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까마귀. 지금 장난을 하자는 건가요?”
당연히 알테어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다.
철컹! 넘칠 듯이 찬란한 광휘를 머금은 포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108배를 하다 말고 목을 바싹 움츠렸다.
“그, 그게 아니고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개새끼였다 싶어서. 이렇게 심심한 사죄와 함께 평화적 해결 촉구를 요청드리는 바이며, 폭력사회 타파하고 평화사회 이룩에 공헌하고자….”
“턱주가리 대세요.”
문득 알테어가 장황한 변명을 자르고 한 마디 했다.
순간 말이 이해가 안 된 나머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 예?”
“턱주가리 대시라고요. 공평하게 저도 한 번 뽑고 대화의 여지를 마련해 보죠.”
“…….”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니르의 포신은 내게 한층 가까워졌다.
대화의 여지는 옘병. 저 단호한 눈빛만 봐도 알겠다. 저년은 나와 대화할 생각이 유글레나 편모만큼도 없다.
‘뭐, 상관없어.’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 나도 진짜로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하다. 기습 좀 하려고 어그로 끌었다.’
잠깐이지만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사실 셋 중 누구도 진짜로 내가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는 없어 보인다. 다만 노림수가 궁금하니 지켜볼 뿐이겠지. 나 같아도 그러겠다.
애초에 내가 노린 건 바로 그거였다. 작전은 이 시점에 이미 대성공이다.
“자. 어쩌시겠어요?”
알테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한다.
푸쉬익. 그녀가 뒤집어쓴 방독면이 공기압 빠지는 소리를 냈다. 비웃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나도 비웃음과 함께 응수해줬다.
“세븐 소드 피어스.”
“… 예?”
“세븐 소드 피어스. 세븐 소드 피어스. 세븐 소드 피어스. 세븐 소드 피어스.”
갑자기 ‘세무새’가 되어버린 나를 보고 알테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든 말든 나는 염불처럼 계속 ‘세븐 소드 피어스’만 중얼거렸다.
“세븐 소드 피어스. 세븐 소드 피어… 쿨럭! 후우… 하아. 세븐 소드 피어스.”
호흡이 가파르게 거칠어졌다. 단순히 말을 끊임없이 내뱉어서만은 아니었다. 마력이 거침없이 빨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호흡이 멎겠다 싶은 순간꺄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나는 참았던 숨을 일거에 내쉬며 하늘 위로 손가락을 번쩍 들었다.
“항상 궁금했단 말이지. 마나가 오링날 때까지 사용하면 몇 개나 나올지.”
그리고 지금. 그 질문의 답이 하늘 위로 펼쳐져 있었다.
알테어가 퍼뜩 하늘로 시선을 박으며 중얼거렸다.
“… 설마.”
내 손가락에 따라 시선을 옮긴 세 사람의 동공이 겉잡을 수 없이 확장되었다.
아, 아아. 알테어의 방독면 속에서 짤막한 탄성이 연신 새어나왔다. 나도 같이 감상하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변경백 3회 분량은 될 거 같은데?”
푸른 전광을 날름거리는 마력검이 구름처럼 빽빽하게 유원지 하늘을 뒤덮고 있다.
탱그랑! 흑백의 쌍검이 내 주변으로 나뒹굴었다. 아까 바닥에 엎드리기 전, 내가 하늘 높이 던져버린 그것이다.
어검술로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교묘하게 조종해놨는데. 지금은 마력이 바닥나서 제어를 상실하고 추락한 것이다.
“이, 이… 까마귀, 이 자식이…!”
알테어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연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개띠꺼운 존댓말충의 가면은 벗겨진지 오래다.
“왜 그래? 아가리 기만질은 그쪽이 먼저 해놓고.”
까놓고 보니. 500년 산 할망구도 화낼 땐 나처럼 추하구나.
인간적인 면모에 오히려 호감까지 들 정도다. 난 너무 완벽한 사람은 싫더라고. 나랑 같은 인종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솔직히 나도 저거 제어 못하거든.”
마력검 조종은 21개만 돼도 대가리가 터진다.
하물며 저 많은 마력검을 내가 일일이 조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피해라!”
