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더 라스트 가디언
채애앵!
베스타크와 곡검이 연신 교차한다.
어검술로 활로를 뚫어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등에 눈깔이라도 달려있는지, 측면과 후방에서 쇄도하는 내 공격을 곧잘 막아낸다.
“에라이! 박정용 저글링 쇼쇼쇼다 개색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멸망의 대검까지 어검술로 조작하기 시작하자, 손이 하나 밀리는 듀라스는 어쩔 수 없이 점점 내 공격을 놓치기 시작했다.
“그으으…!”
파스슷. 그의 몸에 생채기가 늘어간다. 숨도 눈에 띄게 거칠어지고 있었다.
듀라스가 이내 백스텝을 밟는다. 추격해 들어오는 내 면상으로 돌멩이 몇 개를 던졌다.
“기폭!”
지잉. 묘한 공명음을 토해내며 퍼런빛을 뿜어내는 돌.
나는 놈이 내뱉었던 시동어를 상기하고는 황급히 백스텝으로 거리를 벌렸다.
콰콰쾅! 돌들이 연쇄폭발을 일으키며 충격파를 쏟아냈다.
“크윽!”
나는 폭발의 후폭풍에 거스르지 않았다. 쓸데없이 저항해서 힘을 낭비하기보단, 차라리 잠깐 이대로 거리를 벌리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은 직후에 알 수 있었다.
“커헉…?!”
타아앙!
폭연 속에서 총성과 함께, 새빨간 직선 두 개가 가슴팍을 꿰뚫고 지나갔다.
폭발의 시커먼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너머에는 더블배럴 권총을 든 듀라스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 새끼… 신성한 탑싸움에 원거리 무기를…!”
뻥 뚫린 바람구멍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시커먼 망토자락이 순식간에 혈액으로 흠뻑 젖었다. 몸이 무겁다. 현기증이 인다.
치명상이군.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마지막 남아있던 물의 에테르를 집어삼켰다.
“죽인다. 괴물은, 모두… 죽어야 한다.”
그리고 쉬쉬쉭! 듀라스는 연신 코트자락 안에서 곡검을 꺼내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채채챙! 마치 서커스단의 곡예를 보는 듯, 변화무쌍하고 예상치 못한 각도로 날아오는 곡검들. 나는 직접 쳐내다 결국 세븐 소드 피어스로 주변을 훑었다.
“귀찮게 하네 진짜!”
파파팍!
베스타크와 에스파다, 멸망의 대검까지 마력검을 쏟아낸다. 총 21개의 마력검이 곡검들을 떨궈내고, 오히려 잔돈이 남아 듀라스에게 쇄도했다.
“긋…!”
페이탈 쏜즈가 있었다면 아예 역공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진화의 흑익 상태가 곱창났다.
예상대로 듀라스는 날아오는 마력검을 쉽게 쳐냈다. 잠깐의 견제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
‘무조건 접근전이다!’
워낙 변칙적인 공격 때문에 쫄아서 거리를 벌렸는데. 아니었다. 이 새끼는 떨어져 있는 게 더 위험한 놈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력검을 쏟아내 놈의 시야를 교란했다.
“죽인다. 죽인다…!”
연신 같은 말을 되뇌며 듀라스가 마력검들을 피해나간다.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무수한 마력검 사이를 유영하는 검은 그림자. 마치 곡예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너나 죽어 X발!”
나는 어검술로 조종하던 멸망의 대검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스팅어를 발사했다.
콰아앙! 기탄이 폭발하며 듀라스를 후려친다. 듀라스도 미리 간파하고 허리를 숙였지만 살짝 늦었다.
놈의 신형이 크게 뒤흔들린다.
‘지금이다.’
틈새가 보였다. 나는 쏟아지는 마력검 사이에 섞여 놈에게 파고들었다.
“죽, 인다!”
피픽! 놈이 다급히 날린 곡검 두 개가 어깨와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치명상을 피해냈다.
그리고 전투에서는, 언제나 위기를 모면하면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그림자 사슬!”
촤르르륵! 스무 개에 달하는 사슬을 놈에게 발사했다.
워낙 마력이 많이 빨리는 기술이라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한 적기를 잡았다면 이것만큼 굳히기 쉬운 기술도 없다!
“…!”
파파팍!
듀라스는 마력검을 쳐내는 와중에 사슬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지만. 사각으로 파고든 사슬 하나에 다리가 걸렸다.
한쪽 다리가 봉쇄되자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나머지 다리, 양팔, 그리고 목까지. 사지에 감긴 시커먼 사슬이 죽일 듯이 놈을 조여 들었다.
