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내가 무턱대고 아무 데나 들쑤시고 다닌 건 아니다.
이렇다 할 단서는 딱히 없었지만. 어떤 가설을 세우고서 움직이는 상태였다.
‘내 힘의 파편은 군대 기억 쪽에 하나. 그리고 고향 기억 쪽에 하나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나머지 공간인 화성 시가지 쪽에도 하나. 그리고 소망성당이나 고아원 쪽에도 하나는 있어야 사리가 맞다.
그래서 내가 지금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양아치걸 원투. 잠깐 나 좀 보자.”
인적이 뜸한 뒷골목에서 어슬렁대던 세스나와 설백이다.
내 부름에 세스나와 설백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앙?’ 하는 탄성이 어울릴 법한 불량소녀들의 얼굴이 내게 향했다.
“음?”
“... 흐응?”
그러나 험악하게 뒤틀렸던 표정도 잠시. 두 사람은 내 얼굴을 보더니 미묘하게 풀어진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이 교교한 미소를 지으며, 전회차 악몽 때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 오빠, 나 불렀어?”
“왜? 용돈 주려구?”
용돈은 무슨. 자취방 안 들르고 급하게 와서 지갑도 없다.
원래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던가. 뺏길 돈이 없으니 오히려 양아치 앞에서 당당해지는 내가 있었다.
“용돈은 모르겠고. 좀 묻고 싶은 게 있다. 협조해라.”
나는 두 사람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강압적으로 말하자, 두 여인은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빵 터뜨렸다.
“푸핫. 뭐라는 거야?”
“오빠, 정신 나갔어?”
세스나와 설백이 직후 무기를 꺼내 내게 겨누었다. 날이 바짝 선 전기톱과 기분 나쁜 해골지팡이가 한껏 가까워졌다.
서슬 퍼런 한기와 미묘한 열기가 서린 두 쌍의 눈빛. 할짝, 둘 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좀 내 취향이길래 오냐오냐 해줬더니. 선 넘네?”
“안 되겠네 이 오빠. 혼 좀 나자.”
혼내준다고?
나는 오히려 피식 웃으며 등에 멘 멸망의 대검을 힘차게 뽑아들었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에서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둘 다 ‘교육’이 필요할 것 같군.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지.”
내가 내뱉고 하는 말이지만, 철 지난 만화 주인공 같아서 좀 멋있던 것 같다.
나는 세스나와 설백에게 한 달음에 달려들었다.
“하아아압!!”
* * *
개털렸다.
나는 두 손을 번쩍 든 채 세스나와 설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닷씨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쇼.”
옷은 이미 죄다 털려서 빤스만 입고 있었다. 지금 세스나와 설백이 모든 옷의 주머니를 뒤지며 검문에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돈 나오면 10원에 한 대란다. 속으로 좀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숨겨진 돈 같은 거 없겠지...?’
참고로 우리의 장대한 싸움은 채 5분이 가지 않았다.
설백의 기룡 버프를 받은 세스나에게 일방적으로 탈탈 털렸다. 그 뒤론 세스나의 무쇠 주먹과 설백의 해골지팡이로 한참동안 양방향 찜질을 당했다. 우리의 싸움은 어느새 내 학창시절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태다.
“어허. 오빠. 손 내려가요.”
“넵. 죄송합니다.”
쏟아지는 경멸의 눈빛. 저려오는 팔.
압도적인 포상 속에서, 나는 자책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어리석은 박정용아. 힘이 반토막난 내 스펙으로는 버프 없는 세스나조차 못 이긴다. 세스나도 대략 레벨 200대 후반의 역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까먹고 ‘교육이 좀 필요하겠군’ 이 지랄이나 하고 있었다니. 통탄에 겨울 따름이다.
“으음. 이 오빠 근데 진짜 가진 하나도 게 없네. 알거지야.”
“오빠. 그 나이 먹고 돈 안 벌고 뭐했어요.”
두 사람은 그새 내 주머니를 다 뒤져봤는지, 실망스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뭐하긴 인마. 너희들이랑 이세계 거렁뱅이짓 하고 다녔지. 마음 같아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한 대 더 쳐맞을 거 같아서 얌전히 눈만 깔았다.
“에휴. 오빠. 일어나요.”
“옷 다시 입구요.”
세스나와 설백이 드디어 한숨과 함께 사면령을 내렸다.
나는 퍼뜩 일어나 신속하게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실로 비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옷을 입는 사이 두 사람은 귓속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어딘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인근의 편의점이었다.
“...... 음?”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둘이서 함께 편의점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이 틈에 전략적 후퇴를...!’
옳타꾸나 도망칠 생각에 신났던 나는, 이내 입가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져갔다.
철푸덕. 나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어째, 맨날 도망칠 생각만 하네.”
또 도망치면 이번으로 세 번째다. 원망 어린 두 사람의 비명을 다시 들을 생각하니 현자타임이 빡세게 와 버렸다.
그래. X팔 박정용 인생 노빠꾸 노퓨쳐 예스 상남자다. 꿈속에서라도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거다.
“어 뭐야. 졸렬한 오빠. 안 갔네요?”
“당연히 도망갔을 줄 알았더니.”
딸랑. 다시 나오는 세스나와 설백의 손에는 작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편의점에서 뭘 사온 모양이다.
이내 설백이 주섬주섬 봉지의 내용물을 꺼냈다. 뭔가 하고 슬쩍 보니, 마데카송 연고와 밴드였다.
“... 음?”
나는 의외의 물건이 나오자 당혹성을 터뜨렸다.