나는 즉시 단두대처럼 손을 아래로 내렸다.
스파크를 날름거리던 마력검이 일제히 지면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테어는 아찔한 표정으로 황급히 전장을 이탈하더니. 두 탈주용사에게 소리쳤다.
“듀라스, 모스크덴! 포화를 피해 달아나세요!!”
콰콰콰쾅! 파지지직!
칼날의 폭우가 유원지의 모든 걸 초토화 해간다. 기물들이 속절없이 붕괴되며 사방이 흙먼지와 스파크로 뒤덮여 시야가 불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 달아난 세 파수꾼 사이로, 드디에 활로가 보였다.
‘빈틈. 찾았다!’
나는 신속하게 물의 에테르를 흡입해 기력과 마력을 회복했고. 천천히 허리를 들어올렸다.
꾸드득, 발끝에 힘을 주자 지면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살아 숨쉬는 명대사 공장. 트루 만화의 신 김화백이여.
지금 내게 강림하사, 힘을 주소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콰아앙! 나는 모든 힘을 발끝에 모아 지면을 박찼다.
“으오오오오!!”
쇄애애액! 엄청난 속도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나는 빽빽한 마력검의 포화를 돌파하며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검날에 스쳐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났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세 파수꾼들 사이로 뱀처럼 유려하게 빠져나가, 그 속도 그대로 흑익을 발동시켰다.
“부스터 온!!”
푸화아악!
날갯짓으로 2차 가속을 더했다. 귀가 먹먹해진다. 혈관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른다.
콰콰콰쾅! 허공을 꿰뚫는 내 뒤로 폭발음이 잇달아 치달렸다. 소리보다도 내가 한 템포 빠르다. 음속을 초월해 소닉붐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저 새끼 잡아!”
어찌나 다급했는지. 알테어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도발과 기만작전이 제대로 먹혔다는 소리니 나로서는 기쁘기 한량없다.
의기양양하게 마력검 포화지대를 빠져나가는 찰나.
“삽탄, 추격자!!”
알테어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삐이이익! 무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퍼뜩 뒤로 시선을 돌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색 빛의 구체가 바짝 따라붙고 있다. 잡힐 듯 안 잡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내 뒤를 쫓아온다.
‘뭐야 이건…?!’
전생에도 현생에도 알테어가 저 마탄을 쓰는 건 본적이 없다.
정보가 없다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고. 나는 사력을 다해 와리가리를 털어 그것을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
“아 거 드럽게 끈질기네!”
어떤 교묘한 움직임을 하든, 엄폐물을 이용해 숨든. 귀신 같이 찾아내 집요하게 쫓아온다.
결국 내가 유원지 광장의 입구부근을 지나쳐, 회귀점에 근접했을 때도 나는 그것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개빡치네 진짜!”
목적지는 코앞이었다.
애초에 죽어도 회귀점과 가까운 곳에서 죽기 위해 필사의 빤스런을 감행한 것이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나는 등 뒤로 바짝 쫓는 노란 구체를 쳐다봤고. 이내 한숨을 흘리며 흑익을 해제했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자, 노란 빛의 구체가 일정 거리를 벌린 채 내 주변을 맴맴 돌았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짜증나는 움직임이었다.
-흥.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문득 알테어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웅웅 울린다.
나는 식겁한 나머지 퍼뜩 사방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알테어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기본 마법인 트레이스. 하지만 궁니르로 극한까지 강화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는 죽음의 전령이 되지요. 지금처럼요.
나는 곧 목소리가 문제의 노란 구체에서 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노란 빛의 구체를 가만히 노려봤다. 소통이 단방향 쌍방향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전화하듯이 구체에 대고 알테어를 조롱했다.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 하지도 않았어. 그냥 최대한 여기로 돌아오는 게 목적이었지.”
―… 이번엔 또 무슨 해괴한 짓을 꾸미고 있나요 까마귀.
내 말에 대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쌍방향 소통이 되는 모양이다.
의심과 분노가 잔뜩 섞인 으름장이 들려왔다.
“사람을 무슨 해괴한 짓만 일삼는 미친놈처럼 말하냐. 듣는 미친놈 기분 나쁘게.”
