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청앵(靑櫻)
글레이프니르는 이런 스킬이었다.
[스킬 정보]
[명칭: 글레이프니르]
[효과: 하나의 대상을 끝까지 추적, 반드시 속박한다. 지속시간 10초.]
[상세: 나이트스토커 직업스킬, ‘그림자 사슬’의 최종 진화형태. 직업스킬 ‘사냥표식’과 연계하여 사용할 시, 명계의 사슬들이 대상을 끝까지 추적하여 속박한다. 사슬은 스스로 힘이 다하기 전까진 어떤 수단으로도 해제할 수 없다. 레벨 증강은 불가하다. 재사용 대기 시간 30분.]
“오오.”
감탄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뭐야. 내가 방금 전에 떠올렸던 그림자사슬의 모든 단점들이 보완된 스킬이다!
나는 경악한 나머지 상세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직접 조종할 필요도 없고. 유도 기능에 저지불가까지? 완전 개미쳤네.”
다만 대상이 한 개체 한정이라는 단점과, 10초라는 지속시간의 한계가 생겼다.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고레벨 용사의 전투에서 상대 모가지 써는 데는 3초면 충분하다. 10초나 10년이나 똑같은 한세월이다.
‘사용처가 좀 달라지겠군. 이 정도면 대인전에선, 견제기가 아니라 필살기 수준이다.’
할센베르크에서 나한테 이 스킬이 있었다? 변경백을 농락할 수도 있었다. 베스타크로 변경백 머리랑 수염 깎아주고도 시간이 남았겠다.
... 아니. 그건 좀 과장이군.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변경백 투블럭 쳐주는 망상을 물렸다.
“자드키엘 클리어 보상은... 아스타르트에 비해 엄청 혜자스럽네.”
사망해도 기억을 유지하는 스킬까지 받고. 기존 스킬도 세 개나 강화되었다.
게다가 대폭 강화된 능력치와 히어로 센스까지. 낭낭한 주머니 사정에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렇게 혼자 히죽거리고 있자니.
“흐흑. 으흐흑....”
어디선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숨죽인 귀곡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누구인가. 누가 울음소리를 내었어.”
장난스럽게 말하며 다가갔지만. 울음소리의 주인을 눈에 담자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 하나가 유원지 광장에서 하염없이 우는 모습이 포착됐다.
* * *
“누구인가. 누가 울음소리를 내었어.”
나는 가까이 다가가 재방송을 해줬다. 사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창백한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유원지 구석. 먼지 앞에 엎드려 오열하던 붉은 머리 여인. 그녀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
예상대로 그것은 알테어였다.
나는 입을 닫고 알테어와, 그 앞에 푸르게 번쩍이는 먼지더미를 가만히 쳐다봤다.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청백색 먼지더미의 정체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스크덴과 듀라스인가.’
흑혈병의 진행을 억제하던 자드키엘은 내가 소멸시켰다. 그 여파로 감염자들이 저렇게 푸른 먼지로 변해버린 듯하다.
자드키엘의 시신이 그랬던 것처럼. 엘더리치를 죽였을 때, 할센베르크의 언데드들이 모두 먼지가 됐던 것처럼.
그들은 사실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 결말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내가 가서 당사자랑 잘 합의 끝내고 왔다. 잘했지?”
나는 알테어에게 다가가 일부러 도발했다.
그나저나 모스크덴은 외관부터가 흑혈병 감염자였으니 당연하다 치고. 듀라스의 시체도 안 보이는 걸 보니... 듀라스도 흑혈병 감염자였나 보다. 이건 좀 의외다.
“... 까마귀.”
알테어가 공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초점이 흐린 눈이 나를 응시했다.
나한테 뒤지기 직전까지 얻어터진 알테어의 면상은, 온통 부르트고 피멍이 들어 있었다. 곱상했던 이목구비가 잔뜩 일그러져서 사람 같지도 않은 몰골이었다.
“거, 꼴아본다고 뒤진 놈들이 살아나나?”
나는 한껏 인성질을 부렸다.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푸른 먼지를 만지작거리던 알테어가 움찔 떨었다. 물론 나는 주둥아리를 멈추지 않았다.
“왜. 죽은 동료들한테 막 미안함이 사무치냐? 너 때문에 죽은 거 같고 그래?”
“.......”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라. 걔네도 자기 의지로 널 도운 거잖아. 그냥 뒤질 짓을 했으니 뒤진 거야. 나한테 개긴 순간부터 사망 확정이지.”
“.......”
“에효 X발.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냐.”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인성질을 그만뒀다. 알테어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니 일부러 화를 참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내 말이 귓속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괜히 꼬장 피운 나만 머쓱해진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쯧.”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알테어의 앞에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나는 밤탱이가 된 그녀의 눈을 가만히 직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뭐라고 말해줄까. 미안하다? 아니면 유감이다?”
