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속죄하는 자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7월 13일, 23시 15분]
[장소 - 운터란트. 디스트릭트10, 망자의 계곡 하류 부근]
꽤 오랜만에 생명의 위험을 알리는 표식이 등장했다.
“… 오우. 안 나오면 섭하지.”
얼떨떨하게 패널을 읽는 한 편. 그것으로 반쯤 확신했다.
세 갈래길 중 어딘가에 문제의 탈주용사들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타이밍에 회귀점이 갱신될 이유가 없으니까.
“어.”
반자동적으로 망자의 함을 꺼내든 나는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망자의 함이 이미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X발. 또냐?”
약 3초 만에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용의 적응력, 여기까지 왔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정보를 물어왔니. 정용아.’
나는 기대 반, 꺼림칙함 반으로 망자의 함을 열었다.
그러자 우수수수. 망자의 함이 안 터진 게 신기할 정도로 꽉꽉 압축된 종이쪼가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당혹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X바! 연말정산 영수증이야?”
황당한 한 편. 덜컥 걱정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죽었길래 유언이 이렇게 쌓여있단 말인가. 갑자기 종이를 보기가 급격하게 싫어진다.
나는 유해물질 대하듯 종이를 들어올렸고.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 오른쪽 구시가지.]
[두 번째 시도. 중앙 폐공장지대.]
[세 번째 시도. 왼쪽 유원지.]
“흐음.”
이건 분명 몇 번의 죽음에, 어디서 죽었는지를 체크하기 위해 사전에 넣어놓은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게 하려고 했으니까 아마 확실할 거다.
‘근데… 이게 다네?’
카운팅 쪽지는 그 세 개 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샅샅이 뒤져봤지만 역시 안 보인다.
그러면 내 생각보다 많이는 안 죽었군. 고작 세 번 밖에(?) 안 죽었으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다.
“아니 그럼 이것들은 다 뭐야….”
나는 그 뒤로 줄줄이 소세지처럼 이어지는 쪽지의 뭉텅이를 들어올렸다.
하나씩 넘기면서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각 통로에 한 명씩… 시간이 흐르면 합류한다?”
대부분 세 갈래 길의 공략법을 적어놓은 유언들이었다.
세 번 다 다른 길로 도전했고. 가던 도중에 탈주용사들에게 죽었다면 사념 회수도 못 했을 텐데. 그런 것치곤 공략들이 제법 상세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것도 들어 있다.
[인적 정보 - 대외비#A 제112호]
[명칭: 듀라스 질드레]
[인적 정보 - 대외비#A 제113호]
[명칭: 모스크덴 체페슈]
[인적 정보 - 대외비#S 제21호]
[명칭: 알테어 바토리]
아예 양식화된 문서로 탈주용사들과, 알테어 바토리의 정보가 적힌 쪽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문서들을 유심히 읽어봤다.
그리고 단박에 간파했다.
‘… 이거 필력부터가 내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못 써.’
이건 내가 정리한 게 아니다. 나이트레아에게 요청했던 정보를 적어놓은 거다.
전생의 내가 단말기로 받아놓고 카피해서 넣어놓은 모양이다. 혹시나 또 죽으면, 그녀의 정보를 받느라 쓸데없는 시간낭비하는 걸 막기 위해서.
“흐음.”
거기까지 쪽지를 종합해봤을 때. 나는 대충 갈래길의 견적을 뽑을 수 있었다.
질척한 땅바닥에 눈앞의 갈래 길 그림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세 갈래 길에 각각 듀라스, 모스크덴, 알테어가 있고. 셋 다 나한테 적대적이다. 처음엔 한 명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른 구획에서 전투를 눈치채고 합류한다.”
그렇다면 공략법도 대충 알겠다.
속공으로 한 놈씩 빠르게 정리해서 일대일 상황을 유지하거나. 만약 가능하면 상대하지 말고 전력으로 도주하는 수밖에 없다.
‘근데 빤스런은 불가능한 거겠지.’
세 루트 모두 내가 죽은 것이 그 증거다.
사실 나는 쟤네들과 싸워줄 이유가 전혀 없다. 내가 무슨 호전광도 아니고. 피에 굶주린 흑염룡도 아니니까. 쟤네는 애초에 내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틈이 있었다면 당연히 나는 도망을 쳤을 거다. 그러지 못했다는 건… 놈들이 내게 도망칠 구석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거나. 도망쳐도 결국은 죽게 된다고 봐야겠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그러면 결국 한 놈씩 속공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외교승리는 뭐, 될 거 같았으면 네 번째 도전 안 하지.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일단 어디에 누가 죽치고 있는가. 그것만 빼고는 거의 완벽하다.’
나는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냈다.
“일단 유원지가 알테어인 것 같긴 한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추측성 발언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쪽지 중 하나가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게 찢기고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의 그 쪽지를 들어올렸다.
[유원지 알테어. 빤스 . 도발 적. ?묶어놓고 친다.]
…….
… 오우야.
기억에 없는 전생의 나야. 대체 무슨 부러운 짓을 한 거냐.
머리 한쪽은 해석 때문에 고뇌했고. 나머지 한쪽으로는 뭉게뭉게 번뇌가 피어올랐다.
‘이, 이 묶어놓고 친다는 건.’
내가 알테어를 묶어놓고 치고 싶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알테어가 나를 묶어놓고 친다는 소리인가.
전자는 확률이 희박하다. 내가 새디스트가 아닌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러면 알테어가 나를 묶어놓고….’
SM플레이 하다가 뒤졌니 정용아?
복상사라면 잔류사념 회복이 시급한데. 유원지로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나?
‘아니. 좀… 헛소리 말고 생각을 해보자.’
