지. 아니면 여기서 멈출지. 네가 그만하라고 하면... 나도 더는 안 한다.”

“안 해? 안 하면 어쩔 게냐. 도망칠 게냐? 도망칠 곳은 있고?”

루시의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물론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걸 부정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그것도 방법이지. 그러면 마녀가 힘이 다할 때까지 도망치다, 전 인류가 손에 손잡고 최후를 맞이하겠군.”

“허어.”

“나는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아. 까짓 거 세상에 도움도 안 되는 좃간새끼들. 다 뒤져버리라지.”

“거 꼴에 용사라는 놈이 말하는 꼬라지 좀 보게.”

루시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잠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내게 툭 물었다.

“그... 계승식이라는 거. 아프냐?”

“... 낸들 아냐. 안 해봐서 몰라.”

“그러면 혹시, 어디 갇혀서 평생 골방신세로 살아야 하는 게냐?”

마녀의 계승식이 아픈지 어쩐지는 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니 모르겠고. 평생 골방신세는 맞을 거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마 맞는 거 같은데.”

아니면 마녀 디아나가 지금까지 두문불출할 이유가 없다.

분명 세계의 계승자를 위한 특수한 공간이 있을 거고, 마녀는 거기에 틀어박혀 지금도 검은 마력을 온 세상에 쏟아내는 것일 테다. 대충 그렇게 추론해서 설명해줬다.

―똑똑하네 정용이. 대답 잘 했다.

그 순간. 내 가설을 뒷받침해줄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디아나에 관해선 입이 무거운 수호 형님이, 웬일로 불쑥 끼어들며 내 가설을 긍정한 것이다.

―파라이소 대륙 정중앙, 멸망의 성흔. 디아나의 저주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신성국 슈엘츠의 대성당. 거기에서 지금도 의식의 매개로서 자기를 불사르는 중이지.

“... 오호. 그렇군요.”

―마녀를 죽이고, 계승식을 진행하려면. 결국 너와 불사의 마왕이 거기로 찾아가야 해. 디아나가 잠들어있는 대성당으로.

나는 수호 형님에게 들은 바를 루시에게 그대로 전했다.

루시는 이번에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퍼뜩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네놈과 나의 최종 목적지는 신성국 슈엘츠의 대성당? 그곳이 되겠구나.”

“그렇겠지.”

“설마... 나 혼자?! 그곳에 영영 갇혀 있어야 하는 게냐?”

“당연히 나도 가지. 나도 모르는 길을 너 혼자 어떻게 가려고. 너 개좁밥이잖아 인마.”

나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

마지막에 농담 겸 사족을 붙여서 루시가 길길이 화낼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방향으로 격하게 반응했다.

루시는 숨을 흠칫 삼키더니, 목소리가 조금 떨기 시작했다.

“그럼 네, 네놈이랑... 나랑, 다, 단 둘이?”

“그럼 또 누가 있냐. 네가 싫어하던 세스나나 설백도 데려갈까?”

“펴, 평생?”

“대타 없으면 뒤질 때까지 계속 해야지. 뭐 어쩔 거야.”

“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두, 둘이서 평생... 인가.”

의미는 똑같은데 멋지게도 말하는군. 무슨 결혼식 주례하는 줄 알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가 우물쭈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이다. 앞으로도 네가 유원지에서처럼, 그렇게 죽어가며 고통 받아야 한다면... 여기서 그만두라고 할 생각이었다.”

“... 흐음?”

내가 빤히 응시하자 루시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기분 탓인가. 하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그런 조건이라면... 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조건? 무슨 조건?”

“아니! 아니다. 그냥 해본 소리다.”

루시는 제 혼자 후련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루시가 낡아빠진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자기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아련하게,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어조였다.

“기절해 있는 동안에 말이다. 긴 꿈을 꿨느니라.”

“... 갑자기 웬 꿈.”

“자세한 건 나도 기억 안 나는데. 꼬질꼬질한 뒷골목의 꼬맹이들한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꿈이었다. 요리의 이름도 잘 생각이 안 난다. 이상한 꿈이었다.”

“.......”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건 크로스페이드에서, 루시가 잃어버린 기억의 이야기였다.

꿈이 아니다. 네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그런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의미도 없는 짓이기에 관뒀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이다.”

루시의 말이 더듬더듬 이어졌다.

“그냥 꼬맹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뻐졌다. 전염병처럼 웃음이 번지는 게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꿈속에서 나는 그 애들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말이다.”

“... 그러냐.”

“우스운 일이니라. 수많은 인간을 죽여온 내가... 그런 하찮은 이유로 꼬맹이들에게 홀려 버리다니. 이런 건,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도 몇 번이나 그렇게 질책했던 것 같다.”

“.......”

“하지만 꿈에서 깨고 나니 알겠다. 이상해졌으면 뭐 어떠냐. 이몸은 불사의 마왕 루시이니라! 원하는 것은 이루고,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다!”

루시는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하더니, 더없이 당당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나는 잠시 그 천진난만한 표정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병자의 마을에서 말이다. 초록 머리의 벌레 계집애를 봤을 때도 느꼈느니라.”

“...... 페니 말이냐.”

“응. 용사, 네가 루시라고 이름을 붙인 나는... 역시 그 작은 것들의 미소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스스로도 염치없음을 안다만. 지금 내 솔직한 마음이 그렇더구나.”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페니의 죽음을 루시가 모르는 게 다행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할 말은 없고, 괜히 손을 뻗어서 루시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러냐.”

루시는 처음엔 질색하며 거부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오히려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갖다 댔다.

나는 간신히 대가리를 쥐어짜내 한 마디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의 입에서 풋, 하고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 내 손등으로 슬며시 겹쳐왔다.

“믿고 있겠다.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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