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연화가 답이다!’
모스크덴과의 짤막한 교전 끝에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곧장 연화를 쓸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하지만 연화고 나발이고. 모스크덴이 워낙 쥐새끼처럼 공장 골목을 누비고 다녀서 시야에 넣기조차 쉽지가 않다. 나는 공장 단지 블록을 종횡하며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피잉―! 무언가 팔 끝에 걸렸다. 나는 씨근거리며 다시 백스텝을 밟았다.
‘이런 X발!’
쇄애액! 맹독이 발린 날붙이 몇 개가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가까스로 피해내 중독되는 것은 면했다.
맹독이 발려있는지는 어떻게 아냐고? 아까 이미 오지게 쳐맞아서 에테르를 세 개나 빨았기 때문이다.
‘마비독. 출혈독. 석화독. 탈기(脫氣)독. 아주 그냥 가지가지 한다 X발.’
나는 벌써 하나 밖에 안 남은 물의 에테르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아까워서 그렇다.
고작 함정 따위에 에테르를 이렇게까지 소모하다니. 생각보다 이 함정이 엄청 성가셨다.
‘게다가…!’
함정에 걸려서 신형이 무너지면, 피피핑! 어디선가 귀신 같이 내 목을 향해 주사기가 날아온다.
“아유 이 x발새끼가!!”
카아앙! 세븐 소드 피어스를 사용해 모두 차단해 버렸다.
노란 액체. 부식액이다. 나는 그것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주사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막는다… 여신님, 듀이를… 위해.”
하지만 놈은 그 말만 남기고 후다닥. 이미 공장건물 위로 훌쩍 몸을 내뺀 상태였다.
또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상태다. 잡힐 듯 안 잡힐 듯, 공장 주변을 계속 맴돌고만 있다. 미치고 환장 팔짝 뛰시겠네.
“뭐야 대체….”
나타나는 방향이 너무 신출귀몰하다.
촘촘한 간격으로 늘어선 공장 때문에 시야가 많이 제한된다고는 하지만. 나름 꼼꼼히 체크하며 놈을 압박하는데 어떻게 이리 잘 빠져 나가는 거냐고.
“무슨 어디로든 문이라도 있냐?”
나는 억울한 나머지 씨근거렸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비밀 통로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저 놈의 나와바리인데 없는 게 더 이상하잖아!
‘비밀 통로가 있을만한 곳이면…!’
지하. 혹은 실내.
실내라면 공장 건물 안일 확률이 높다.
“그런 거였구만!”
나는 펄쩍 점프해 공장 건물 지붕 위로 착지했다.
까악―! 까아악!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까마귀 떼들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다.
시커먼 파도가 사라지고 나자, 거기엔 역시나. 커다랗게 뚫린 구멍이 하나 있었다.
‘좀 더 높이!’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장의 굴뚝을 박차고 기어 올라갔다.
공장 지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단지에 있는 거대한 공장건물이 총 12개. 바둑판처럼 다닥다닥 붙은 모든 공장 지붕마다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다.
‘예상대로다.’
아마 공장마다 놈이 지하로 뚫어놓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거겠지.
조금만 생각하면 다다를 수 있는 상식적인 장치이다. 하지만 3보에 하나씩 함정이 발동되는데다, 놈이 두더지잡기 마냥 신출귀몰하게 튀어나오니 미처 생각이 못 미쳤다.
“두더지잡기? 좋지.”
나는 히죽 웃으며 멸망의 대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젠 오락실의 두더지잡기가 아니다. 이 전(前)농군의 아들 박정용. 한국 농촌식 두더지잡기를 보여주겠다.
‘안 그래도 두더지는 싫어하는 편이야.’
두더지는 멧돼지, 고라니와 더불어 밭을 망치는 천하의 10새끼 동물 3대장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핸드폰 전파도 잘 안 닿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땅을 곱창내고 굴 안에 파고든 두더지새끼를 어떻게 끌어내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멸망의 화염.”
나는 공장의 내부로 진입했다.
