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결단
그래서 그 계획이 뭐냐 하면.
대단한 건 아니고, 말하자면 짜고 치는 인질극이다.
“까마귀. 돌아가세요. 간신히 얻은 안식까지 방해한다면, 내 전력을 다해 당신을 막….”
궁니르를 들어 올리며 지겨운 멘트를 내뱉던 알테어.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흡,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멘트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씨익. 나는 알테어를 향해 사악하게 웃으며 멸망의 대검 날끝을 까딱거렸다.
“움직이지 말어. 지금부터 움직이는 새끼는 다 범인이다.”
스릉. 내가 든 칼은, 바싹 부둥켜안은 유리아의 목에 닿아 있었다.
알테어의 붉은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한 표정이었다.
“아암, 그럼! 꼼짝도 말거라! 내 아주 이 계집애 가죽을 산채로 벗겨버릴 것이니라!”
게다가 옆에서 거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날개와 뿔. 온몸을 가득 메운 검은 문신과 치렁거리는 하얀 머리칼. 완전체로 변신한 루시가 한껏 거들먹거리고 있다.
왜 저러고 있냐고? 내가 어깨형님 대신해서 세운 바람잡이다.
‘좋아. 역시 위압감 하나는 장난 아니군.’
나는 최대한 사악해보이도록 웃으며 유리아를 들이밀었다.
“이 여자를 모른다고는 못 할 거야? 할매.”
“… 유리아…!”
역시나 알테어는 적잖이 분노한 얼굴로 유리아의 이름을 읊조렸다.
‘좋아. 이건 가능성이 있겠어…!’
낮에 성당에서 그렇게나 반가운 체를 했으니, 당연히 아는 사이일 거라곤 예상했다.
그런데 지금 반응을 보니 예상 이상이다. 인질극 결과가 기대되는 리액션이 아닐 수 없다.
“이 귀엽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관우처럼 목만 돌아오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무기 내려.”
“까마귀. 당신…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졸렬한 사람이었다니! 최소한 1대1로 정정당당하게 싸우죠!”
저거 저저, 정정당당 같은 개소리 지껄이고 있네 씨봉방년이. 곧 있으면 탈주용사 2종세트 몰려오는 거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냐?
나는 기가 차고 가소로운 나머지 한껏 비아냥거렸다.
“싫은데. 내가 왜? 지금 아쉬운 게 난가? 아닌 거 같은데? 어디서 명령질이지?”
“이런 천하의 사악한…! 꼬마 마녀님은 어째서 저딴 놈을 까마귀로!”
“에헤이. 혓바닥이 길어? 내가 못할 거 같아서 그래?”
나는 유리아의 목으로 검을 한층 밀착시켰다. 긴장해서인지 껴안은 유리아의 몸이 자꾸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몸을 한층 바싹 내쪽으로 끌어안았다.
“꺄아악!”
……
…?
유리아의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지. 비명은 대본에 없었는데. 유리아의 불꽃 애드리브인가? 나는 당황을 애써 숨기며 그녀에게 슬쩍 시선을 내렸다.
“으, 아!”
유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방금 손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짧았던 수녀복 밑단이 아슬아슬한 데까지 말려 올라갔다.
그 광경을 본 알테어는 차마 못 보겠다는 양 눈을 돌렸다.
“어찌 저리도 잔악무도하고 파렴치할 수가! 몸도 성치 않은 소녀를 우악스럽게 희롱하다니!! 까마귀,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아니 그, 이건 오해야. 잔악무도까진 인정하는데 파렴치는 빼자.”
“듣기 싫습니다! 파렴치한 까마귀!!”
철컹! 알테어가 다시금 내게 궁니르를 겨누었다.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앙다문 알테어. 표정에 혐오와 경멸이 드글드글했다.
“에헤이. 잠깐.”
나는 황급히 유리아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알테어의 행동이 순간 멈칫한다.
“어, 어쨌든! 내 요구 조건은 단 하나. 네가 거기서 비키는 거다. 얌전히 지나가게만 해줘. 그러면 유리아의 목숨은 보장한다.”