“... 필요 없어요. 지쳤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알테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만 가슴을 쭉 내밀었다.
완전히 체념한 기색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다는 행색이다.
“하.”
나는 짧게 웃었다.
파우치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확인도 안 하고 알테어의 주둥이에 쑤셔 넣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물의 에테르가 충전된 에테르 병이었다.
“넌 나한테 뒤지고 싶었으면.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어야 됐다.”
파아앗. 푸근한 푸른빛이 알테어를 감쌌다.
“으... 으?”
순식간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은 물론이고, 그녀의 찢어진 옷 속으로 드러났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씻은 듯이 회복되었다.
알테어는 놀라운 변화에 눈을 끔벅거렸다. 이내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까마귀. 대체, 왜...?”
나는 에테르 병을 회수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젠 나 죽인다고 개지랄 안 하겠다 싶어서. 이것이 유서 깊은 한국인의 정. 개평이다 새꺄.”
“... 개, 개평...?”
“참고로 개평에는 앞으론 도박한다고 깝치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충고의 의미도 들어있지. 이제 깝치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입을 닫았다. 더는 딱히 해줄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 어깨에 멘 두 여자를 제대로 들쳐 업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걸음을 떼기 직전. 알테어가 내게 다시 퍼뜩 말을 걸었다.
“그, 그게 아니라. 왜... 나를, 죽여주지 않는 건가요.”
“뒤지고 싶으면 알아서 접시물에 코박고 뒤지십쇼. 왜 나한테 지랄이십니까.”
“죽여주지도 않을 거면... 왜, 나를 회복시켜 버린 건가요.”
알테어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퉁명스럽게 시선을 돌려 눈치를 줬다.
내가 가리킨 곳은 오른쪽 어깨였다. 거기엔 루시가 침을 질질 흘리며 세상모르는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 마님이 죽이지 말라는데 어쩌냐. 앞으론 밥 처먹고 똥오줌 쌀 때도 루시 있는 방향으로 절하고 살아라.”
궁금해 하는 것도 다 대답해줬다. 쿨하게 등 돌려 걸어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나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아. 그래.”
몇 번째 생이었는지도 기억 안 나지만. 전생에서 알테어가 내게 심어 놓은 질문이 하나 있다.
당시에는 그냥 얼버무렸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의 대답을 피안의 악몽을 헤매다가 찾아냈다. 그래서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전에 네가 물었지. 마지막 선택에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 네? 아니요, 저는 그런 질문은 한 적이 없는....”
뜬금없는 내 말에 알테어가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사실상 혼잣말에 가까운 선언을 내뱉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울어준 루시가... 다시는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이것만큼은 확실히 진심이다.”
“... 아.”
알테어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내 어깨에 매달린 루시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스스로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얘가 마녀를 계승해야 한다면, 그렇게 만들 거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몇 번이든 대신 죽을 거다.”
“.......”
“몇 번을 죽어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서. 결국은 루시가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어.”
이미 죽어버린 첫 번째 루시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두 번째 루시든 상관없다.
둘 다 나를 위해 울어준 루시임은 변함없다. 내가 피안의 악몽 속을 헤매면서, 막바지에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은 그것이었다.
“그래. 첫째든 둘째든 뭐가 중요하냐. 맛만 좋으면 그만...... 이 말은 주워 담는다. 잊어버려.”
뭐 아무튼 요약하자면. 나는 이제 말 그대로 루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거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 당신은, 정말 뼛속까지. 마녀의 기사와 닮았군요. 까마귀.”
알테어는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입가에는 쓸쓸하고 씁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말에 나는 피안의 악몽 속에서 봤던 더벅머리 남자를 떠올렸다. 가만히 내 얼굴을 쓰다듬다가, 툭 말했다.
“솔직히 내가 훨씬 잘생겼지. 반박 시 꼴알못.”
“... 네?”
나는 의문이 담긴 알테어의 시선을 무시하고 병자마을로 돌아갔다.
“수고해라.”
솨아아―. 축축한 아침 바람이 계곡 상류에서 불어왔다. 짙은 안개를 훑어내며 화아악, 푸른 먼지를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눈앞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푸른 벚꽃 잎이 흩날리는 듯하다.
“대체 닮긴 뭐가 닮았다는 거야.”
―내 말이. 하핫.
얼마나 걸었을까. 나와 수호 형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동시에 말했다.
“척 봐도 내가 훨씬 낫구만.”
―솔직히 내가 압살하는구만.
그리고 동시에 침묵했다.
발끈해서 다시 따지기 시작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아니 형님. 양심은 라면 스끼다시로 끓여 처먹었습니까? 솔직히 이건 나지.”
―자기 객관화가 그렇게 안 되냐? 앞으론 손거울 필참해라 새꺄.
티격태격하는 사이 유원지를 벗어났다.
병자마을까지 이제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