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정체를 읊었다.
“그, 유도원 알바? 우리 팀장새끼한테 스토킹 당했던?”
“맞긴 한데… 으. 그 얘긴 하지 말죠. 지금 생각해도 토악질 나와요.”
이 악몽 속 기준으로 몇 개월 전.
평택에서 배관조공 노가다할 때. 차량 유도원 알바로 잠깐 같이 일했던 여자다.
우리 팀장이 나이 40개 헛처먹고 성추행하는 거 막아줬더니. 일하다 마주치면 덕담 주고받는 사이는 됐던 것 같다.
‘이름이…’
당연히 기억 안 난다.
이세계 사출당한 지금 기준으론 최소 3년 전이다.
내 조악한 기억력으로 어떻게 기억하냐.
‘그 때 팀장이랑 싸웠던 이유가 이거였네.’
그 사건 뒤로 팀장새끼가 오지게 꼽줘서, 한 달쯤 버티다 대판 싸우고 내 발로 나왔었다.
덕분에 그리 긴 접점이 있지도 못했다. 오히려 지금 얘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게 더 신기하다.
“… 그 뒤로 정말, 연락 한 번도 안하더라고요? 저랑 말도 섞기 싫었어요?”
별안간 여자가 나를 불쑥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풀죽은 얼굴로 꿍얼거렸다.
나는 팔자에 없는 영업용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미인이신데…….”
“미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진짜 너무한다.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해주든가.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아니 진짜 아니고요. 사정이 있었슴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길래 다급하게 ‘박정용과 2인의 도적’ 사건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여자는 ‘이 새끼는 뭔 구라도 이렇게 성의없이 치나’ 싶은 표정으로 내 면상을 쳐다봤다.
결국 듣다 못한 여자가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 아니 오빠. 그걸 지금 믿으라고요?”
“믿으십쇼. 듣는 쪽도 그렇게 황당한데 당사자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아 진짜. 말이나 못하면…….”
“앞일 생각 않고 일부터 싸지르는 미친놈들 많습니다. 직접 겪어봤잖아요?”
그 말엔 여자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겠지. 본인이 당했던 게 있으니까.
내가 군대와 막노동판을 겪으며 얻은 인생 교훈이 딱 하나 있다면. 세상엔 정말 무수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상상도 못한 개병신이 득시글거린다는 것이다.
‘뭐 사람 5명이 모이면 1명이 미친놈이라고?’
개소리 하지 마라. 1명만 정상이고 나머진 다 미친놈이다. 한 놈만 건져도 천만다행이지.
나는 그런 점을 어필해서 내 말의 진실성을 호소했고. 여자는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쪽으로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술 사줘요.”
“예?”
“지금 저랑 술 같이 먹어주면 믿을게요. 그럼 됐죠?”
“…?”
살다살다 알코올 들어가면 믿음이 생긴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기독교에서 포도주 먹는 거랑 비슷한가? 기독교도면 인정한다.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일지언정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빨리 가요. 제가 분위기 좋은 가게 알거든요! 얼른!”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이미 내 팔짱을 걸었다. 그리고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 뭐라 표현하기 애매한… 좋은 냄새가 풍겨온다.
“어, 그… 잠깐!”
나는 그 향기에 취해 멍하니 끌려가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저지했다.
“오빠…? 왜요?”
“아뇨. 그…….”
왜긴. 이대로 끌려가서 오순도순 술 처먹을 시간이 없다. 내가 지금 시커먼 액체괴물이랑 뇌내 숨바꼭질 하느라 얼마나 바쁜데.
나는 대충 그녀를 떼어놓을 만한 말들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바쁘실 거 같아서요. 다음에 마시죠. 제가 나중에 꼭 연락해서 사드릴 테니까 걱정 마십쇼.”
모름지기 미인들은 다들 제 짝이 있기 마련이고. 크리스마스 시즌은 커플들 사이에서 2세 생산 프로젝트가 연중 최고조로 빡세게 실행되는 시기다.
아마 그녀도 생산 공정을 수행하기 위해 남자친구에게 출근하다가 나와 맞닥뜨린 것일 테다.