“큭…….”
알테어가 나를 가만히 노려본다. 나도 지지 않고 마주봐줬다.
나는 극심하게 갈등하는 알테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피안의 미궁? 그 결계 때문에 자드키엘에겐 접근을 못하잖아. 그냥 비켜주기만 하라고. 면상 어떻게 생겼나 감상만 하다 올 테니까.”
“… 그, 그걸 어떻게…!”
알테어는 내 입에서 ‘피안의 미궁’이 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음 반응은 좀 예상 밖이었다. 그녀의 눈가에 서린 의심과 적대감이 폭증한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진입하려 한다는 건… 설마, 피안의 미궁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낸 건가요?”
“뭐? 아니, 무슨 그런 억측을…!”
“그렇군요. 찾아낸 거군요. 찾아내고… 말았군요.”
내가 뭐라 하든, 알테어는 자기 뇌피셜을 사실로 단정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났다. 알테어를 포기하도록 부추기려 한 말이었는데. 역효과가 제대로 발생했다.
좋지 않다. 스칼로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상황이면 쟤는 나를 전력으로 막으려 들 게 분명하다!
‘제발… 제발!’
나는 낭패감에 어금니를 악물었고. 넋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 알테어를 가만히 주시했다.
한동안 지리멸렬한 눈싸움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후. 후후.”
이내 알테어가 피식, 방독면 안에서 낮은 웃음을 토해냈다.
‘… 웃어?’
좋지 않은 징후가 나왔다. 멸망의 대검을 쥔 손이 땀으로 미끌거린다.
어느 순간, 나는 유리아를 끌어안은 채 공중으로 펄쩍 점프했다. 히어로 센스 때문이었다.
“삽탄. 번개도둑.”
촤자자작! 내가 있던 장소로 굵직한 번개다발이 내리 꽂혔다.
넓은 땅가죽이 허옇게 불타고 스파크를 지직거린다. 직전에 회피했던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마
른 침을 가까스로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아, 아아…?”
유리아도 그 광경을 넋나간 얼굴로 쳐다봤다.
곧 자기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런 미친…! 다짜고짜 쏘다니, 야 할매!! 이 애가 죽어도…!”
내가 황당한 나머지 중얼거렸지만. 이내 입을 콱 다물었다.
철컹. 재차 격철음이 울렸다. 마력이 잔뜩 맺힌 궁니르가 우릴 겨누는 것이 한 템포 늦게 포착됐다.
“미안해요 유리아. 루나님이 부탁했던 좋은 세상은… 역시, 내겐 너무 버거운 짐이에요.”
파지지직! 다시금 번개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가 쳐다보는 것과 동시였다.
늦었다. 저 번개의 마탄은 탄속이 너무 빨라서 보고서 피하면 늦는다. 이건 꼼짝없이 맞아야 한다.
순간 아찔한 전율이 등줄기를 치달렸다.
‘나는, 괜찮지만… 유리아는?’
품에 안긴 유리아를 퍼뜩 떠올렸다.
나는 체력치가 있으니 한 방 정도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내가 최대한 보호하면 살 수 있을까?
그래. 되든 안 되든 해봐야 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유리아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위험하다 용사!!”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옆에서 나를 거세게 밀었다. 루시였다.
“아니…!”
나와 루시, 유리아가 동시에 낮게 신음했다.
루시의 절박한 얼굴이 순간 시야에 스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놓쳐버린 유리아의 얼굴도 스친다.
사사삭. 그런 내 앞으로 번개줄기가 용서없이 쇄도해 나갔다.
“꺄아아아악!!”
파지지직! 시야가 번쩍거리며 유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나는 루시와 함께 번개의 궤도에서 벗어나 바닥을 나뒹굴었고. 우리를 빗겨나간 번개줄기는 그대로 유리아를 직격했다.
정적이 강림했다. 다만 고기 타는 냄새만 사방에 자욱했다.
“… 어, 어쩔 수 없었어.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미안해 유리아. 루나님.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나는… 지킬 거야. 지켜야 해…!”
