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사평리 패왕 박정용
푸쉬익. 버스는 삽시간에 도착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들른지 5년이 넘어서 기억조차 어렴풋한 시골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허어. 진짜 내 고향이네.”
사방에 빽빽한 논. 겨울답게 모두 추수가 끝난 상태라 꽁꽁 언 농지만 널려있다.
겨울하늘은 파랗고, 집집마다 작은 텃밭이나 축사가 늘어져 있고. 구수한 풀냄새가 나고.
그리고 또....
“어우 X발. 소똥냄새 개오지고.”
이 X같은 냄새까지 그대로 구현됐군. 이건 굳이 구현 안 해도 되는데 말이야.
아무튼 현실감 하나는 끝내준다. 나는 논둑길을 걸어 논을 가로질렀고. 익숙한 지형을 따라 천천히 기억 속의 우리집으로 향했다.
“... 하나도 안 변했네.”
집 앞 마당에 도착하니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낡아빠진 파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집이 남아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의 구시대적인 건축물이었다.
‘장마 때 무너진 곳까지 똑같다.’
나는 얼기설기 덧댄 지붕의 흔적을 보며 쓰게 웃었다. 만들어진 가짜 세상이라는 걸 알아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끼이익. 특유의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나는 천천히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발걸음을 우뚝 멈춰야 했다.
“...... 너는 또 왜 여기에 있냐.”
이번에도 집 안에 불청객이 들어있었다.
자취방의 선례가 있어서 그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타난 인물이 인물인지라 한 동안 말은 잇지 못했다.
오히려 디비져 누워있던 불청객 쪽이 반가운 미소를 건네왔다.
“오. 왔느냐? 용사.”
“그, 그래.”
루시였다.
루시가 늘어진 티셔츠에 핑크색 돌핀팬츠를 입은 채, 새우과자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저 꼴은 또 뭐야.’
한동안 비주얼 쇼크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한 꼬라지라 그런지 굉장히 훌륭... 이 아니고. 이게 꿈이라는 걸 빡세게 체감했다.
“어우 X발... 정신이 확 드네.”
그리고 정신이 드는 건 둘째 치고. 시선이 자꾸 하얗게 드러난 루시의 허벅지로 향해서 문제다.
자중하자. 몽정할라. 나는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했다.
“아하핫. 정말 골 깨는지고... 아참.”
과자를 까먹으며 낄낄대던 루시. 그녀는 이내 더러워진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가에는 특유의 악동 같은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마침 잘 왔다 용사. 같이 가야할 데가 있으니 얼른 가자.”
“... 가다니. 어딜?”
내가 멍청하게 되묻자 루시는 퍼뜩 붉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얇은 셔츠 한 장 사이로 그녀의 서늘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디긴 어디냐! 뒷산에 이 마을의 패권을 쥐게 해줄 전설의 검이 있잖느냐. 풍문이 아랫마을까지 자자하거늘, 아직도 못 들었단 말이냐!”
“???”
X발 뭐가 있다고?
아니. 아무리 꿈이라지만 그건 너무 개막장 아닐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감도 안 온다.
‘우리 마을 패권을 왜 전설의 검을 뽑아서 결정하는데.’
내 고향마을의 장르가 여섯시 내고향이 아니라 반지의 제왕이었을 줄이야?
악몽의 파편아. 대체 내 유년시절 추억에 무슨 똥을 뿌리는 거냐.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뭐 어쨌든.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용사!”
나의 황당함은 아랑곳 않고 루시는 의기양양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우리 집 뒤편의 야산으로 나를 끌고 갔다.
“당장 뽑으러 가자꾸나! 28대 사평리 이장 자리는 이 몸의 것이다! 음하하하!”
“허허허....”
나는 하도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고. 이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디 갈 데까지 가봐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악몽의 파편에게 선전포고를 다지면서 말이다.
* * *
“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녀! 전설의 검이라니께 전설의 검! 와서들 뽑아 보슈!”
루시에게 이끌려 뒷산에 가보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모인 양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마을 이장님이 수금함을 들고서 사람들 사이를 돌며 판촉활동을 했다.
“한 번 도전에 5천원 5천원! 이장 자리가 탐나는 양반들, 한 번씩 뽑아보고 가들~!”
이걸 돈을 받고 앉았네. 자본주의의 하수인 같으니.
내 머릿속 이장님은 이런 이미지였나?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검이길래.’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가보니, 과연. 새빨간 대검 하나가 제단 같은 곳에 꽂혀 있었다.
야산 한복판에 뜬금없이 우뚝 솟은 제단이라. 실로 부자연스럽지만 ‘꿈이니까’라는 가불기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중이었다.
‘아니. 근데 저 검은....’
X발. 멸망의 대검잖아.
저거 왜 저기에 있냐. 황당한 나머지 제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긴... 저거 어떤 의미에선 전설의 검이긴 한데.’
나는 동네 뒷산 전설의 검 정체를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반면 루시는 홈쇼핑 보다가 지름신 강림한 아줌마마냥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내 소매를 붙잡고 마구 뒤흔들기 시작했다.
“생긴 것 좀 봐라! 아주 쌔끈하게 생겼구나!! 용사 용사! 나 5천원만 꿔다오!”
“어. 그래. 뭐....”
나는 루시의 재촉에 영 마뜩찮은 얼굴로 검 앞에 다가갔다.
