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유리아가 결계를 파괴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들었다.
처음 한 장은 30분 정도 경과하자 아무런 무리없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벽을 파괴하는 데는 전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들었고. 완전히 파괴가 끝난 뒤엔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악… 하아. 하아…”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는 유리아. 질끈 감긴 눈꼬리 밑으로 검붉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우… 흑.”
검은 눈물. 헥터 카사스와 엘프리데가 강력한 흑마법을 사용할 때 나오던 그것이다.
왜 그녀가 검은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뭔가 잘못됐나 싶어 나는 안절부절 했다.
―흑마법 결계의 영향이군. 쟤 정도의 스펙으로는 신체에 부담이 많이 가겠지.
괴로워하는 유리아를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수호 형님이 중얼거렸다.
자기 먼 후손이라 그런가. 유리아의 행동에는 유난히 형님이 감상을 말하는 경우가 잦다.
“쓰읍…”
그럼 유리아가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 나는 뭘 했냐고? 피의 웅덩이에 좌판 깔고 앉아서 진득하게 기다렸다.
정확히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형님. 마법의 ㅁ자도 모르는 저는 무얼 할 수 있죠?”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팝콘이나 가져와라 정용.
“씁.”
씁쓸해하던 형님마저 그렇게 일축했다. 그러면 진짜 할 일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유리아의 임시 고용주로서 그녀가 몸을 혹사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그쯤에서 유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잠깐 좀 쉬자. 고생했다.”
“… 아.”
초점이 흐려진 유리아의 하얀 눈이 내게 향했다. 억지로 괜찮은 척 웃으려는 얼굴이 퍽이나 처량했다.
나는 쉴새없이 흐르는 검은 눈물을 흑익으로 대충 닦아줬다. 유리아는 입을 꾹 닫고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
“…”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쪽이 벙어리니까 당연한가?
사방에서 자욱하게 찔러오는 비릿한 혈향. 그 한복판에 주저앉아 유리아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자니. 나는 문득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나는 멍하니 유리아를 쳐다보다가 툭 물었다.
“성녀님. 만약에 말인데.”
“…?”
“내가 싸움을 하던 와중에 말이야. 네가 말려 들어서 나대신 죽었다고 치자. 그것도 온몸이 번개로 지져져서, 어디 대족장님처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튀겨졌단 말이야?”
“으에??”
유리아는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도 표정을 현란하게 뒤틀었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 들었다는 얼굴이다.
나는 뒤늦게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이라고 첨언하며 헛기침을 했고.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갑자기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칵 죽어버린 거지.”
“… 흐응.”
“그런 상황이 생겼다면. 너는 왜 미안하다고 했을 거 같냐?”
내가 하는 말이 개미친 쌉소리로 들릴 것쯤은 나도 안다.
근데 궁금한 걸 어쩌냐. 지금처럼 휴식시간 아니면 또 언제 물어볼 기회가 있겠는가.
‘미친놈 취급을 받더라도 이건 해결해야겠다.’
그냥 넘어가기엔… 그 때 유리아의 최후는 마음에 너무 걸렸다.
얼마나 마음에 걸렸으면 내가 그렇게 흑화를 했겠냐.
“… 으음.”
유리아는 낮은 탄성과 함께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검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걸었다.
나는 재빨리 유리아에게 필기도구를 건넸다. 그녀는 슥슥 경쾌한 손놀림으로 글자를 써서 내게 내밀었다.
[셋 중 하나겠네요.]
객관식 문제냐. 루시처럼 ‘나도 모른다’는 아니니 다행이군.
나는 반사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 선택지가 뭔데.”
유리아는 거침없이 그 대답을 적어나갔다.
세 개의 작은 메모지가 그녀의 양손에 들려 동시에 다가왔다.
[괴로운 경험을 겪게 해서 미안하거나.]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거나.]
[아니면 둘 다겠죠.]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원래 무슨 대답이 나오든 대충 농담으로 받아칠 생각이었는데. 모가지가 턱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대신 유리아가 연신 펜을 놀려 글자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죽어가던 붉은 머리 여자를 지나칠 때는요. 슬펐어요.]
[용사님이 웃는데도 힘들어 보였어요. 그런데 도움이 될 수 없어서, 슬펐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기뻐요.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유리아는 그 뒤로도 봇물 터진 양 계속 쪽지를 들이밀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컨테이너로 끌려왔을 때. 그리고 자드키엘을 죽인다고 단언했을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괴충들을 무표정하게 태워죽일 땐, 내가 괴충보다 무서웠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적어서 건넸다.
벙어리라 못 전했던 감정들을 지금 모두 쏟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는요.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님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유리아가 그런 쪽지를 내게 건넸을 때. 어느덧 그녀의 눈에서 흐르던 검은 눈물도 멈춰 있었다.
내가 퍼뜩 손을 떼자 유리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더 건넸다.
[제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동화 속 용사님처럼 나타나준 사람이라 그렇겠죠.]
나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웃음이 입 밖으로 질질 흘렀다.
“… 뭐, 너도 나쁜 사람은 아닌갑다. 지금 날 도와주고 있잖아.”
푼수처럼 실실거리며 유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피바다 속에서 때아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자니. 삐빅, 하는 시스템 효과음이 산통을 박살냈다.
[스킬 성공 ― 에테르 수집(패시브)]
[일정 시간을 충족하여, 물의 에테르를 에테르 응결병에 수집하였다.]