‘배려하고 있다는 걸 은근슬쩍 어필하면서, 저쪽의 거부감도 적어지게 한다.’
내가 아닌 상대의 사정을 들어 완곡하게 거절한다. 3년간 막노동판 구르면서 배운 몇 안 되는 처세 스킬이다.
하지만 여자는 내 말에 오히려 서운한 표정을 짓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 진짜… 눈치 없는 거 여전하네요 오빠.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거 맞죠?”
“예? 뭐가요.”
“크리스마스니까 같이 먹자는 거잖아요. 좀… 여기서 또 모른척하면 죽을 줄 알아요.”
“… 아.”
솔직히 거기까지 들었을 때도 뭔 소린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직후, 그녀가 대놓고 내게 들러붙었다. 그리고 발갛게 익은 얼굴을 팔뚝에 갖다대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달뜬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오늘 한가해요. 오빠.”
이거 아무리 봐도, 술을 연료삼아 나랑 협력해서 2세 생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싶다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지?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여자를 내려다봤다. 여자도 입술을 질근 다문 채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 하하하핫!”
이내 헛웃음이 터졌다.
여자가 의문스런 시선을 쏘아 보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웃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됐다. 나는 미친놈처럼 눈을 번득이며 중얼거렸다.
“고객의 니즈를 너무 잘 파악했는데. 악몽의 파편.”
내가 일하던 현장의 유도원 알바가 여대생일 수는 있다. 어디서 여자가 가면 꿀빤다는 소문이 도는 건지, 여대생들 돈 벌러 생각보다 자주 온다.
당시 우리 배관팀 팀장새끼가 스토커짓과 성추행을 했을 수도 있다. 원래부터 뭐 하난 터지겠다 싶은 시한폭탄 새끼였다.
내가 그걸 막았을 수도 있다. 그거 아니어도 난 팀장새끼 일거수일투족을 극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사실이라 해도. 내가 그 여자와 친해졌을 리는 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녀가 내 다음 일터와 같은 곳에 살았고.
심지어 내게 엄청난 호감을 품은 나머지, 연락이 일방적으로 한참 끊겼는데도 이렇게까지 대쉬를 해온다?
‘그야말로 내가 정말 존재하길 바라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것.’
과거에 구해줬던 미녀와 운명적인 재회?
개X팔 정용아. 십덕 망상 소름 돋는다. 이 정도면 병이야 병.
삼류 일본 라이트노벨도 이런 전개는 없겠다. 아무리 내 꿈이라지만 토악질 나올 지경이다.
“어딜 X발 약을 팔아.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새끼가!!”
나는 파카 안에 숨겨놨던 사시미를 꺼내들었다.
여자는 흠칫 놀라며 내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히잇. 공포에 찬 비명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오, 오, 오빠… 대, 대체 왜 그래요…? 그 칼은 뭐예요!!”
“문답무용! 마구니야 물러가라!!”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가슴에 사시미칼을 박아 넣었다.
용사의 괴력은 없더라도 이세계에서 사람 담그던 짬밥은 어디 안 간다.
푸직. 파육음과 함께 손맛이 찌르르 울렸다.
“아, 흑…!”
여자의 입술 사이로 아찔한 신음이 흘렀다.
사시미칼은 그녀의 여리한 살을 꿰뚫었고. 갈비뼈 틈새로 정확히 심장을 파고들었다.
손맛이 왔다. 이건 무조건 즉사다.
‘이걸로 마지막 놈! 끝났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패널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기분이 절로 좋아지던 찰나. 패널이 내 앞으로 떠올랐다.
[알림: 퀘스트 실패]
[무의식의 손괴가 발생했다. 악몽의 파편을 색출하는 데 실패했다.]
“… 어?”
퀘스트가 실패했다는 알림이었다.
당연히 성공 멘트가 나올 줄 알았던 나는 발아래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빠… 왜, 대체 왜… 오… 빠…….”
여자가 핏줄기를 입에 문 채 어렵사리 말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풀썩. 내 쪽으로 힘없이 널브러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삐빅, 삐빅. 연신 패널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알림: 첫 번째 악몽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알림: 모든 악몽이 재구축된다. 정신력이 소폭 마멸되었다.]
