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그… 엄…”
당연히 나는 당황했다. 졸라리 당황했다.
나는 당황하면 습관적으로 욕을 한다. 그래서 욕지거리만 입에서 연신 맴돌았다.
“와 X발. 아… X바. 어우 X팔.”
그럴 수밖에.
남의 눈에서 눈물 뽑아내는 거면 몰라도 말이야. 그 루시가 나라 잃은 나라님마냥 꺼이꺼이 울고 있으니 당황을 안 할 수가 없다.
루시가 저렇게 펑펑 우는 건 그녀가 죽기 직전 이후로 처음이다. 그 때도 경황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야. 대체 왜 그러냐니까?”
나는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물어봤다.
일단 가장 중요한 우는 이유부터 잘 몰라서 문제다. 나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떠벌거렸다.
“아니. 나 어차피 뒤져도 살아나잖냐. 다 알만한 선수끼리 뭘 그렇게 화를 내냐?”
“흐윽… 끄흐, 우으으…!”
“너 사람 뚜껑 따이는 거 원투데이 보냐? 직접 해본 적도 있을 거 아냐. 이제 와서 고작 내 목 잘린 정도로 17세 소녀새끼마냥 즙을 짜고 지랄…”
내가 조목조목 ‘루시가 지금 울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파했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자꾸 즙 짠다고 하지 마라! 내가 착즙기냐!!”
오히려 루시는 더 서럽게 울며 한층 강력하게 나를 패기 시작했다. 이번 건 좀 진심이 들어있는지, 종아리를 향한 발차기가 꽤 매서웠다.
“착즙기… 는 아니지. 음. 그래. 미안.”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이런 말투를 물려주고 간 아버지를 저주하며 최대한 말을 순화했다.
“아 어쨌든 울지 말라고! 왜 우냐니까! 말을 해줘야 시정을 하죠 X발!”
“이럴 땐 꼬치꼬치 캐묻지 마라 좀! 모른다! 나도 모른단 말이다!”
“아니 이 조팡매가 X발 뭔 개소리야 진짜…”
네가 우는 이유를 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아냐. 아버지,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밤하늘에 잔뜩 낀 별을 보며 한숨을 퍽 내쉬는데. 문득 루시가 일방적인 폭행을 멈췄다.
“음…?”
나는 뒤늦게 시선을 내리고 루시를 쳐다봤다. 루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빨간 눈으로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얼씨구.’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생각보다 절박해 보이는 눈동자 때문에 당황해서 그랬다.
“걱정이, 된단 말이다…! 내 허락 없이 죽지 말거라. 이건… 명령이다. 용사.”
툭. 루시가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에 머리를 갖다댔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잔뜩 젖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 소매를 힘껏 쥐고 쥐어짜듯이 말했다.
“정말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싫다. 네가 아까처럼 미쳐 날뛰는 모습도… 네가 죽는 것도. 싫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아왔다!”
“… 그, 그러냐.”
“그래. 그러니까 함부로 죽지 마라. 함부로 죽이지도 마라. 지금 당장 그러겠다고, 나랑 약속해다오. 제발 부탁이야.”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멍청한 탄성을 내질렀다.
왠지 귀에 엄청 익은 멘트였다. 당연한 건가. 크로스페이드의 대나무숲에서 그녀가 했던 말의 재방송 수준이었다.
“… 루시.”
내가 나직이 부르자 퍼뜩 몸을 굳히는 루시. 내가 겪었던 전생의 그녀와 놀랍도록 판박이인 반응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루시가 더욱 내게 머리를 기대왔다. 그리고 말했다.
“용사. 너는 알고 있느냐?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게냐? 알고 있다면, 제발 알려다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전생처럼 장난치듯이 ‘나 좋아하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엄두가 안 난다. 긍정하면 그거대로 기분이 X같을 거 같고. 부정하면 더 X같을 것 같아서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아, 아아. 뿔. 또 찌른다 X발. 아프다고. 아파!’
이번에도 뿔이 문제다. 이번엔 박정용 가슴살 꼬치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기껏 루시가 감정선 잡는데 방해하기도 뭐하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슬쩍 내게서 떼어놓았다. 손이 어깨에 닿자 루시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나는 한참동안 루시와 눈을 마주쳤고,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에효.”