“끄… 억…!”
듀라스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아쉽게도 풀어줄 생각은 없다. 나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갈무리하며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우우웅. 마력을 담은 멸망의 대검이 듀라스의 머리 위에서 어른거렸다.
“대가리 딱 대. 반으로 쪼개버릴라니까.”
나는 처형 집행인이 된 양, 손에 침을 뱉고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검날을 들어올렸다.
증오와 분노, 그리고 집착으로 번들거리는 듀라스의 눈을 한 번 봐주고. 이내 내리쳤다. 멸망의 대검이 거세게 듀라스의 머리로 날아간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그 찰나의 순간.
“삽탄. 번개 도둑.”
등 뒤에서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지지직! 직후 온몸을 강타하는 짜릿한 뇌격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잠깐 정신이 깜빡, 꺼졌다 켜진 느낌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바닥과 격렬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
…?
…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꿈틀꿈틀, 몸을 미친 듯이 경련하는 중이다.
내 의지가 아니다. 몸 주위에서 스파크가 튈 때마다 격심한 고통과 함께 망둥어 마냥 몸이 펄떡대고 있었다.
“버… 버, 버, 버번개?”
나는 한참 후에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배후에서 갑자기 날아온 전격을 맞은 것이다. 입도 마비돼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어눌하게 뭉개진 발음이 새어나온다.
“어어떤, 새, 새새끼가….”
뇌 속이 번쩍번쩍 미러볼처럼 빛나는 것 같다.
사고회로가 잘 안 돌아간다. 이태원 클럽으로 빵뎅이 흔들러 갔다가 코로나 집단감염 된 기분이다.
대가리가 텅텅 빈 느낌이라는 소리다.
― 삽탄. 번개 도둑.
나는 한참 후에야 뒤에서 들렸던 목소리를 기억해냈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간신히 비틀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느, 느너, 넌….”
멀찍이 옆 공장의 옥상. 여자 하나가 서 있다.
양손에 탱크의 포탑을 떼 온 듯한 무지막지한 대포를 들고 있었는데. 대포의 포신 끄트머리에서 연신 번갯불이 튀고 있었다.
저 년이다.
저 년이 내게 번개를 쏜 게 틀림없었다.
“뭐하는… 새끼야!”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마스크처럼 생긴 방독면으로 눈 아래는 전부 가려져 있다. 그나마 드러난 얼굴도 일렁이는 불꽃의 음영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거라곤, 등 뒤로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새빨간 머리칼.
그리고 그 아래에 차갑게 벼린 붉은 눈동자.
“… 어?”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익숙한 실루엣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닫았다.
그러자 철컹! 반대편 옥상의 그녀가 들고 있던 대포를 내리더니. 오히려 내 대신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모스크덴. 듀라스.”
화르륵! 타이밍 좋게 그녀의 뒤로 화마가 치솟는다.
쉬이익. 음영이 짙게 진 방독면 안에서 둔탁한 숨소리가 목소리에 섞여 흘러나왔다.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주시하는 여자. 그러나 그 시선은 수산물시장 동태마냥 널브러진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끝을 내세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 위를 쳐다봤다.
어느새 사슬에서 풀려난 듀라스가 곡도를 역수로 쥐고, 내 등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허.”
단숨에 역전된 상황.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이 짧게 터져나왔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듀라스와 모스크덴. 두 사람이서 한 명씩 길목을 틀어막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다. 그래봐야 나머지 하나의 길로 침입자가 질질 샐 테니까.
그렇게 애매하게 막을 바에는 차라리 뭉쳐다니는 게 낫지.
‘처음부터 한 년이… 더 있었던 거다.’
저 여자는 나머지 하나의 길목. 유원지에서 합류했을 것이다.
왜. 대체 왜 저년이 탈주용사라는 놈들과 손에 손잡고, 나를 방해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 다음엔, 반드시. 죽인다. 너부터.”
마비 때문에 얼얼한 입을 또박또박 움직였다. 악바리와 오기를 잔뜩 담아 중얼거렸다.
멀찍이서 나를 내려다보던 적발적안의 그녀. 문득 눈꼬리가 슬픈 기색으로 호선을 그린다.
웃고 있는 것이다.
“꼭 마녀의 기사처럼 말하는군요. 자기 죽음, 처지, 승산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양. 그리운걸요. 언제나 우리 꼬마 마녀님을 똑바로 향하던 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
“나는 그 눈빛을 가장 선망했고. 가장 두려워했지요.”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한 마디 하더니. 더 이상 관심도 없다는 양 고개를 돌렸다. 펄럭! 붉고 긴 머리카락이 불꽃의 아지랑이 속에서 거칠게 나부꼈다.
