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양자택일 극단적이야
[무조건 잔류사념 회복이 먼저다. 전투경험을 축적해라.]
나는 계곡 중류로 걸어가면서 전생의 내가 남긴 메모를 한 번씩 다시 훑었고. 그 말대로 랜턴을 발동시켜 곧장 잔류사념을 찾아갔다.
시신은 회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와 씨… 매번 이렇게 참신하게 뒤지기도 쉽지 않은데. 대단한 새끼야 아주.”
전생의 시신을 본 내 감상은 그것이었다. 절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따라온 루시도 식겁해서는 내 종아리를 마구 걷어찰 정도다.
“미, 미친… 야 용사!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이 지경이 되냐!”
“나도 몰라 인마. 심란하니 묻지 마라.”
무슨 공업용 압착기로 눌린 마냥 온몸이 찌부러져 있었다.
종잇장처럼 납작해진 살가죽 군데군데 으스러진 뼈가 튀어나왔고, 머리뼈가 뭉개져 그 틈새로 뇌가 쏟아져있다.
그리고 입 안에서 튀어나온 온갖 내장. 눈두덩을 뚫고 튀어나온 눈알이 피의 웅덩이 안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으… 아, 꺄아아아악!!”
잠깐 시체의 몰골에 정신을 뺏겨있는 사이. 옆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유리아였다. 그녀가 내 시체를 가리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어. 설마 보이나?’
순간 뇌정지가 왔다.
시체가 사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한, 일반인에겐 내 시체가 안 보인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두 사람을 데려온 건데… 유리아의 행색을 보니 내 시체 꼬라지가 보이는 모양이다.
‘설마 통찰의 눈 때문인가?’
아뿔사. 그 가능성을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 시체도 일종의 거짓된 무언가로 취급돼서 그녀에겐 보이는 건가.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군. 그럴 수도 있겠다.
“아이고 이런….”
늦은 감이 있지만 뒤늦게라도 유리아의 눈을 가렸다.
정말 많이 늦었다는 건 직후 그녀의 반응으로 알게 되었다.
“아, 으아, 흐으… 으흐으…!”
유리아는 초점없는 눈으로 연신 신음을 흘리고 있다.
뭔가 상태가 좀 위험해 보인다.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해 패닉에 빠진 듯하다.
어쩌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삐걱대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고, 이내 가장 근본적인 원인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이자나미의 심장을 황급히 시신에 가져갔다. 잔류사념이 랜턴과 반응하며 순간 음울한 빛을 토해낸다.
무수한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0,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으으윽…!”
강렬한 고통이 뇌리를 휩쓸었다.
워낙 인상적인 죽음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 강렬한 죽음을 만든 알테어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겠다.
가슴 내부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흉마가 새삼 선명하게 느껴진다.
‘일단… 진정하고.’
거칠어진 숨을 바쁘게 가다듬었다. 지금 이런 고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어린애처럼 훌쩍거리는 유리아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줬다.
“그, 성녀님. 잘못 본 거야. 트릭쇼다 트릭쇼. 짠, 시체 같은 거 없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울지 마라 제발….”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진정시켰다.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아무 말이나 했던 것 같다. 그게 느껴졌는지 보다 못한 수호 형님이 한 마디 할 정도다.
―대가리에 기름칠이나 좀 하십쇼. 본인이 뭔 말 하는지는 알고 있수?
“아 씨브 즈용이 흐르그요 좀….”
나는 띠꺼운 훈수충을 닥치게 만들고 계속 유리아를 달랬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는 진정할 기미가 안 보인다. 몸이 점점 더 격렬하게 떨리고 헛소리를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그, 울지 마라 성녀님. 나 여기 있다니까. 안 죽었다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를 슬쩍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아 X발… 이래도 되나 이거.’
뭐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야 없다지만, 수녀복 입고 있어서 그런가 좀 꺼려진다. 최소한의 접촉으로 그녀의 등을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겨줬다.
그런데 와락, 유리아 쪽에서 오히려 내 쪽으로 바짝 엉겨붙었다.