[다음 에테르 생성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웬일이냐.’
벌써 에테르를 비운지 3시간이나 지났나.
이놈의 에테르가 필요할 때 필요한 속성이 나와준 건 거의 처음이다. 좀 놀랐다.
오랜만에 찾아온 물의 신의 호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곧장 에테르 병을 들고 유리아의 입가에 가져갔다.
“성녀님. 잠깐 입 좀 벌려봐라.”
“에… 어윽.”
나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에테르 병을 그녀의 입에 집어넣었다.
우우웅. 새파란 기운이 유리아의 온몸을 휘몰아친다. 처음 겪는 조화에 눈을 부릅떴던 그녀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 와아.”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팔팔하게 움직이는 유리아.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테르 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의문에 답해주기엔 너무 얘기가 길어지니 스킵하고. 나는 자드키엘의 시신을 가리키며 눈썹을 튕겼다.
“이제 마지막 하나. 부탁한다.”
“… 아!”
유리아는 그제야 에테르 병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결계의 파괴작업에 착수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다시금 집중했다.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자 마지막 새빨간 안개의 벽이 아스라하게 실체를 드러냈다.
콰창, 파창! 안개의 벽은 이번에도 가장 위쪽부터 서서히, 확실하게 붕괴해갔다.
* * *
[조건1: 결계 ‘피안의 미궁’ 돌파 ― 충족]
결국 그 패널이 뜨기까지는 그 뒤로 수 시간이 더 걸렸다.
짙은 안개 위로 보이는 하늘에는 별빛이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날이 밝고 있는지 옅은 감색을 띄고 있다.
“허어. 쫄따구, 완전히 뻗어버렸구만.”
루시는 피의 웅덩이 바깥에서 탈진한 유리아를 부축한 채 서있었다. 기진맥진한 유리아를 쿡쿡 찔러보던 루시가 문득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결계의 안쪽… 자드키엘의 시신이 있는 고치에 코앞까지 다가간 상태였다.
“용사. 그… 조, 조심하거라.”
루시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한 마디 했다.
거 새끼, 맨날 저렇게 귀염성이 있으면 갈굴 일도 없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알았다는 제스쳐를 보냈다.
“너도 이번엔 진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후딱 끝내고 국밥이나 말아먹자.”
“… 훗. 오냐. 그러자꾸나.”
나는 루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흑익을 사용해 하늘로 치솟아 고치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고치에 가까이 갈수록 확실히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고치의 내부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나는 고치에서 콸콸 쏟아져 내리는 핏줄기로 시선을 내렸다.
“크. 토 쏠리네 진짜.”
새빨간 피가 타원형의 고치 안에 한가득 고여 있었다. 그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알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알? 아니면 눈깔? 잘 모르겠다. 숨이 턱 막힌 나머지 중얼거렸다.
“저, 저게… 뭐야.”
새빨간 피의 웅덩이 안에서, 지금도 연신 뒤룩뒤룩 굴러가고 있는 거대한 알. 그것이 자드키엘의 시신보다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일단 비주얼적으로 워낙 쇼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는데. 눈을 떼지 못하자 어김없이 미미르의 눈은 발동되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피안(彼岸)의 악몽]
[보정치: 극의에 달한 스킬의 최종강화. 스킬 ‘피안윤회’ 습득.]
[상세: 마녀의 꿈과 추억이 깃든 멸망의 신기. 마녀가 목도한 최후의 악몽을 만방에 전파한다. 소유권을 획득 시, 마스터 레벨에 달한 스킬 중 숙련도가 가장 높은 스킬을 최대 세 개까지 최종강화 한다. 소유 시 고유스킬 ‘피안윤회’를 습득한다.]
‘저게… 피안의 악몽?’
두 번째 의식 퀘스트가 말한 특수던전이 바로 저것이었다.
또한 그 자체가 멸망의 신기 이름이기도 했다. 저게 의식을 마치면 받을 보상이기도 하고, 의식을 진행할 던전의 입구이기도 하다는 소리였다.
“아니 그런데, 대체 뭘 어쩌라고…?”
진짜 칼로 째서 비집고 들어가면 되는 건가. 알이 좀 거대해서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럴 리는 없어 보인다.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의미없이 거대한 알이랑 눈싸움이나 하며 안절부절하고 있자니.
두둥. 패널 하나가 내 앞으로 떠올랐다.
[알림 ― 악몽으로의 초대]
[피안의 악몽이 내뿜는 인력에 강하게 노출되었다. 10초 내로 영향권을 벗어나지 않을 시 악몽의 초대에 자동으로 응하게 된다.]
번득.
문득 알에서 거센 맥동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흡인력이 나를 매섭게 끌어당겼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한껏 움츠렸다.
‘이 느낌은…!’
물리적인 끌림이 아니었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빨려드는 듯한, 흡사 최면에 빠지는 감각이 일순간에 전신을 옥죄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사납게 웃었다.
“… 뭘 10초나 기다려. 바로 입장한다.”
두근. 내 선언과 함께 심장이 일순간 멈췄다.
주변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득한 추락감이 온몸을 감쌌다.
실제로 내가 떨어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감각이 뭉개져서 애매했다.
[조건2: 특수던전 ‘피안의 악몽’ 내부로 진입 ― 충족]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제대로 퀘스트를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 자신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칠흑이 사방을 감쌌다.
잠깐 의식이 까마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