하지만 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살살 농담을 치며 속을 긁을 뿐이다.
실컷 궁금해 하라는 악의적인 배려다. 알테어도 그것을 알았는지, 분노를 담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좋습니다. 대답을 거부한다면 이쪽도 실력행사를 할 뿐입니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냐?”
―모릅니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직후.
노란 구체를 중심으로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공기가 무거워졌다.
“크훅…?!”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주변의 공기가 어깨와 머리, 온몸을 짓눌렀다.
우드득! 지면도 거대한 압착기로 짓누른 듯 점점 움푹 패인다. 그 현상이 내 감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줬다.
‘무, 무슨…?!’
무언가 일어났다. 알테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구체를 쳐다봤다. 알테어의 짧은 영창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삽탄. 그래비티(gravity).
콰아앙! 지면이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우드득! 다리가 속절없이 부러졌다. 나는 버티지 못하고 지면에 바싹 패대기쳐졌다.
“끄… 허억!”
폐가 쥐어 짜이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헛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알테어의 목소리가 자비없이 다시 들려온다.
―삽탄. 그래비티.
우드득, 빠득, 콰직!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장육부가 오그라드는 감각이 엄습했다. 숨 쉬기가 버겁다.
토할 것 같다. 눈알이, 뇌가, 체내의 모든 것이 찌부러져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끄아아아악!!”
나는 고통보다도 공포감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을 들은 건지, 노란 구체가 연신 빛을 발하며 알테어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일부 공격 마법은 트레이스 마법과 연동됩니다. 중계기처럼 작동해서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려주지요. 이 중력마법처럼.
제기랄. 당했다.
너무 기습적이어서 대비고 회피고 뭘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부여잡았고. 이내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린다.
―삽탄. 그래비티.
생에 마지막으로 들은 사형선고였다.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7월 13일, 23시 15분]
[장소 ? 운터란트. 디스트릭트10, 망자의 계곡 하류 부근]
꽤 오랜만에 생명의 위험을 알리는 표식이 등장했다.
“… 오우. 안 나오면 섭하지.”
얼떨떨하게 패널을 읽는 한 편. 그것으로 반쯤 확신했다.
세 갈래길 중 어딘가에 문제의 탈주용사들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타이밍에 회귀점이 갱신될 이유가 없으니까.
“일단 준비 해놓고.”
나는 곧장 메모를 끼적여 망자의 함에 넣을 준비를 했다. 이제 와서는 거의 반자동적인 프레이즈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망자의 함을 열었다가, 우수수수. 함의 용량을 한참 초과한 어마어마한 수의 쪽지에 당황했다.
“… 으어, 아니 뭐야! 잠깐만!”
나는 바닥에 흩어진 쪽지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았다. 그리고 영 꺼림칙한 기분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와. 이 새끼 완전 논문을 써놨네.”
망자의 계곡 중류 세 갈래 길의 공략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내가 쓴 거라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정보량이다.
‘게다가… 내용도 충격적인데.’
자드키엘이 이미 죽었다는 둥.
애초에 역병은 자드키엘 때문에 퍼지는 것도 아니라는 둥.
알테어가 탈주용사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둥.
심지어 그녀도 한통속으로 유원지를 막고 있으니, 가서 고통스럽게 죽이라는 둥.
본인이 남긴 걸 아는 나조차도 믿기 힘든 사실들의 집합체였다.
[중요: 지금 당장 돌아가서 유리아 데려가라. 잔류사념보다 급하다. 묻지 말고 그냥 해라.]
게다가 이런 영문을 알 수 없는 문구까지 있다. 중요하다고 별표까지 쳐놨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고민했다.
‘장난으로 메모를 남길 리는 없고. 잔류사념보다 급할 정도면 오지게 중요하다는 건데…’
랜턴을 발동시켜보니, 잔류사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다.
이건 좀 우회하더라도 사념을 회수하고 가는 게 맞나. 아니면 메모가 시킨 대로 잔류사념보다 먼저 유리아를 데리러 가는 게 맞나.
‘아 씨.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정작 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전생의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볼까. 유리아 데리러.’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