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상황은 뭐 익숙하다.
이자나미의 심장까지 발동시켜본 결과. 사념의 장소는 중앙 통로의 폐공장지대. 나는 거기서 죽은 상태였다.
“보자….”
나는 우선 망자의 함에 들어있는 전생의 유언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우웅. 마치 봐달라는 듯이 보랏빛을 토해내는 함을 열고, 꾸깃꾸깃 들어가 있는 종이들을 꺼냈다.
“워우.”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들어있는 종이가 네 개나 될뿐더러. 그중 하나는 피딱지가 선명하게 굳은 혈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을 물리며 종이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 오른쪽 구시가지.]
[두 번째 시도. 중앙 폐공장지대.]
여기까진 이해한다. 내가 방금 갈 길 정하고 넣으려고 했던 종이가 저런 거니까.
두 개의 종이를 나란히 감상하다가, 어떤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구시가지에서 대가리 개박살 나고. 두 번째로 간 게 폐공장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개박살나서, 지금 세 번째 전생이라는 거냐 설마?
아니. 아직 속단은 이르다. 일단 다른 메모들을 다 보고 상황을 종합하기로 했다.
전의 두 개가 출발 전에 남긴 출사표라면. 남은 두 개의 메모는 유언에 가까웠다.
[각 통로에 한 놈씩. 시간 끌면 연계ㅎ]
‘얘는 왜 갑자기 빠개고 지랄이냐.’
웃겨 정용아? 너 뒤지는 게 웃겨? 기어이 사이코패스가 돼 버렸냐?
나는 소름 돋는 박정용의 행보에 몸서리를 쳤고. 지저분한 혈서 쪽에도 고개를 돌렸다.
이거 하나로는 무슨 의미인지 가늠이 잘 안 됐기 때문이다.
[가운데. 세 명. 알테어 정보. 필수]
“어지간히도 급하게 썼네 X발….”
아무리 혈서라고는 하지만 너무 개발새발이다.
지렁이 기어가는 궤적이 더 글자 같겠다. 덕분에 해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가운데가 세 명. 이건 알겠는데.”
나는 천천히 정보들을 모두 취합했다.
전에 읽었던 메모의 유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각 통로마다 파수꾼이 한 명씩 있다. 그리고 교전 중 시간이 흐르면 다른 통로의 파수꾼이 연계한다.’
그래서 가운데는 세 명이라는 거다.
교전을 시작하면 양쪽 통로에서 비슷한 시기에 지원 합류를 할 테니까.
전생의 나도 그렇게 다구리를 당해서 뒤진 거겠지.
‘근데… 알테어의 정보? 그게 왜 필수냐.’
알테어 바토리. 망자의 계곡 심층부 병자마을의 짝퉁 성녀.
분명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탈주용사 조사하는 김에 그녀의 정보도 나이트레아에게 요청하긴 했다.
그런데 탈주용사의 정보 확보면 몰라도, 왜 알테어의 정보 확보가 필수인 걸까.
“으음.”
타오르는 듯한 적발과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슬쩍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탈주용사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렇다고 망자의 계곡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 나이트레아한테서, 정보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그래. 타당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내가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다만. 뭔가 느낀 게 있으니까 혈서까지 써서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일단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나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고민할 거리는 없어서 좋네.”
방침은 이미 정해졌다. 남은 길은 이제 유원지뿐이니 유원지에 가볼 생각이다.
나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망자의 함 옆에 뒀다. 원래 있던 쪽지를 버리고, 새로운 쪽지를 작성했다.
[첫 번째 시도. 오른쪽 구시가지.]
[두 번째 시도. 중앙 폐공장지대.]
[세 번째 시도. 왼쪽 유원지.]
[각 통로에 파수꾼이 한 명씩 존재. 가운데 통로의 공장지대는 시간이 흐르면 양쪽에서 지원이 온다.]
[양쪽 측면의 구시가지나 유원지를 공략할 것.]
영수증마냥 점점 길어지는 메모들을 보아하니 뿌듯해지는 한 편. 나의 깜찍발랄한 추리력과 적응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나는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며 쪽지를 갈아치웠다.