그러든 말든. 설백은 묵묵히 연고를 짜서 내 얼굴에 처덕처덕 바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세스나는 밴드를 까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자기들이 패서 난 상처에 그것을 붙였다.
“어디서 이렇게 맞고 다니지 마요. 괜히 내가 기분이 안 좋아지네.”
“아란까지는 안 붙여줄 거예요. 개긴 게 괘씸하니까 고통으로 참회하세요.”
병 주고 약 준다는 상황이 딱 이짝이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 게다가 이 분위기는 뭐지. 복날에 개 쳐맞듯이 맞은 건 난데. 왜 저쪽에서 나를 용서하는 상황이 됐냐.
“고, 고맙습니다.”
솔직히 어이가 털렸지만. 괜히 토 달았다간 또 쳐맞을 거 같아서 가벼운 감사인사만 날렸다.
나 이제 얘네 무섭다.
“후후. 고맙긴요.”
내가 짤막한 감사를 표하자 두 사람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내 봉지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또 꺼내들었다.
웬걸. 소주병이었다.
“오빠도 같이 마실래요?”
설백이 능숙하게 소주병을 돌렸다. 손목의 스냅으로 소용돌이를 만들더니, 팔꿈치로 병밑을 탁탁 치쳤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완전히 꾼이다.
‘뭐야. 여고생 컨셉 아니었냐.’
아 그래. 이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예. 존나게 말리네요. 한 잔 빨겠습니다.”
“후후. 자요.”
세스나가 싱글거리며 소주 하나를 나발 째로 내밀었다.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병을 받아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입에 닿는 촉감과 그립감이 뭔가 익숙하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 음?”
나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병을 자세히 봤다.
이제 보니 소주병이 아니었다.
에테르 병이다.
“어엉?!!”
화들짝 놀랐다. 미국 카툰의 리액션처럼 또잉, 하고 튕기듯이 일어났다.
스스스. 몸에 새파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세스나와 설백에게 맞았던 상처들이 빠르게 치유된다.
아까 병을 입에 갖다 대서 무의식중에 물의 에테르가 활성화된 것이다.
[악몽에 침잠되었던 힘이 일부 해방되었다.]
그리고 띠링,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어김없이 패널이 떠올랐다.
[스킬 해방: 아래 스킬을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세븐 소드 피어스, 그림자 사슬, 일섬, 강맹한 일격]
“허. 허허.”
이런 황당한 경위로 힘의 파편을 찾게 될 줄이야. 어처구니없음이 한계를 넘으니 헛웃음이 질질 흘렀다.
‘설마 처음부터 이 둘이 나한테 접근했던 건....’
이 이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냐?
죄책감이고 나발이고는 상관없고. 에테르병을 건네주기 위해 설계된 NPC였다고?
‘하. 그래 뭐... 결과적으로 얻을 거 얻었으니 됐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나는 대충 털어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물의 에테르 덕인지 한결 몸이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두 사람 몰래 골목 밖으로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요해요?”
문득 그 때까지 가만있던 세스나가 툭 물어왔다.
나는 퍼뜩 놀라 뒤를 쳐다봤다.
“음?”
세스나와 설백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가는 찡그렸는데 입가는 웃었다. 설백은 말없이 병나발을 불었고. 세스나가 술병을 툭툭 건드리며 취기 어른 목소리를 냈다.
“정용님이 지금 하는 일이요. 우리를 버리고 가야할 정도로... 중요한 거냐고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건 지금 꿈속의 상황을 두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6개월 전 마르크트레스의 일을 말하는 건가.
정확히는 알 수는 없다만. 나는 생각하던 대로 대답했다.
“중요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냐.”
“네...?”
“세상에서 나 밖에 못한다잖아. 그러니까 하는 거야. 거부해도 소용없는 일이면 거부한다고 힘 빼는 것도 귀찮으니까.”
루시를 처음 떠맡았을 때. 나는 똥털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덕분에 150번 넘게 죽었다 살아났고. 성격이 좀 매워졌고. 인간 박정용이 괴물 박정용이 됐긴 하지만. 박정용은 지금도 박정용이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이런 새끼였다.
“루시가 마녀의 자리를 잇지 않으면 세상이 둘로 쪼개진다잖냐. 내가 150번 뒤져봐서 아는데 말이야. 개똥밭 발발 기는 족같은 인생이라도 무조건 살아있는 게 낫더라.”
개똥밭 25년차 베테랑이 하는 말이다. 믿어라.
사실 나 자신은 노답인생이라, 세상이 두쪽 나든 말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내가 외면함으로서 설백과 세스나, 스칼로와 크라네이드. 그리고 루시 본인까지. 모두의 죽음이 확정된다는 건 상관이 있다. 상관이 많다.
“더 좋은 선택지 고를 기회도 있고. 수단도 아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
“병신이 별 게 아니야. 그게 병신이지.”
이런. 혓바닥이 길었다.
이런다고 빤스런 전과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뭘 꿈속 여인들한테 구구절절 변명하고 지랄이실까.
스칼로와 성당에서 대화한 뒤로 감성이 좀 센치해진 느낌이었다.
“너희들을 안 데려간 건... 너희들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내 약점이 되니까 그랬다. 그게 다야. 다른 이유는 없어. 응.”
나는 손절멘트와 함께 성큼성큼 그녀들에게서 멀어졌다.
손을 휘적여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나 해줬다.
“... 마지막엔, 정용님 본인도 웃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네요.”
문득 그런 말이 들려왔다.
세스나였다. 취기와 더불어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노력해본다.”
영양가가 전혀 없는 개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