사박사박. 고양이 같은 사뿐한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점점 화염 속으로 삼켜진다.
“여신께서, 명하셨다. 집행한다.”
그리고 곧바로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푸직. 듀라스가 내 등에 곡도를 박아 넣었다. 꽂은 채로 곡도를 마구 휘젓는다.
뿌드득. 뼈가 일그러지고 장기가 헤집히는 소리. 불쾌한 이물감이 등줄기를 치달린다.
“끄, 으아아아악!!”
나는 낚시 바늘에 꿰인 지렁이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듀라스는 그 시점에서 마무리를 짓지 않았다. 사실상 내 죽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리라.
“끄, 어윽…!”
시선을 슬쩍 내렸다. 뱃속의 장기 대부분이 밖으로 쏟아졌다. 옥상의 열기로 피의 웅덩이가 지글지글 끓는다. 박정용 선지해장국이 한 가마솥 나올 정도였다.
척추와 신경이 고장났는지 몸은 꼼짝도 안 했고.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
직감했다. 이건 물의 에테르는 고사하고 삼신할머니도 못 살린다.
나는 곧 죽는다.
“괴충. 죽인다. 괴물은, 죽여야 한다. 이게… 옳다.”
듀라스는 만신창이가 된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고. 이내 미련없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신속하게 모스크덴에게 달려가 그의 커다란 가방을 뒤진다.
“… 모스.”
이내 듀라스가 가방에서 파란 주사기를 허겁지겁 꺼내더니, 모스크덴의 절단된 육체를 맞춘다.
그리고 푸직. 상체와 하체에 각각 투여했다.
“모스. 모스….”
듀라스는 연신 중얼거리며 모스크덴의 육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르륵. 새파란 기운이 모스크덴을 감싼다. 반으로 갈라졌던 육체가 천천히 접합되어 간다. 듀라스의 눈빛에 얕은 희망이 서리나 싶더니. 철퍽. 결국 모스크덴의 육체는 붙지 못하고 푸른 기운이 맥없이 사라졌다.
줄줄줄. 절단된 모스크덴의 몸에서는 시커먼 피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여신이여. 정녕, 있는가.”
듀라스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느껴졌다. 격렬한 슬픔이었다.
듀랴스의 손이 망연자실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듀이. 지켰다… 여신님이… 시킨 대로. 나, 무서워도… 참았어.”
모스크덴이 횡설수설한다.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돌았다. 꺼지기 직전에 타오르는 마지막 촛불처럼.
“… 잘했다.”
듀라스는 짤막하게 한 마디 하고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X발… 아주 지랄들 하세요.”
그리고 나는 같잖은 감성놀음 하는 그들을 비웃어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우치를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다.
나는 주변에 흥건한 새빨간 물감으로 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정보만이라도…!’
긴 말을 쓸 시간도, 여력도 없다. 나는 앞으로 30초 내로 죽는다.
그렇게나 죽어댔음에도, 아직까지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어거지로 밀어내며. 나는 혈서를 한 글자씩 완성해 나갔다.
‘고맙다. 인간사냥꾼.’
듀라스. 친구에 정신 팔려서 나를 원큐에 끝장내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마.
그런 생각과 함께 망자의 함에 혈서를 집어넣었다.
“컥.”
마지막 숨을 토했다.
풀썩. 손에서 힘이 빠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불쾌한 졸음이 몰아닥쳤다. 거부할 수 없었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7월 13일, 23시 15분]
[장소 ― 운터란트. 디스트릭트10, 망자의 계곡 하류 부근]
꽤 오랜만에 생명의 위험을 알리는 표식이 등장했다.
“… 오우. 안 나오면 섭하지.”
얼떨떨하게 패널을 읽는 한 편. 그것으로 반쯤 확신했다.
세 갈래길 중 어딘가에 문제의 탈주용사들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타이밍에 회귀점이 갱신될 이유가 없으니까.
“일단 준비 해놓고.”
나는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샛길로 빠지면서도, 메모를 끼적여 망자의 함에 넣을 준비를 했다.
이제 와서는 거의 반자동적인 프레이즈였다.
“어.”
하지만 망자의 함을 꺼내든 나는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망자의 함이 이미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X발. 또냐?”
잠깐 뇌정지. 버퍼링.
약 3초 만에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용의 적응력,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