알테어도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충격에 빠진 듯했지만. 이내 미친 사람처럼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주워섬겼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사고가 잠시 마비됐다. 살 타는 냄새가 코끝에 스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허겁지겁 유리아에게 달려갔다.
“서, 성녀님!!”
나는 힘없이 고꾸라지는 유리아의 몸을 받쳐냈다. 그녀는 내 품으로 맥없이 늘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그을렸다.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전신이 퍼덕거린다. 불타고 찢어진 살갖 사이로 피가 새어나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아, 아. 아아….”
끊어질 듯 희미한 신음을 연신 내뱉던 유리아가 필사적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내 손에 가져갔다. 스슥, 스슥. 무언가 내 손바닥에 열심히 쓴다.
필담을 시도하는 것이다. 깨달은 나는 손바닥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미안해요.]
대체 뭐가?
내가 유리아의 손을 힘껏 쥐고 그것을 되물으려 했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풀썩. 그녀의 손이 힘없이 바닥에 처박힌다. 죽은 것이다.
“…….”
잠깐 사이 무기물이 된 유리아를 가만히 쳐다봤다.
가슴은 욱신거리는데 감정은 고요하다. 생각보다 화나지 않았다.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
‘… 나 때문인가?’
나는 이 죽음의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래. 역시 내가 잠깐 미쳤었던 것 같다. 선택권을 두 깍두기에게 떠넘기다니.
스칼로에게 넘겨받은 무거운 짐을 나도 모르게 회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불살루트? 지랄하고 자빠졌네.’
뭐 적어도 한 가지 수확은 확실히 있었다.
“그래. 뭐. 솔직히, 너를 좀 동정했던 것도 있다.”
알테어의 뒤틀린 집념이 상상 이상이라는 걸 체득하게 됐다는 거지. 수업료가 좀 비싼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냥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며 알테어를 가만히 노려봤다.
“싸우지 않고 끝났으면… 서로 얼마나 좋냐. 이 X발년아.”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까딱여 루시를 이리로 불러들였다. 갈팡질팡하던 루시는 내 손짓에 퍼뜩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변신은 그 짧은 사이 풀려 있었다.
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알테어를 보며 계속 말했다.
“탈주용사 새끼들의 사연도 들었고. 너랑 어떻게 만났는지도 다 들었다.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쬐끔이나마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건 네가 나를 막는 이유다.”
“…….”
“의식이 진행돼서 자드키엘의 시신이 사라지면. 모든 병자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지? 시신이라도 남아 있으니까 병의 확산이 이 속도에서 그치는 거라던데. 맞냐?”
철컹! 궁니르와 함께 알테어의 고개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혀를 찼다. 감정을 눌러 죽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칼로 씨가, 전부 실토했나 보군요.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네요.”
알테어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방독면 위로 뒤틀린 눈웃음을 칠뿐이다.
사실상 긍정하는 꼬라지였다. 스칼로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 말했다.
“스칼로는 나한테 선택을 떠넘겼다. 알드콘과 페니의 시한부 목숨이랑 완전한 병의 종식. 더 옳은 길은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도저히 자기는 결정을 못 하겠다 이거지.”
그리고 나는 눈깔에 힘 빡주고 알테어를 노려봤다.
어깨를 으쓱 털었다. 짙은 비난과 비웃음을 담아 허탈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지금 네가 하는 짓과 다를 것도 없어. 역병이 점점 멀리까지 퍼지고 피해자가 속출하는 마당인데.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지. 딱히 이제 와서 비난하진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나는 이 세상의 진리를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도망칠 곳은 아무데도 없어. 할매.”
그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었다.
제나가 죽었고 제논이 죽었고 루시가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리아가 죽었다.
모두 내가 갈팡질팡하다, 나약하게 도망칠 궁리만 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박정용은 빨간 불에도 멈추지 않아. girl.”
씨익. 나는 알테어의 붉은 눈을 직시하며 도전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대로 알테어를 등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시선을 흘깃 돌려 루시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에게 힘없이 턱짓했다.