“으아아앙! 으흑, 으에엥…!”
유리아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펑펑 울고. 또 올려다보고. 다시 울고. 나를 껴안은 힘이 점점 강해지고. 다시 울고, 내 얼굴 본다.
한동안 그걸 주구장창 반복했다.
“어 그래. 착하다. 뚝 좀 하자 뚝….”
나는 뭐 어쩌지도 못하고 계속 등만 두들겨줬다. 토닥토닥 머신이었다.
차라리 지금 당장 가서 알테어 조지고 오는 게 더 쉽겠다. 나는 유리아 몰래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일반인 상대하려니 개빡세네 진짜.’
사실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 맞긴 하다. 할센베르크 하수도에서 처음 내 시체를 발견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나도 이런 풋풋한 반응이 나왔었다. 지금처럼 ‘내 시체인갑다’ 하고 넘기는 건 상상도 못하지.
‘그립기도 하고. 이해는 되는데…’
그래도 성가신 건 어쩔 수가 없네. 갓 전입온 신병이 얼타는 걸 지켜보는 말년병장의 기분이다. 복잡하군.
얘는 이번 일 끝나면 곧장 나이트레아나 잭한테 떠넘겨야지. 가슴 깊이 다짐했다.
“으, 훌쩍.”
한참이 지나서야 유리아의 감정은 잦아들었다.
그녀는 연신 훌쩍거리며 내게서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목 놓아 운 것이 부끄러운지 그녀의 볼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유리아는 내 눈치를 흘깃거리더니, 이내 사각사각 메모를 써서 내게 내밀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인다.
딱히 해줄 말은 없고. 나는 푹 수그린 유리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오냐.”
유리아가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유원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잘 끝난 줄 알았는데. 문득 옆에서 툭, 무언가 내 종아리를 건드린다.
“…?”
고개를 돌려보니 심통이 난 루시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눈을 끔벅거리자, 루시는 요사스러운 붉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말한다.
“용사. 나, 나도 사실… 네 시체 보고 무서웠다. 울 뻔했느니라.”
번쩍. 루시가 양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뭔가를 기다리듯이.
“나, 나는 준비됐다. 자.”
뭔 준비가 돼. 나한테 경멸의 눈빛 받을 준비?
일련의 사태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 나머지 볼을 긁적였다.
“뭔 최영장군 브레이크 댄스 추는 소리냐 미친년아. 맞후임 멘탈관리나 잘해 인마. 네 쫄따구면 관리는 알아서 해야지.”
“….. 뭐, 뭣…!”
이후 나는 루시에게 사망 전에도 전례 없던 로우킥 세례를 받아야 했다.
왜지. 브레이크 댄스를 몰라서 그런가. 미친년이라 해서 그런가.
최영장군이 누군지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
나는 전생의 내가 계획했던 대로 유원지 쪽으로 다시 찾아왔고. 유원지 광장의 초입 부분에서 루시와 유리아를 데리고 설교에 들어갔다.
“깍두기 원투. 내 말 잘 들어봐.”
여기까지 오면서 전생의 사건들을 곱씹으며 복습에 복습을 반복했다.
그 결과,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아마 탈주용사 트리오랑 맞닥뜨릴 거란 말이야. 어느 길로 가든 한놈은 반드시 있으니까.”
“으응. 그래.”
루시는 대답했고, 유리아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희는 싸움이 시작되면 한없이 무능하잖아. 튀김 다 떼먹은 치킨 목뼈보다 쓸모가 없단 말이지.”
“… 무, 무슨 비유인진 모르겠는데 기분이 되게 더럽구나.”
루시는 불쾌하다는 양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인정해야지. 그냥 쓸모만 없으면 모를까 얘네는 블랙홀이다.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해서 이길 싸움도 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너희가 직접 골라 봐라.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몰살루트와 불살루트가 있다.”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서 그들의 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
“몰살루트. 말 그대로 나 혼자 탈주용사 세 명을 싹 쳐죽여 버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너희들을 데리고 간다.”
