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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17화 (193/280)

217화 와! 루시가 두 명!

우리는 전 이장 말대로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새카만 망토를 두르고, 싸늘한 핏빛 대검을 짊어진 채, 익숙한 고향의 야산을 오르는 22살의 박정용이라. 판타지와 현실 감성이 미묘하게 섞여서 기분이 묘하다.

‘꿈 전개 수준... X발.’

솔직히 나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이장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마왕을 잡으라니.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결국 우린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야 뭐라도 진행될 것 같아서 말이다.

“자, 손 잡아.”

“으긋...! 읏차!”

온 마을사람들이 죄다 모여서 그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최소한 악몽의 파편에 대한 단서 정도는 있겠지 싶었다.

이장이 잡으라 했던 마왕 루스티카의 정체가 뭔지도 좀 궁금하고.

“후욱. 하아....”

높은 산은 아닌데 생각보다 가파르다. 산을 중턱쯤 올랐을 땐 숨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든 자리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나는 이제 용사 시스템의 초인적인 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렸다.

한참 뒤로 쳐진 루시가 조금 화난 어조로 연신 볼멘소리를 했다.

“그 놈들, 켈룩, 미친 거 아니냐? 루스티카, 헤엑. 아스모데우스는... 후우. 여기 있다. 뭘 잡으라는 게냐 대체. 하악. 하아.”

말 하랴 숨 쉬랴 아주 바쁜 행색이다.

그녀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얇은 티셔츠도 물론이라 속살이 조금씩 비쳤다.

뇌쇄적인 살색의 향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거 알아보려고 가는 거 아니냐. 힘들면 너는 여기서 쉬어 그냥.”

“그럴 순 없다! 나도 그놈의 낯짝이 궁금하단 말이다!”

“그러심까. 조때로 하십쇼.”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결국 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널찍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인위적으로 깎아낸 티가 역력한 공터였다.

“흐음?”

자연스레 사위를 둘러보는 눈가가 좁아졌다.

내가 알기로 이 야산에 이런 공터는 없었다. 내 꿈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뜻이다.

“에고. 에고오... 죽겠다아.”

루시가 바닥에 나자빠져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갈무리하고 있자니. 문득 공터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퍼뜩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어?”

황급히 옆에서 골골대는 루시를 쳐다봤다. 분명히 루시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다시 공터 저편을 쳐다봤다. 하지만 문제의 신형도,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환각인가? 아니. 환각이라기엔 너무 선명하다.

“... 용사! 거기서 뭐하느냐.”

공터 저편의 신형이 그렇게 소리쳤다.

여긴 꿈이다. 무엇이든 등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저 모습으로 나온다니.

혼란한 와중, 환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니 더욱 확실하게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각인되었다.

“옆에 그 년은 또 뭐야!! 또 여자냐?! 비렁뱅이처럼 생겨갖곤 진짜 재주도 좋은 놈일세!”

루시와 똑같다. 아니, 그냥 루시였다.

하얀 머리칼과 세 개의 검은 뿔. 그 아래 창백한 피부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 순백색 원피스 뒤로 뻗은 앙증맞은 날개와 전선 같은 꼬리.

그리고 목소리. 나를 향해 소리치는 앙칼진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환각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진짜 또 하나의 루시였다.

내 옆에서 쓰러져 있던 돌핀 팬츠 차림의 루시... 이하 ‘돌핀루시’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너, 너... 는, 웬 년이냐?”

돌핀루시는 자기 앞에 다가온 또 다른 루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격렬하게 떨리는 것이, 적잖이 당황한 모양새다.

내 앞에 등장한 또 다른 루시... 이하 ‘원피스 루시’도 돌핀루시를 눈에 담더니 흠칫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당당한 몸짓으로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나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지금은 루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느니라!”

“뭣...!”

그 말에 돌핀루시도 발끈하며 벌떡 일어났다.

질 수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운 뒤 또 다른 루시를 마주 노려봤다.

“내가 바로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루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진짜 불사의 마왕이다!”

두 사람이 불꽃 튀는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한동안 소리없는 전쟁이 이어졌다.

불똥은 곧 나한테 튀었다. 두 사람의 새빨간 눈빛세례가 나를 향해 동시에 쏟아진 것이다.

“용사!”

“네가 볼 땐 어떠냐!”

“내가 진짜지?”

“아니다! 내가 진짜다! 그렇지?!”

두 명의 루시가 내게 얼굴을 바짝 가까이하며 눈빛을 이글거렸다. 그 자세와 어조까지 너무 똑같은 나머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X발. 하나여도 감당하기 힘든 루시가 둘이나 등장하다니. 정신 나갈 것 같아.

‘뭐, 어느 쪽이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골 때리는 사태이긴 하다. 하지만 마냥 나쁘게 볼 상황은 아니다.

덕분에 이거 하나는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둘 중 하나가 악몽의 파편이라는 소리군.’

지금껏 같은 인물이 복사돼서 나온 적은 단연코 없었다. 다시 한 번 똑같이 생긴 두 루시의 얼굴을 응시했다.

시선이 한없이 날카로워졌다.

* * *

똑같은 외형의 두 루시는 잠깐을 못 참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용사! 빨리 말해봐라! 둘 중 누가 진짜 같느냐!”

“내가 진짜다! 저 가짜년이 하는 말 듣지 마라!”

하긴 최근엔 내 조교(?)의 효과로 많이 순해졌지만. 원래 루시는 누구한테 지기 싫어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은 마왕이다.

