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나는 일단 자취방에 돌아온 상태였고. 전번 악몽의 상황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 그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이거지.”
아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존나 어이가 없네. 그런 미녀와 접점이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도 잊고 있었다고?
직후에 일어났던 룸메이트들의 핸드폰 해적질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랬나?
‘뭐... 거기서 일했던 게 전체적으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으니.’
하긴. 난 원래 불리하고 싫은 기억은 금방 잊는다. 팀장새끼와의 족같은 기억을 삭제하면서 뭉뚱그려 같이 잊어버렸던 걸 수도 있겠다.
지금 중요한 건 존재 여부도 불투명한 그 여자가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문제지.
나는 이름 모를 여자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일단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히 알았고.’
세상을 집어삼키던 까마득한 어둠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직전에 여자의 머리를 뚫고 나왔던 괴충도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미간에 짙은 골이 패였다.
“그 괴물....”
악몽이 일그러질 때 등장했던 거대한 벌레 형상의 괴물.
분명히 흑혈병 감염자들의 말로와 놀랍도록 유사한 느낌과 생김새를 가졌다.
이건 우연인가?
‘아니.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침음을 흘렸다. 대충 견적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거였구나. 괴질의 원인.”
멸망의 신기.
수호 형님에게 들은 바로는... 마녀살해 의식을 치를 때마다 까마귀에게 증표로서 부여되는 강력한 아이템이다. 멸망의 대검처럼 말이다.
그리고 흑혈병의 원인이 바로 이것. 자드키엘이 보유하고 있던 멸망의 신기, ‘피안의 악몽’이 아닌가 싶다.
‘자드키엘이 죽고 나서 역병이 시작됐고. 자드키엘의 시신과 피는 오히려 역병을 억제하는 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면 이런 추측을 할 수 있다.
애초에 자드키엘은 생전에, 이 아이템이 퍼뜨리는 악영향을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드키엘이 뒤져버리니 뭐가 된다?
‘뭐긴 뭐야. x되지.’
억제기가 터졌으니 악몽의 악영향...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괴질이 자라나는 꿈나무의 꿈처럼 무럭무럭 샘솟는다.
그 결과 25년이 지난 것이 지금의 망자의 계곡 꼬라지다.
‘그런데. 흑혈병을 운터란트 정부와 용사들이 이용했다는 건.’
놈들은... 모종의 이유로 전말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자드키엘을 죽이면 멸망의 신기인 피안의 악몽이 방치되고. 거기서 통제가 불가능한 끔찍한 역병이 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대체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에 레비아탄이라도 쳐들어가서 알아보면 될 일이다.
직면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차치하기로 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악몽에서의 탈출이니까.
‘나도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면 결국....’
피안의 악몽을 탈출 못한 내 말로를 상상하긴 어렵지 않았다.
언럭키 스파이더맨이 된 내가 항문에서 실을 뿌직뿌직 싸는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축축한 지네의 턱이 다시금 배를 핥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지 몰라.’
남은 파편은 이제 한 놈뿐이다. 확실한 상대를 특정해서 죽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슬며시 턱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문제는 악몽의 파편을 판별할 길이 전혀 없다는 건데.’
하지만 그렇게까지 불합리한 시험을 만들어놨을 리는 없다.
분명 성당에서 유리아가 줬던 힌트처럼, 뭔가는 판별할 단서가 있을 거다. 혹은 내가 직접 찾아야 하는 요소가 꿈속에 흩어져 있든가.
“결국... 일단 싸돌아다녀 봐야하나?”
시간 써가며 심사숙고 했지만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하긴. 어차피 죽어도 기억이 계승된다는 게 밝혀진 마당이다. 우물쭈물하다가 시간 다 소진돼서 죽을 바에야. 열심히 수색해서 뭐라도 남겨야 조금이라도 덜 죽겠지.
‘움직이자.’
나는 전번 악몽 때처럼 사시미칼 하나를 파카 안에 숨겼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상 위에서 나뒹굴던 지갑도 챙겼다.
‘돈은... 그대로 있군.’
세스나와 설백한테 삥 뜯겼던 돈도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이 정도면 진짜 혜자 조건이 맞다니까.
