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아웃 오브 컨트롤
“어! 시원하다.”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물의 에테르를 들이켰다.
한층 맑아진 정신으로 시선을 높이 들었다. 바이킹 선두에 아무렇게나 묶여 방치된 알테어가 시야에 들어온다.
참고로 그녀는 스턴싸개로 기절했을 뿐. 아직 죽지 못했다. 그녀의 몸뚱이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밀린 벌 받을 시간이다. 할매.”
나는 천천히 바이킹 위로 올라갔다.
놀이기구로서 바이킹을 탈 때보다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있었다.
바이킹 선두로 다가가 알테어를 들어올렸다. 알테어가 몸을 움찔거리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 큭.”
고통으로 신음하는 알테어를 보니 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알테어를 들쳐 업은 채 다시 바이킹을 내려왔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묶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알테어 위로 올라탔다.
“용서… 못 해.”
그러자니 알테어가 중얼거렸다.
무감각하게 내리뜬 시선으로 슬쩍 흘겨봤다. 피로 흠뻑 젖은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방독면 안에서 증오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이려면… 나를 죽였어야지…! 그 애들은! 그 둘은 상관없었잖아!! 대체 왜, 왜 죽여 버린 거야…! 내가 설득하면… 그 둘은, 당신을 막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네. 둘이란 건 인간사냥꾼 듀라스와 고독의 모스크덴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감명 깊은 얼굴로 불알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음. 그런 수도 있었군.”
알테어를 제압해서 나머지 두 사람을 설득시킨다니.
생각도 안 해봤는걸. 괜찮네.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쓸데없이 싸울 일도 없고.
서로 윈윈할 수도 있고. 응?
“오 알테어. 제발 개X같은 소리 좀 그만해요.”
콰직. 나는 연극풍으로 장렬하게 외치며 알테어의 복부를 힘껏 짓밟았다.
그야말로 있는 힘껏이다. 알테어 주변으로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흙먼지를 울컥 토해냈다.
“카학…!”
알테어의 몸이 망둥어처럼 펄떡 뛰어올랐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빨간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방독면으로 반쯤 가려진 알테어의 면상을 내 앞으로 끌고 왔다.
그녀의 발언이 하도 가소로운 나머지 헛웃음이 다 나왔다.
“네가 두 사람을 설득시켜준다고? 내 통수나 안 치면 다행이지 개썅년아.”
“나, 나는… 그런 짓은 절대…!”
“절대 안 한다고? 사람이 또 모르지.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기가 막히게 통수를 칠지 누가 알아. 너는 아가리 털게 내버려뒀으면 분명히 통수를 쳐. 반골의 상이 그득하다고 X발년아.”
증인은 전생의 나 4명이다.
내가 피해자 겸 증인이니 판사님한테 바로 비트 올리겠다. 사형 땅땅땅 X발.
콰직! 나는 알테어의 머리채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이 새끼야. 생각을 좀 해봐라.”
“커… 허어…!”
숨도 못 쉬도록 머리를 짓누르다가, 성에 안차서 땅에 대고 바득바득 짓이겼다.
알테어의 눈가가 괴로움으로 깊게 일그러진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내가 사실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너희를 죽였던 거라면 어쩔래. 그러면 너는 나를 용서해줄 거냐?”
“… 크윽… 이, 이제 와서 무, 무슨 헛소리를…!”
“그래 X발. 뭔 헛개나무 똥싸먹는 소리 지껄이냐. 그 새끼들이 무슨 사연이 있든 내가 알게 뭐야. 죄가 없긴 왜 없어 X발.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으면 살인전과가 사라지냐?”
알테어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며 땅으로 고개를 처박는다.
어딜 하늘같은 박정용님 말하는데 눈을 깔아. 구슬아이스크림 마냥 눈깔 파먹어버리기 전에 해골 원위치 해라.
“어, 딜도, 망가.”
나는 우악스럽게 알테어의 방독면을 벗겨버렸다. 그리고 턱주가리를 붙잡고 나와 시선을 강제로 맞췄다.
나는 입꼬리를 신랄하게 비틀어 올렸다.
“살다보면 말이야. 서로 치고 패고 죽이고. 싸울 일이 많지. 500년이나 살았으면서 아직도 몰라?”
“…”
“기왕 대가리 달렸는데 좀 써봐. 너희가 착하고 내가 나쁜 새끼라 이렇게 된 게 아니야. 너희도 착하고 나도 착하니까 쳐싸우는 거지.”
혹은 둘 중 하나가 태생부터 나쁜 새끼라고 치자.
그래도 우린 둘 다 무조건 ‘내가 착한 쪽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검은 머리 짐승들은 존나게 싸움질을 하는 거다.
나는 알테어의 뺨을 찰싹찰싹 후려치며 비아냥거렸다.
“존나 나쁜 새끼들이 다들 자기가 존나 나쁜 새끼라는 걸 깨달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세상 X발 서로 싸움날 일이 없을 텐데. 안 그래?”
“닥쳐. 그만해.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알테어는 눈을 질끈 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굴에 잔뜩 묻은 핏방울과 섞여 검붉은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왜 또 즙을 짜고 지랄이실까. 진짜 나쁜 짓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상황이 우스워서 살짝 웃었다.
“이야. 결국… 묶어놓고 치는 게 현실이 됐네.”
그 이상하게 찢겼던 전생의 메모가 복선으로 작용하다니. 역시 기구하도다 박정용 인생. 어디로 튈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니까.