“기억도 전혀 없는데… 공략법만 늘어가는 기형적인 사태군.”
우우웅.
쪽지를 넣자 함에서 낮은 울림이 일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나이트레아의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날아갔다.
―문서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사이 꽤 많은 시간이 지나자 단말기가 신호음을 토해냈다.
나는 단말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나이트레아의 이름으로 대량의 인물 정보 덩어리가 수신되어 있었다.
“그래. 드디어 왔군.”
나는 비몽사몽한 눈을 비비고 단말기를 틀었다. 단말기 가장 상단에 깜빡이는 수신 버튼을 누르자 내가 요청했던 정보들이 주르륵 펼쳐졌다.
[1. 인간사냥꾼 - 관련 정보 일람]
[2. 고독 - 관련 정보 일람]
[3. 죽음의 천사 - 관련 정보 일람]
나이트레아가 인물별로 정리해준 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왜 본명이 아니라 별칭으로 정리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름이 그때 그때 달라지기라도 했나?
‘죽음의 천사가 알테어인가.’
죽음의 천사라는 오글거리는 별칭은 알테어의 상태창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러니 세 번째 항목이 알테어인 건 확실하다.
아무래도 과거의 운터란트에서는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나 보다.
“흐음.”
전생의 나는 알테어의 정보가 필수라고 했지만. 당장 탈주용사가 더 걱정인 나로서는 솔직히 다른 두 놈의 정보가 훨씬 궁금했다.
나는 가장 먼저 ‘인간사냥꾼’ 항목을 눌렀다. 상세 정보가 눈앞에 펼쳐졌다.
[인적 정보 - 대외비#A 제112호]
[명칭: 듀라스 질드레]
[상세: 대륙력 1084년 8월 신병확보. 마왕사냥꾼 질드레 일족의 마지막 계승자로 보이는 소년. 구 디스트릭트10 지역 근방에서 210명을 연쇄살인하여, 마을 하나를 몰살시킨 혐의로 긴급체포 되었다. 칼테루스 선상감옥에 종신형으로 갇혔으나, ‘죽음의 천사’에 의해 탈주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탈주 시기나 이후 행적은 불명.]
“… 뭐라고?”
상세항목 이후에도 나이트레아의 주석과 전문가들의 해석, 당시의 여론과 기사 등을 다룬 정보가 한참 이어졌지만.
내 눈은 어느 한 부분에 고정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천사. 알테어의 이명이 듀라스의 정보 안에서 포착됐다.
나는 혹시나 싶어 황급히 ‘고독’의 항목도 열람했다. 두 눈이 빠르게 문자를 훑는다.
[인적 정보 - 대외비#A 제113호]
[명칭: 모스크덴 체페슈]
[상세: 대륙력 1087년 2월 신병확보. 완전히 폐쇄된 구 디스트릭트10 지역에서 3년 동안 살아남은 소년. 해당 지역의 감염증을 연구하던 ‘오스올드 탐험대’에 의해 긴급구조 되었다. 육체의 괴충화가 중간에 억제된 특이증세로 탐험대의 실험에 이용됐으나, ‘죽음의 천사’에 의해 탈주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탈주 시기나 이후 행적은 불명.]
있다. 여기에도 그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단말기를 들고 있던 손이 잘게 떨린다. 나는 뒤통수가 얼얼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그놈들을 탈주시킨 게… 알테어 바토리?”
어떤 경위로 전생의 박가놈이 알테어의 정보를 알아오라고 숙제를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알테어의 정보를 왜 알아야 되는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그녀는 탈주용사들에게, 그리고 내 죽음에 깊게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쎄하네 이거.”
―돌아가세요. 까마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던가.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말투. 그 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평온에 대한 갈망. 지금도 그녀의 첫인상을 말해보라면… ‘평소엔 착하지만 화나면 무서운 누님’이라는 이미지다.
“… 어디.”
나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마음의 준비 끝에 ‘죽음의 천사’ 항목을 클릭했다.