스르륵. 어딘가에서 귀신 같이 나타난 이장님이 수금함을 불쑥 내밀었다.
돈 내라 이거다. 자연스레 내 표정은 한층 썩어 들어갔다.
‘가만 있어 봐라. 돈이....’
나는 조심스럽게 지갑을 꺼내 열어봤다.
만 원짜리 몇 장이 꽂혀 있었다. 유비무환이라고, 자취방에서 지갑 챙겨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이장에게 내밀었다.
“... 두 명분이요.”
“그려그려. 어른 둘. 만원 받았응께 한 번씩만 뽑아봐라잉.”
어른 둘이면, 어린이 요금은 또 할인해주냐? 가지가지 한다.
나는 줄선 사람들 뒤로 가서 대기했다. 가만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앞에서 연신 탄식이 들려왔다.
“아이고, 허리 나가겄네. 뭔 칼이 이래 깊게 박힌겨?”
“별 깊게 박히지도 않았구만 이 사람아. 엄살 피우지 말어.”
“쌔꺄 니가 와서 혀봐라. 이게 되나.”
낯이 익은 어르신 둘이 멸망의 대검 앞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다.
둘 다 어떻게든 뽑아보려고 연신 용을 쓰는데, 꿈쩍도 안 한다. 그냥 칼 손잡이만 애무하는 수준이었다.
“뭐로 붙여놓은 거 아녀?”
“황성웅이 저거 이장 되고 아주 기고만장해서 다니잖어. 그럴지도 몰러.”
두 사람은 수군거리며 갑자기 현 이장 디스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두 사람은 내가 어릴 때도 현 이장 아저씨를 드럽게 싫어했다. 그게 이런 방식으로 반영될 줄이야. 헛웃음을 흘렸다.
“아으. 긴장되는구나...!”
옆에서 루시가 눈썰매 기다리는 꼬맹이 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전설의 검 소동의 결말이 눈에 선해서 그냥 무시했다.
이윽고 삽시간에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먼저 의기양양하게 나간 루시가 멸망의 대검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뽑아 올렸다.
“끄응...!!”
창백한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안간힘을 쓴 루시였지만. 당연하게도 멸망의 대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시는 곧 손잡이를 놓치며 내 쪽으로 나자빠졌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잡아줬다.
“푸하아! 뭐, 뭐냐 이거 대체! 그리 깊게 박힌 것 같지도 않은데! 아고 힘들다....”
루시가 땀에 젖은 셔츠를 펄럭거렸다. 시선이 자석처럼 그쪽으로 가서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루시는 내게 지긋한 시선을 던졌다. 이제 내가 도전하라는 의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검을 뽑아 올렸다.
쑤욱. 멸망의 대검이 잘 익은 무 마냥 쉽사리 뽑혀 나왔다.
‘역시.’
아까 군부대에서와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애초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아이템. 내 힘의 파편이 분명했다.
[악몽에 침잠되었던 힘이 일부 해방되었다.]
그리고 띠링,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이번에도 패널이 떠올랐다.
[스킬 해방: 아래 스킬을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멸망의 화염, 연화, 어검술]
일단 내 밥줄 스킬인 연화가 돌아온 건 참 다행이었다.
그러나 후방타격이나 그림자사슬, 사냥 표식, 그리고 세븐 소드 피어스까지. 주력 스킬 중 대부분이 빠진 건 변함없었다.
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긴 하지. 나는 한숨과 함께 대충 납득했다.
“으, 어억?!”
내가 검을 뽑은 반향은 엄청났다.
루시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구경나왔던 동네 어르신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리고 신나게 수금하던 이장까지.
모두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놀라며 그것을 지켜봤다.
“거, 검이! 드디어 전설의 검이 뽑혔다!”
특히 이장이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뒷목을 잡고 연신 신음하는데, 소중한 돈줄이 뽑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오오. 28대 사평리 이장 후보가 정해졌다!!”
“이장님이시여! 이끌어주십시오!”
갑자기 주변에 있던 모든 노친네들이 내게 엎드려 절하기 시작했다. 불타는 패륜의 현장 중심에 선 나는 절찬리에 당황했다.
신나게 돈 빨아먹던 이장 할배까지 고개를 조아리자, 당황은 극에 달했다.
“아이고 차기 이장님. 저는 이장님이 검을 뽑으실 줄 진즉에 알고 있었슈!”
“이장님이시여! 이끌어주십시오!”
주변의 어르신들은 이장... 아니, 전(前)이장의 아부에 맞춰 연신 목청을 높였다.
‘아니 X발. 이끌긴 뭘 이끌어.’
우리 마을 이장자리 줘도 안 한다. 쇠고집 노인네 밖에 안 살아서 극한직업이다.
당신들은 배알도 없어? 이제 25살 처먹은 애새끼한테 그렇게 엎드려 빌고 싶냐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사태는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그 전설의 검으로 혹세무민하는 간악한 마왕을 무찌르고! 진정한 이장의 길을 걸으십쇼!”
“걸으십시오!”
덥석. 전 이장 할배가 갑자기 내 손을 쥐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뭘 무찔러요?”
“이 사평산 꼭대기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치고, 사평리 패왕의 자격을 증명하시는 겁니다 이장님!!”
“.......”
나는 루시를 흘깃 쳐다봤다.
내가 내 얼굴은 못 보지만. 아마 지금 루시처럼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