태평한 생각과 함께 퍼어억! 혼신의 힘을 다해 알테어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커… 흑.”
알테어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반응 좋군. 그래. 사실 이제 서로 말은 필요 없다.
패배에 대한 책임만이 남았을 뿐이지. 어른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 그렇지?
나는 계속해서 알테어의 면상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윽, 커억, 끄윽…!”
왼주먹, 오른주먹. 다시 왼주먹. 때릴 때마다 알테어의 육체가 망둥어처럼 펄떡인다.찐득한 피와 이빨조각이 훈장처럼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쓰라린 고통조차 쾌감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도 멈출 수 없다. 염불처럼 중얼거리며 사지를 마구 휘둘렀다.
“왼발, 오른손! 이렇게 때리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 멍청한, 어리석은 영혼아!”
퍼억, 우직, 우드득.
때린다. 또 때렸다. 계속 때렸다.
이젠 폭력의 목적이 뭐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무아지경으로 알테어의 얼굴을 후려쳤다.
어느 순간. 즐거워졌다.
“아하하하하하학!!”
나는 숨넘어갈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주먹질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빨라졌다.
“…!…!!”
더 이상 알테어는 주먹질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전신을 잘게 경련할 뿐이다.
싫증이 빠르게 몰려왔다. 나는 어깨 너머를 뒤져 멸망의 대검을 꺼내들었다.
스릉. 대검을 빙글 돌려 역수로 고쳐쥐었다. 그대로 알테어의 목에 찔러 넣는다.
“죽어어어어!!!”
그러나 쇄도하던 칼끝은 알테어의 목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내 의지가 아니다. 누군가 내 팔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팔뿐만 아니라 뒤에서 나를 아예 부둥켜안아서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그만… 그만하거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루시의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 * *
“제발. 그만 하거라. 벌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쇄도하던 칼끝이 멈췄다.
알테어의 목덜미를 얕게 파고든 대검에서 핏방울이 슬쩍 묻어나왔다.
누군가 나를 팔로 감싸서 물리적으로 속박했다.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은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야. 이 빡대가리 새꺄. 내 말을 이해를 못 하는 거냐? 아님 내가 뒤졌는데 네 기억이 리셋된 거냐?”
목소리 듣고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나. 루시였다. 그녀의 서늘한 체온이 등으로 뚜렷하게 전해져온다.
나는 지금 착잡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분명 말했지. 기다리라고.”
그렇게나 기다려달라고 말했는데 왜 여기 있냐. 너까지 나를 못 믿는 거냐? 내 믿음의 보답이 고작 이거냐?
대충 그런 식의 질책과 힐난이 들어있는 말이었다.
“… 나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한낱 수호자의 명령 따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느니라.”
루시는 내게 몸을 한껏 밀착하며 그런 말을 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웅얼대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살짝 의문을 느끼긴 했지만. 루시가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이 더 컸기에 비아냥거리기 바빴다.
“그래 뭐. 네 번이나 쪽도 못쓰고 개털린 새끼가, 혼자 빡돌아서 어택땅 찍고 돌격했으니. 믿지 못할 법도 하지. 그 부분은 인정할게.”
“… 그런 거 아니다. 용사.”
루시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못들은 체했다. 의기양양하게 알테어의 피떡이 된 면상을 가리켰다.
다음엔 시선을 더 넓게 돌렸다. 탈주용사들의 피와 살로 점철된 유원지의 참상을 가리켰다. 그것을 쳐다본 루시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믿게 해주려고 고생하고 있잖아. 봐라 인마. 다 죽여버렸어. 이제 그 빨간머리 할매만 마무리하면 끝이다. 앞으로는 네가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는 신뢰의 미스터 박이 되겠…”
“아니라고 했잖느냐!! 닥치고 내 말을 들어라!!”
빠악. 둔탁한 충격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루시가 내 등에 머리를 세게 박아버린 것이다. 순간적인 충격 덕분에 나는 입을 닥쳐야 했다.
“윽.”
꾸우욱. 무언가 뾰족한 게 등을 지그시 찌른다.
세 방향에서 따끔거리는 걸 보니, 보나마나 루시의 뿔이었다. 루시가 얼굴을 점점 세게 파묻는지 뿔이 점점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악.”
나도 모르게 곡소리가 연신 나왔다.
급기야 레슬링에서 탭하듯이 루시의 팔뚝을 다급하게 치며 말했다.
“야 아프다. 뿔 닿는다. 등심꼬치 된다고. 생각보다 졸라 따가우니까 좀만 떨어…”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이럴까봐 찾아온 것이다! 이, 못 미더운… 용사놈아.”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며 안간힘을 쓰자니. 문득 루시가 내 등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루시의 말을 확실히 들었다. 하지만 의미를 모르겠어서 반문했다.
“… 어? 뭐시기?”
“마지막 순간에… 네놈 면상이 하도 위태로워 보여서! 지금처럼 미쳐 날뛸 것 같길래 말리려고 쫓아왔다는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어거지로 루시의 팔을 풀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루시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 앞에서… 그렇게 죽어버릴 수가 있느냐. 내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나 해봤느냐!”
루시가 빽 소리치더니 주먹으로 연신 내 몸을 톡톡 두들겼다.
그녀가 불만을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힘아리 없이 로우킥이나 주먹을 갈긴다.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나 저 습관은 똑같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왜 갑자기 즙을 짜고 그러냐.”
루시가 전에 없이 펑펑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