나는 전에 없이 필사적으로 기억에 없는 전생을 머릿속으로 재현했다.
일 안 하던 뇌세포들이 총출동한다. 전생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또각또각. 폐쇄된 음습한 유원지에 울리는 발소리.
뇌쇄적인 복장의 알테어가 온몸이 결박된 내게 다가온다. 윤기나는 붉은 머리가 도발적으로 찰랑인다.
그리고 그녀는 채찍으로 나를 마구 때리며 다그치는 거지.
“말해! 누굴 생각했지?”
“성녀님을 생각했습니다!”
“무슨 성녀님을 생각했지?”
“알테어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신포도 맛이 날 것 같은 알테어의 입술을 쳐다보고. 만년 동안 응어리진 동정의 한을 풀며 성불하고….
‘아니 X발. 그럴 리가 있겠냐고 좀.’
나는 머리를 마구 뒤흔들며 엄한 생각을 쫓아냈다. 망상 2주 압수다.
한동안 연예인급 미녀들이랑 여행했던 여파인가. 혼자 움직인 요 6개월은 스스로 생각해도 가지가지 하는 놈이 되었다.
“그럼 이제….”
나는 메모를 끼적여, 다른 쪽지들과 함께 망자의 함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번 생에 공략할 장소를 적은 쪽지였다.
[네 번째 시도. 왼쪽 유원지.]
[무조건 잔류사념 회복이 우선이다. 전투경험을 축적해라.]
우우웅. 익숙한 낮은 울림이 울렸고. 나는 망자의 함을 조심스레 닫았다.
‘정보는 충분해. 이젠 경험이 쌓여야 한다.’
어디에 누가 있는지, 그나마 확실한 곳을 다시 공략하자. 이젠 잔류사념의 회복을 1순위로 놓고 움직인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그게 맞다.
물론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다. 나는 망자의 함을 가만히 쳐다봤다.
[인적 정보 - 대외비#S 제21호]
[명칭: 알테어 바토리]
망자의 함 안에 잠들어 있을 알테어의 인적 정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과거를 중얼거렸다.
“무너져가는 육체를 견디기 위해, 신체 대부분을 마도신체 병기로 대체했다….”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알테어의 과거사를 엿보았다.
흑마법으로 유지되던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알테어는 당시 운터란트에서 막 태동되기 시작하던 인공신체 프로젝트의 실험체로도 참여한다.
[프로토타입, 알테어 바토리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흑마법으로 한계까지 유지되던 노쇠한 육체와 장기의 7할 가량이 전면 교체되었다.]
[‘죽음의 천사’는 반영구적인 운터란트의 수호자가 되어, 증오스러운 마왕들에게 정화의 백염을 쏟아낼 예정이었다.]
문서에는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기재돼 있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알테어의 몸은 인공신체가 본래 신체보다 많다.
나는 유원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상념에 빠졌다.
“30년 동안 뼈 빠지게 마왕 때려잡다가. 육체를 교체하더니. 갑자기 배신을 했다….”
전생의 쪽지로 파악된 알테어 바토리의 행적은 대충 이렇다.
알테어는 육신을 성공적으로 교체한 직후. 육체의 시운전 겸 소환된 마왕을 사냥하러 운터란트 북부의 작은 마을에 파견을 나갔다.
그리고 그 길로 마지막이다. 세상에 단 한 대뿐인 궁니르와 함께 감쪽같이 잠적을 했다.
‘배신의 이유는… 인체실험장을 들킨 것 때문이고.’
인간의 육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기술이다. 당연히 엄청난 모르모트가 갈려나갔을 거다.
그 비인도적인 실험의 장을 알테어에게 발각됐다고 한다. 그녀가 전에 없이 격분하여 관계자들과 다툼이 있었다는 나이트레아의 주석이 있었다.
‘그 뒤로 또 200년이 넘게 행방이 묘연하다.’
그리고 현재 기준으로 약 15년 전.
용사시험장 중 하나이자. 운터란트의 흉악범이 수감되는 대륙 남해바다의 선상감옥. ‘칼테루스’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자신이 건재함을 세상에 알린다.
‘거기서 듀라스와 모스크덴이 합류.’
한술 더 떠서, 칼테루스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듀라스와 모스크덴을 데리고 탈옥했다.
데리고 나온 이유는 모른다. 살아온 시간대가 다르니 원래 지인일 리는 없고. 스스로 밝히지 않는 걸 보면 대의명분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나이트레아도 주석을 붙여 놨다.
‘그런데 이번엔, 망자의 계곡에서 성녀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왜 그랬을까.
왜 200년 넘게 잠적했고. 왜 탈주용사들을 탈주시켰고.
그리고 이번엔 또 왜, 망자의 계곡에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자드키엘에게 가는 길목을 농성하며 나를 적대하는 거냐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두 개는 진짜 이해가 안 돼.”
쪽지 정황상 알테어가 자드키엘에게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낮에 본 알테어는 분명 진심으로 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열심과 헌신 어린 행동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모순이다. 낮에는 흑혈병 환자를 돌봐주지만 밤에는 자드키엘을 지키고 있다? 낮져밤이냐?
이 두 가지 행동은 서로 맞물리지가 않는다.
‘뭔가… 내가 중요한 사실을 빼먹고 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을 알테어가 쥐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건 간과할 수 없다. 자드키엘과 관련된 비밀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변수는 최대한 줄여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역시. 다시 가 봐야겠어.”
나는 중얼거리며 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호기심을 확실하게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알테어를 족쳐서 직접 듣는 거니까.
절대 도발적인 SM플레이가 기대돼서 그런 건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허흠. 어흠험!”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성큼성큼 유원지로 진입했다.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