철컹. 현관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시가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내가 간절히 있길 바라면서,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악몽의 파편 등장 조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일단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와 가까운 인물이나 사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 관련도 없는 연놈을 내가 간절히 존재하길 바랄 리가 없으니까.
‘보자.’
나는 일단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뒤졌다.
그리고 곧장 다시 닫았다.
“옘병.”
죽은 아버지 번호 외엔 대부분 일 관련한 사람들 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일 관련한 사람들은 그렇게 안 친하다. 이 사람들은 일단 전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는 소리다.
‘엄마... 일 리도 없고.’
나 엄마 얼굴도 본 적 없는 패드립 면역자다.
딱히 그리울 건덕지가 없어서 보고 싶지도 않다. 내 인식 속에 가족은 애초에 아버지뿐이다.
“아 씨. 그럼 대체 누구냐고.”
나는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짜증을 부렸다.
혼자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꿈속의 화성 시내를 쏘다니던 와중. 문득 어떤 구조물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눈에 담은 것은 시내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버스. 도시. 이동. 여러 단어가 머릿속에서 합쳐져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요소를 떠올렸다.
‘이 꿈. 범위가 어떻게 되지?’
그렇다. 이 허상세계의 이동 가능 범위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일단 내 기억 기반인 이상 내가 모르는 도시 구현은 힘들다.
‘혹시나 있다 해도. 선입견이 왕창 들어가서 단편적으로 구현됐겠지.’
강원도는 철원 군부대 위주로만 구현됐을 거고.
전주 사람은 온통 한옥마을에서 비빔밥만 먹고 있다던지.
제주도 사람은 전부 한라봉만 먹고. 대충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디보자.’
버스 정류장에 다가가기 무섭게 정류장의 정보 패널에 시선이 박혔다. 노선별 버스 운행과 도착 예정 시각이 적혀 있었다.
[‘777 포병부대’ 행 280번 버스 / 정류장 진입 중.]
[‘고향’ 행 999번 버스 / 7분 후 도착]
[‘소망성당’ 행 12번 버스 / 12분 후 도착]
나는 패널을 한참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망성당은 있을 수 있다. 전번 악몽에서 이세계 양아치녀들(?)에게서 도주하다가 얼떨결에 들렀던 곳이 바로 저기다.
하지만 나머지 두 버스의 행선지가 문제였다.
‘... 고향? 777포병부대?’
지역 이름이 ‘고향’이다. 그런 지명도 있었나?
물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지명이다. 모르는 지명이면 꿈속에 나올 수가 없다.
‘777포병부대는 또 뭔데.’
저거 내가 전역한 부대다.
미쳤냐. 화성 시내버스가 왜 철원까지 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고향이라는 것도 특정 지명이 아니라....
“진짜 내 고향?”
내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끼기긱. 시내버스 한 대가 멈춰섰다.
문제의 777포병부대 행 버스였다. 얼굴이 모자이크된 엑스트라들이 내 옆에서 속속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한동안 엉거주춤하게 서서 버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학생 탈 거야? 말 거야?”
버스 기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온몸으로 재촉하는 기색이다.
이상하게 저 버스기사는 면상이 모자이크가 안 돼있군. 성질 더러운 양반이라 기억에 강하게 박혔는지도 모르겠다.
“씁....”
나는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일단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자리는 한산했다. 대충 중간에 아무 자리나 잡고 걸터앉았다.
‘너무 편의주의적인데.’
나는 달리는 버스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에 펼쳐진 풍경 때문에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버스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무저갱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뭐. 꿈속의 장소 이동이 원래 이런 식이지. 대충 그렇게 납득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우웅. 바깥 풍경이 손으로 구긴 것처럼 뒤틀리더니 천천히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버스가 멈출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종점입니다. 내리세요.”
정신차려보니 이미 버스는 도착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까 탔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가고,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좀 공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몸을 좀 움츠렸다.
“음... 음?”
나는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연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내 복장에 시선이 닿았고. 당황한 나머지 목청을 높였다.
“뭐, 뭐야 X발!”
어느새 내 머리는 빡빡 밀려 있었고.
복장은 군복으로 환복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