[알림: 악몽의 파편이 종식될 때까지 피안의 악몽은 되풀이될 것이다.]
“오빠… 왜, 대체 왜…!! 그, 그걱… 오… 브으거거걱…!”
그리고 죽은 여자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온몸이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급기야 얼굴이 반으로 쩌적, 갈라지더니. 탈피하듯이 거대한 지네의 대가리가 쑤욱 뽑혀나왔다.
나는 그 잔혹하면서도 익숙한 비주얼에 숨을 삼켰다.
“너, 너는…….”
괴충이다.
망자의 계곡에 득시글거리던 그 괴충들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키에에에엑!!”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온 지네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히어로 센스가 탑재된 용사 박정용은 진작에 무리없이 피했겠지만. 지구의 22세 막노동꾼 시절 박정용은 피할 재간이 없다.
“으으…!”
공포에 찬 비명은 중간에 막혔다. 퍼퍼퍽! 지네의 길쭉한 턱이 내 흉부를 잘근잘근 씹었다. 갈비뼈가 박살나고 장기가 헤집혔다.
끔찍한 고통이 몰아닥쳤다.
“으아아악! 끄아아아!!”
나는 괴성을 질렀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필사적으로 둘러봤지만. 웬걸. 어느새 꿈속 세상은 기괴하게 뒤틀린 상태였다.
‘이, 이건 또… 뭐야!’
하늘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스팔트 바닥은 엿가락처럼 휘었다.
편의점이 벽에 붙어있고 전신주는 하늘에 붙어있었다.
그나마도 까마득한 어둠이 사방에서 다가와 모든 것을 빠르게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세상이 지평선부터 온통 시커멓게 물들어 갔다.
“아니… X팔…! 지랄 마 X발!”
시시각각 끝이 다가오는 와중. 나는 하도 억울한 나머지 욕지거리를 연신 내뱉었다.
어둠이 몰려와 이름 모를 여자와 괴충까지 삼켜버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된 순간.
나는 유언처럼 외쳤다.
“이런 여자가 진짜 있다니 말이 되냐?! 구라치지 말라고 X발아!!”
진짜일 줄 알았으면 이름이나 좀 들어놓을걸.
그러나 후회는 늦었기 때문에 후회다.
모든 것이 까마득한 어둠에 삼켜졌다.
* * *
어느 순간,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뜨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 어, 응? 으음?”
당황의 탄성이 절로 터져나왔다. 3단콤보로 나왔다. 그만큼 황당했다.
데자뷰 느껴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바로 지금이다.
“어… 아니.”
뭐지.
나 방금 퀘스트 실패해서 죽은 거 아니었나? 왜 처음 눈떴을 때랑 똑같은… 화성 시내의 풍경을 보고 있는 거지.
의문에 빠져 있던 내 앞으로 삐빅, 어김없이 패널이 떠올랐다.
[알림: 두 번째 악몽이 시작되었다.]
[조건1: ‘악몽의 파편’ 사냥 (2/3) ― 미충족]
[조건2: 24시간 내에 게이트를 열고 악몽에서 탈출 ― 미충족]
[보상: 멸망의 신기 ― ‘피안의 악몽’ 소유 자격 부여.]
나는 그제야 직면한 상황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둠에 삼켜지기 직전 눈가를 스쳤던 패널 하나를 떠올렸다.
[알림: 악몽의 파편이 종식될 때까지 피안의 악몽은 되풀이될 것이다.]
오케이. 이해했다.
첫 번째 악몽의 종식이 실패로 끝나고. 지금 두 번째 악몽이 시작됐다는 소리다.
‘꿈속에서까지 무한회귀냐.’
아주 징글징글하다.
심지어 이번엔 퀘스트를 깨기 전까진 탈출조차 못한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나는 새롭게 뜬 퀘스트 패널을 쳐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네. 허허.”
일단 사냥했던 악몽의 파편이 다시 생성되진 않는 듯하다. 게다가 고맙게도 전번 악몽의 기억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무렴 이 정도면 개혜자지. 맥스까지 치솟은 내 흑우력에 건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