“루시. 돌아가자.”
“아, 응… 그, 그래.”
루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잿빛 연기를 뿜어내는 유리아의 시신을 흘깃 보는가 싶더니, 이내 내 뒤를 뽈뽈 쫓아왔다.
우리가 쿨하게 되돌아가자 오히려 알테어가 당황에 찬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 이대로 돌아가는 건가요? 까마귀. 의식을… 포기해주는, 겁니까?”
나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
알테어는 희망과 의심, 그리고 죄책감이 범벅된 혼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아주 가관이구나.”
본인이 소신껏 나를 막았으면 끝까지 뻔뻔해질 것이지. 저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으로 설치니까 나 같은 호구들만 개피보는 거다. X발.
나는 알테어 앞으로 번쩍, 엄지손가락을 추켜들었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고전영화의 명대사와 함께 따봉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냥 스스로 결의를 다지기 위한 의식이었는데. 알테어도 루시도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당연히 못 알아보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내 소신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뿐이다.
“다 왔다. 여기야.”
그렇게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하류와 중류가 만나는 세 갈래 길의 시작지점. 내가 죽었을 때 부활하는 회귀점이었다.
내가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하자, 옆에서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 여기는 분명….”
“내가 죽고 나면 부활하는 회귀점이지.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기억나냐?”
“기, 기억은 난다. 근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용사. 이제 나도 좀 알려다오!”
나는 루시의 질문을 싹 무시하고 내 할말을 했다.
“질문은 됐으니까. 넌 다시 눈 뜨면 곧장 유리아를 데리고 여기로 찾아와.”
“… 뭐? 다시 눈을 뜨다니?”
루시는 적잖이 답답한 눈치로 되물었지만. 나는 그것조차 무시했다.
그리고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잡화점에서 샀던 포도주를 꺼냈다. 나부터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 재끼고. 남은 포도주를 루시의 손에 올렸다.
“이 포도주가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 온다. 그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오목을 둘 때 쌍삼을 당하면 계집아이 같은 비명을 지른다는 삼국지의 관우. 그의 유명한 일화를 인용해서 루시에게 통보해 봤다.
관우는 보온병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던데. 상남자 불사신 ‘피닉스 박’은 그런 거 안 쓴다.
“아니 용사! 내 말 무시하지 말라니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루시가 분노로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쳤지만. 직후 거짓말같이 행동이 멈췄다.
스르륵. 검집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흐느적거리는 흑백의 쌍검. 그것들이 내 목과 심장을 노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요, 용사… 지금 무슨.”
우우웅. 내 정수리 위로 시커먼 해골 문장이 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발동시킨 사냥표식이다.
그제야 루시의 얼굴에 아차 싶은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늦었다.
“꼭 기다려라. 저 개새끼들 싹 조지고 돌아올 때까지. 유리아랑 무조건 여기에서 기다려.”
퍼퍼퍽!
멸망의 대검은 목을 찔렀고. 에스파다는 심장을 꿰뚫었다.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루시의 얼굴에도 몇 방울 튀어 하얀 얼굴에 새빨간 얼룩이 생겼다.
“아, 아아.”
루시가 얼빠진 탄성을 내지른다.
자기 얼굴에 묻은 피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피투성이가 된 내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나는 실시간으로 무거워지는 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가래가 끓어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어거지로 끌어냈다.
“나를 믿고 기다려. 나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를 믿고 있으니까.”
멋진 대사 쳤으니 이제 떠날 시간인데. 이 쓸데없이 튼튼한 몸뚱아리가 좀처럼 죽지 않는군.
내 피로 얼룩진 루시의 얼굴을 한 번 소매로 닦아주고, 멸망의 대검을 어검술로 조절했다.
루시가 아찔한 얼굴로 손을 뻗는다.
“아, 아아!”
우지직. 격통과 함께 멸망의 대검이 횡으로 내 목을 갈랐다.
시야가 기우뚱, 기울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루시의 얼굴도 거꾸로 뒤집힌다.
순식간에 암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