[인적 정보 - 대외비#S 제21호]
[명칭: 알테어 바토리]
예상대로 그것은 알테어의 정보였다.
나는 상세항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중요도의 차원이 다르다는 걸 어필이라도 하듯. 문서가 다른 둘에 비해 두 배는 길었다.
[상세: 대륙력 791년 1월. 대마왕 병기 프로젝트 ‘궁니르’에 자진하여 참여한 최초의 3용사. 스펠 건 궁니르의 터무니없는 생체마력 요구량과 과중량으로 인해, 최초이자 마지막 적합자가 된다. ‘죽음의 천사’라는 코드네임으로 디스트릭트10에서 30년간 활약한다. 이후 흑마법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던 알테어 바토리의 육체는 노쇠할 대로 노쇠했고, 결국….]
“결국…?”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알테어의 정보를 집중해서 읽었다. 거기에는 알테어의 과거사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천천히 두 눈이 부풀어 올랐다.
“허허. X발.”
끝까지 읽은 나는 헛웃음을 흘렸고. 단말기를 힘껏 움켜쥐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유원지 통로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스름한 안개 너머에서 우우우, 누군가의 한 맺힌 곡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얘도 분명, 인간혐오 잔뜩 충전됐겠군. 나처럼.’
그런 생각 때문에 더 그렇게 들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유원지를 향해 옮겨갔다.
* * *
망해버린 유원지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을씨년스러운 것이었다.
각종 구조물에 이끼와 덩굴이 잔뜩 휘감겨 있고. 가로등이 전부 꺼져 사위가 어둑하다. 녹슨 자재들이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굴러다녔다.
‘생각보다 놀이기구는 꽤 그럴싸하네.’
일단 내가 상상하는 놀이동산의 기본적인 폼은 갖추고 있었다.
바이킹, 자이로드롭, 회전관람차, 회전목마… 그리고 놀이동산의 꽃인 롤러코스터까지. 내 생각보다 훨씬 재현율이 뛰어나서 놀랍다.
어쩌면 지구의 용사들에게 자문을 구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세계에도 놀이공원이 있을지 모르니 이상할 건 없겠다.
“안 움직이는 게 더 무섭네. X팔.”
시커먼 밤.
먼지가 잔뜩 쌓인 놀이기구들.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적막.
그냥 유원지 전체가 귀신의 집 같다.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해진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억!”
털퍽. 성큼성큼 걷던 도중 무언가 발치에 걸렸다. 나는 휘청대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고. 이내 어둑한 발치로 시선을 돌렸다.
동물과 사람을 섞어놓은 듯한 마스코트 캐릭터 인형이 도처에 널브러져 있다.
‘저거, 병자마을 가운데 있던 그거잖아.’
나는 사방을 굴러다니는 사람만한 인형들을 보고 뒤늦게 떠올렸다.
목이 떨어져나갔던 청동 동상. 그것이 입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옷과 마스코트의 인상착의가 일치한다.
역시 그 동상은 이 유원지의 마스코트 캐릭터였나 보다.
“으음.”
땡그랗게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는 마스코트. 병자마을의 동상은 목이 잘려 있어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다.
밝을 때 봤다면 나름 귀엽게도 보일 면상이다만. 지금은 공포분위기 조성에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의미없이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걸음을 재촉했다.
“기분 나쁘니 빨리 탈출….”
중얼거리던 나였지만. 이내 빨라졌던 걸음은 그 자리에 우뚝 못 박혔다.
진행방향 정면. 거리 한복판에 퍼레이드 차량 하나가 전복되어 무너져 있다. 나는 거기에 시선을 박고 옴짝달싹 못했다.
그 앞에 사람의 형체 하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제가 뭐라 한들, 절대 멈추지 않는군요 까마귀.”
알테어 바토리. 붉은 적발을 휘날리는 병자마을의 성녀.
시커먼 마스크형 방독면으로 입가를 가린 그녀가 있다. 유원지 마스코트 동상의 잘린 머리를 들고, 그것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건 진짜 당신의 의지인가요? 아니면 예언이 말하는 거지같은 운명의 이끌림일까요.”
그리고 내게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