나는 알테어를 죽이기 위해 들었던 손에서 슬며시 힘을 풀었다. 탱그랑. 멸망의 대검이 바닥을 나뒹굴며 긴 금속음을 흘렸다.
허전해진 손으로 루시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안 죽고 안 죽일 테니까… 울지 마라. 왜 안 어울리게 질질 짜냐. 사람 무안하게.”
“… 정말이냐? 약속… 하는 게야?”
“어 그래. 약속한다. 찍고.”
루시는 내 말과 손길을 음미하듯 눈을 슬쩍 감았다.
한동안 순순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던 그녀는 이내 훌쩍 뒷걸음질 쳐서 거리를 벌렸다.
“… 자.”
그리고 번쩍. 전처럼 양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허?”
나 저거 전에도 봤다.
전에 나한테 했던 그 제스쳐다.
패닉에 빠진 유리아를 달래줬을 때. 갑자기 저러더니, 나를 패기 시작했지.
“위, 위로받을 준비는 끝났느니라. 자아.”
루시는 선심쓰는 양 말하더니 한껏 내게 팔을 뻗어왔다.
대체 뭐지. 루시가 ‘이번에도 못 알아보면 뼈와 살을 분리시켜 버리겠다’라는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다.
“허어…”
하지만 이제 와서 없던 눈치가 생길 리가 없잖은가. 내 대가리는 예지 기능이 탑재되지 않았다.
나는 무방비하게 양팔을 벌린 루시 앞에서 머쓱하게 머리만 긁적였고. 루시는 빠르게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분노나 수치심 둘 중 하나 때문인 것 같은데. 분노의 함량이 많아 보인다. 뇌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에효 X발. 야 정용아. 내가 진짜 웬만하면 닥치고 있으려 했는데. 저거 안아달라는 거 아니냐? 너 지구에서 일상생활은 가능했냐?
“아. 아아아!”
보다보다 답답했는지 수호 형님이 훈수를 쑤셨다. 나는 깨달음의 탄성을 흘리며 불알을 탁 쳤다.
유리아를 위로해줬을 때 상황. 그 때 루시와 나눴던 대화들의 맥락. 드디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주댕이는 놔뒀다 라면 건더기로 끓여먹을 거냐? 말을 해 인마 말을.”
일단 상황 어렵게 만드는 루시에게 입으로 딜을 좀 먹이고.
그대로 껴안았다.
“윽, 흣…!”
루시가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숨을 삼켰다.
한동안 꼼지락거리나 싶더니. 이내 얌전해진다. 그녀가 내 가슴에 대고 머리를 가만히 부볐다.
“… 씁.”
아 X발. 뿔 존나 따갑다. 얘 한가할 때마다 멧돼지처럼 나무에 뿔 갈고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따갑냐.
한참 후에야 루시는 내게서 떨어졌다.
“만족했냐?”
내가 따끔한 가슴을 문지르며 묻자, 루시는 고개를 픽 돌렸다.
얼핏 본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곧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만족했다.”
거 다행이구나.
나는 루시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회귀점에서 나와 루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유리아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 * *
나는 유리아까지 데리고, 유원지를 다시 가로질렀다.
“히이익! 아, 으아!”
중간에 유리아가 두 탈주용사의 시신과 알테어의 시신(진)을 보고 기겁을 했다.
덕분에 나는 깜빡 잊고 있었던 알테어의 포박작업을 뒤늦게 실행할 수 있었다.
“이야 성녀님. 덕분에 사후관리 철저하게 했네. 놀라줘서 고맙다.”
“… 으으!”
나는 유리아에게 짤막한 감사를 표했다. 알테어를 그림자사슬로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난 뒤엔 다시금 가던 길을 갔다.
유리아가 뒤에서 질문의 시선을 따갑도록 쏟아냈다. 물론 싹 무시해버렸다.
“일부러 뒤지기 직전까지만 팼어. 안 죽는다.”
아마도.
… 까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 유원지의 소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 하아.”
유리아도 내 말투 보고 깨달았는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착잡한 표정으로 내 뒤를 얌전히 따라왔다.
“여기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유원지 막다른 길의 절벽을 따라 걸었고. 이내 기억 속의 장소에서 손을 과감히 쑤셔 넣었다.
우우웅. 손은 거침없이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히죽 웃으며 다른 두 사람에게도 눈짓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슈.”