나는 거기서 잠깐 숨을 골랐고. 나머지 하나의 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불살루트. 너희들을 이용해서 함정을 판 다음.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
그렇다.
이것이 5번째 징글징글하게 반복한 전생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세운 두 가지 전략이다.
‘탈주용사를 싹 정리하는 것도, 계략을 써서 속여 넘기는 것도. 위험요소가 많긴 매한가지다.’
속공으로 세 사람을 각개격파?
정보가 얼추 모인 지금은 이론상 가능하긴 하다.
알테어는 전에 했던 대로 기만작전으로 제압한다. 혹은 초장부터 속공으로 몰아붙여 탄환을 쏠 시간조차 안 준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 뒤에 찾아올 모스크덴은 원거리 버퍼 겸 디버퍼니까 접근전으로 몰아가면 금방 죽일 수 있다. 사실상 1대1로는 가장 쉬운 상대다.
듀라스는 전생의 전투경험이 남아있다. 1대1로 찜쪄먹고 남을 상대다.
‘하지만 전생에만 해도 변수가 그렇게 많았다.’
어디 현실에서 이론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있기나 한가?
똑같은 기만전술을 썼는데 한 번은 알테어가 감쪽같이 속았고. 한 번은 전혀 안속은 걸 어거지로 기절시켰다.
‘이번에야말로 낚시 자체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전생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묫자리만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솔직히 그런 경험을 두 번 겪는 건 사양하고 싶다. 아마 내가 몰살을 시도하면, 알테어의 경우 초장부터 숨도 못 쉬게 패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두 사람의 반응을 주시했다.
“뭘 뻔한 걸 묻느냐 용사.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당연히 그걸로 가야지!”
루시는 그렇게 말했다. 유리아도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고민조차 없는 그녀들의 선택에 잠시 벙쪘다. 정확히 말하면 유리아는 그럴 수 있어도, 루시가 진짜 의외였다.
“어… 그, 루시. 너희들을 이용해서 함정을 판다니까. 네가 위험해진다.”
사실 나는 당연히 루시가 몰살계획을 선택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선심 쓰는 양 선택권을 준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기가 찬다는 듯이 하,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 빈대떡 된 시체나 보여주질 말든가 이놈아. 기껏 이몸이 걱정해서 따라와 줬더니, 뒤에서 또 구경만 하라고? 그렇게는 못 하겠느니라.”
루시가 내 종아리를 툭툭 걷어찼다. 아까처럼 화풀이 같지는 않다. 그냥 장난스러운 타박이었다.
순간 마르크트레스의 대나무 숲에서 받았던 고백을 떠올렸다. 그러나 직후, 불타는 적랑의 저택에서 허연 잿더미가 된 루시도 같이 떠올랐다.
나는 인상을 바짝 쓰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날 좋아해주던 루시는… 죽었어.’
듣자 하니 아까 봤던 시체가 충격적인 것도 있고. 꼴에 6개월 동안 같이 지지고 볶은 정이 있어서 저런 선택을 내린 듯싶다.
그래 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진 않았어도. 나름 신사적으로 대해줬긴 하니까.
‘… 어쩌면, 기억의 잔재나 감정이 조금은 남았을지도 모르지.’
그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사항이다.
이 세상은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뒤통수 맞는다. 괜한 기대는 독이다.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잡생각을 물렸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하하호호 웃으며 다 같이 계곡 중류를 지나가려면 말이야. 단순히 무력으로 치고받아선 안 돼. 작전을 좀 짜봤다.”
“작전이라?”
루시와 유리아의 동그랗게 뜬 눈이 내게 모인다.
둘 다 눈 색깔이 신비해서 그런지 보다 보면 빠져들 것 같았다.
“…….”
순간 멈칫했다.
정말 이게 최선의 수일까. 그녀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데?
나는 혹시 스칼로에게 들었던 말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치명적인 오판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아니. 이건 두 사람이 원한 일이야.’
나는 그렇게 망설임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녀들을 쳐다보며 히죽,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나는 천천히 계획을 두 여자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