그런 년끼리 문자 그대로 미러전을 뜨고 있으니. 싸움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누가 누구보고 가짜라는 게야! 이 못 생긴 년이!”

“뭣이! 네년이 더 못 생겼다! 이 돼지족발 같이 생긴 추녀야!!”

“뭐가 어째 이년아!”

“누가 먼저 했는데!!”

루시들은 불꽃 튀는 제 얼굴에 침 뱉기 배틀을 하더니. 이내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갸아악! 놔, 놔라! 생긴 것처럼 비겁하게 싸우는구나! 이 악마 같은 년!”

“누가 할 소리! 뿔 잡지 마랏!! 거, 거기는 약하단 말이다!”

“이이익! 이, 이렇게 되면!”

“더는 나도 봐주지 않겠다!”

두 사람은 표독스런 눈빛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시커먼 마력을 끌어올려 자기 몸을 감쌌다. 변신을 하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거의 동시였다. 생각하는 수준이 딱 도찐개찐이라는 반증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년아!!”

“바라는 바이니라!!”

화아악! 검은 마력을 빨아들인 두 루시가 변신했다.

거대한 뿔과 검은 날개. 땅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하얀 머리칼. 그리고 온몸에 검붉게 일렁이는 문신이 새겨진 완전체 루시가 둘이나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들은 기껏 멋지게 변신해놓고, 여전히 머리끄댕이 붙잡고 싸웠다.

“으아악! 이, 이년아! 놔라! 머, 머리 빠진다고!”

“으그윽! 너부터 놔라 이 무례한 년아!”

콰광, 쿠과광!

주변에 검은 번개가 몰아치고 충격파가 발생하며, 지축이 쩍쩍 갈라지는데. 정작 그런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루시들은 꼬집고 깨물고 할퀴고, 질척한 캣파이트를 벌이고 있다.

길어진 덕분에 잡기가 쉬워져서인지, 양쪽 다 머리칼을 집요하게 쥐어뜯었다. 세계관 최강자들 싸움 치곤 가슴이 웅장해지긴 커녕 옹졸해진다.

‘이건... 그, 그렇군.’

나는 그녀들이 벌이는 개싸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루시가 본격적으로 전투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한 번은 회귀점 강제 고정하느라 곧장 풀렸고. 한 번은 내가 미쳐가지고 정신을 잃었지.’

본 적이 없으니 그녀가 어떻게 싸우는지 알 수도 없고. 그래서 대충 ‘여자의 싸움’ 카테고리에 각인돼 있는 초딩 때 기억이 덧씌워진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루시의 변신에 대해 아는 거라곤 지속시간이 지극히 조루라는 점. 하지만 폭주하는 나를 막고, 배에 뚫렸던 상처까지 회복시킬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뿐이다.

“...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놓는 거다.”

“그, 그래.”

딴 생각에 잠깐 빠져있는 사이. 두 루시가 극적으로 정전협상을 타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 다 변신은 어느새 풀려있었다. 산발된 하얀 머리카락과 격렬하게 상하로 움직이는 어깨가 보였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굉장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묘한 긴장이 오가길 잠시. 두 루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한다. 하나....”

“... 둘.”

“셋.”

“.......”

“.......”

물론, 둘 다 상대의 머리카락은 놓지 않았다.

정전협상은 무위로 돌아갔다. 곧장 싸움이 재개되었다.

“갸아악! 이, 이년이 치사하게! 놓기로 했잖느냐!”

“미친년이 남 말하고 있네! 너도 안 놨잖느냐!”

두 번째 봐도 추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그만 좀 해라. 보는 내가 힘들다.”

보다 못한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변신이 풀린 두 사람은 내 완력에 의해 하릴없이 뒤로 물러나게 됐다.

“쟤가 먼저 그랬다 용사!”

“아니 쟤가 먼저 그랬다니까 용사!!”

아유 X발 유치찬란하다. 마왕유치원 해바라기반이냐.

내가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봐도 둘은 아랑곳 않았다. 여전히 적의를 활활 태우며 서로를 쏘아볼 뿐이다.

두 루시가 동시에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야멸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그래!”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뭔가 깨달은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도 동시에 내게 확 들러붙었다.

똑같은 얼굴의 백발 미녀 둘이 양쪽에서 접근하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래 용사! 역시 네가 좀 판단해다오!”

“내가 진짜 같느냐, 아니면 저 년이 진짜 같느냐!”

... 그래. 왠지 이럴 거 같았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전개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나는 잠깐의 고민 후에 한 가지 명안을 떠올렸다.

선현의 지혜를 이용하는 거다. 전래동화에서 해법을 찾아보자.

‘[옹고집전]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

성격 개차반인 옹씨네 부자 영감이 시주 받으러 온 도사를 모질게 학대했다가, 술법으로 만들어진 가짜 자신한테 지위를 박탈당하고 성격 고쳐먹었다는 얘기다.

그래. 분명 루시가 지금 처한 상황과 유사한 이야기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질문을 하자.’

루시 본인만이 알 법한 내용으로 질문을 하는 거다.

워낙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난다만, 옹고집전에선 그렇게 찐퉁을 판별하려 했던 것 같다.

뭐 동화에서는 결과적으로 판별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는 다르다.

“야 루시 원투. 잘 들어봐라.”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두 루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한테 총 세 개. 질문을 할 거다.”

루시 원투가 빨간 눈을 빛내며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잠시 후 고개를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갸웃, 기울였다.

“질문?”

“무슨 질문?”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아는 진짜 루시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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