“어… 그, 그래…”
루시와 유리아가 얼떨떨하게 안개의 벽 쪽으로 다가왔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쿡쿡 찍어보나 싶더니. 천천히 팔부터 안으로 집어넣는다. 두 사람 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행색이었다.
나는 기다리다 짜증나서 루시의 팔을 불쑥 안으로 끌어당겼다.
“흐와앗!!”
루시는 군필여고생 같은 비명과 함께 환상 내부의 동굴에 끌려 들어왔다.
그리고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른 게 쪽팔려서인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는 왜 패 X발.
“… 으.”
이내 유리아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신나게 뚜드려 맞는 상태로 걸음을 옮겨 동굴을 질러나갔다.
“와아.”
유리아가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꿈꾸는 상사화를 보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처음 봤으면 충분히 취할 법도 한 장관이다. 동굴 끝날 때쯤 되면 지겨워서 파란색만 봐도 토악질이 나오겠지만.
나는 한 번 히죽 웃어주고는 계속 전진했다.
‘이제 곧…’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의 끝자락이 당도했다.
꿈꾸는 상사화가 어느 기점을 경계로 귀신 같이 끊어져 있다. 나는 지척까지 다가온 바깥의 풍경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고. 이내 동굴의 출구로 발을 들이밀었다.
“저, 저게…”
문제의 거대한 하얀 나무가 보이는 장소까지 도달했다. 루시와 유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거기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앞에 버티고 섰다. 나무에 덩그러니 매달린 하얀 고치를 쳐다보는 두 여인에게 말했다.
“저게 자드키엘이다.”
가볍게 소개를 마치고 나 역시 자드키엘을 눈대중으로 훑었다.
전생의 기억 그대로, 자드키엘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예술작품처럼 묘한 압박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루시. 혹시 아는 얼굴?”
나는 잘게 몸을 떨고 있던 루시에게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다. 하지만 루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나는, 저런 괴물은… 모른다.”
“그렇군.”
“근데… 뭐라고 해야 할지. 뭔가… 싫으면서도, 엄청 익숙한…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 그렇군.”
솔직히 뭔 소린지는 모르겠다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대충 납득하고 루시를 뒤로했다.
나는 곧장 유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따라 와. 성녀님.”
“아…!”
철벅. 거대한 나무 주변으로 깊게 고인 피의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참고로 유리아의 거부반응이 엄청났다. 그녀는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피웅덩이 앞에서 필사적으로 버팅겼다.
‘뭐, 그럴만도 하지.’
나는 유리아의 손목을 잡은 손에 슬쩍 힘을 줬다.
강제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유리아가 공포를 억누를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다.
“… 아.”
지성이면 감천인 건지, 아니면 유리아가 눈치가 빠른 건지.
유리아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피의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패널이 등장했다.
[퀘스트 발생 (에픽)]
전처럼 단순한 경고 패널이 아니다.
퀘스트다. 그것도 아스타르트 때와 비슷한… 두 번째 의식의 퀘스트가 담긴 패널이었다.
[명칭: 마녀를 죽여라 ― 두 번째 의식]
[난이도: 전설]
[상세: 마녀의 뇌리(腦裏), 자드키엘의 악몽에 도달했다. 가련한 마녀의 추억을 멸살하여 그녀를 안식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인도하자.]
[조건1: 결계 ‘피안의 미궁’ 돌파 ― 미충족]
[조건2: 특수던전 ‘피안의 악몽’ 내부로 진입 ― 미충족]
[조건3: 악몽의 파편 세 개를 파괴 ― 미충족]
[보상: 멸망의 신기 ― 피안의 악몽. 체력+1000. 마력+500. 전 스탯 +150. 히어로 센스 +20]
“좋아. 가보자.”
나는 심호흡을 마치고 유리아에게 슬쩍 눈짓했다. 유리아도 눈앞을 멍하니 주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단단히 벼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보름달처럼 은은한 빛이었다.
‘워우.’
나는 그 빛을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헛기침을 하고 손을 슬쩍 뻗었다.
우우웅. 검붉은 장막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부탁 좀 하자. 이 앞에 있는 장막, 해제할 수 있겠어?”
“… 우.”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구구궁. 묵직한 소음과 함께 투명한 붉은 막이 격렬하게 일렁거렸다. 이내 위부터 산산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드키엘을 감싸고 있던 안개의 벽, ‘피안의 미궁’이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