대검을 뽑아들고 시동어를 외쳤다. 푸화악! 검신에서 불꽃이 치솟는다.
‘보자.’
시선을 슬쩍 주변으로 돌렸다.
일반적인 지구의 공장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기자재들을 봐선 무기를 생산하던 공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기계장치의 동력원으로 보이는 새파란 룬의 돌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옳지. 딱 좋게 생겼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내리쬐는 태양빛보다도 찬란한 빛을 뿜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나는 그걸 계속 주시하며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삐빅. 자연스럽게 패널이 떠오른다.
[아이템 정보]
[명칭: 에테르 코어 (특대)]
[보정치: 마력의 지속 충전.]
[상세: 운터란트 상아탑에서 제작한 인위적 에테르 결집체. 연결된 대상에게 지속적으로 막대한 마력을 주입한다. 출력이 막강하여 생명체가 직접 충전받을 수는 없으나, 중계기가 있다면 가능하다.]
뭐 설명이 긴데. 요약하면 저 룬들이 공장을 돌리는 엔진들이다 이 소리다.
코어가 아직 빛나는 걸 보면, 마력을 머금고 있다는 소리겠지?
‘덕분에 일이 좀 수월해지겠어.’
나는 히죽 웃으며 에테르 코어 주위에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불꽃이 공장 내부로 삽시간에 번진다. 어렸을 때 불장난하던 기억이 나서 절로 유쾌해졌다.
화르르륵! 얼마 지나지도 않아 공장 전역이 꺼지지 않는 불로 가득해졌다.
“나와라 두더지야. 숨 막혀 뒤지기 싫으면!!”
굴 안에 파고든 두더지 잡는 법.
퇴치약 살 돈 있으면 약 치면 되고. 막대기 쑤셔서 잡는 건 스킬이 필요하다.
나처럼 스킬도 돈도 없으면, 지금처럼 굴의 입구마다 불을 놓으면 된다.
그러면 연기가 굴 안에 가득차고. 놈은 선택한다.
그대로 질식해 뒤지거나. 아니면 허겁지겁 빠져나오거나.
“잘도 탄다!”
참고로 두더지는 드럽게 맛이 없다.
웬만하면 밭에서 멀리 방생하자. 요즘은 내 밭 곱창내놓은 유해조수도 함부로 죽이면 여기저기서 개지랄하더라.
지들이 피해보상 해줄 것도 아니면서 아가리는. X발련들.
“하나 끝났고!”
나는 유쾌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금 펄쩍 뛰어 옥상의 구멍으로 탈출했다.
공장 특유의 매캐한 분진이 공장 안에 가득 차오르더니, 퍼퍼펑! 연쇄폭발을 일으킨다.
내가 빠져나온 구멍에서 한 템포 늦게 푸화악! 살이 익을 것 같은 불꽃과 열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아~ X발! 옛날 생각나고 좋구만!!”
숨 죽여 숨어있는 두더지놈 들으라고 일부러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공장의 옥상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불꽃을 흩뿌렸다.
사방이 활활 타는 화마로 가득해진다. 어둠에 잠겼던 계곡 전체가 밝아진다. 강 너머의 구시가지까지 빛이 닿을 정도였다.
“예술은! 폭발이지!”
콰앙! 콰콰쾅! 불길이 공장 곳곳에서 밤하늘 높이 치솟는다.
지축이 울리는 진동이 강물의 수면을 들썩들썩 흔들었다.
‘여기가 마지막 하나.’
마침내 11개의 공장에 불을 놓는 작업이 끝났다. 마지막 하나의 공장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대검의 불꽃을 조용히 꺼뜨렸다. 그리고 얌전히 옥상 난간에 앉아, 구멍을 주시하며 두더지 사냥의 순간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괴… 괴롭다… 살려줘… 듀라스… 여신님…!”
연기와 검댕으로 더럽혀진 모스크덴이 허겁지겁 구멍에서 기어나온다.
연신 무슨 말을 중얼거린다. 산소가 부족해서 헛소리를 하는가 싶다. 빠가각, 빠각. 놈은 맑은 공기를 탐하듯이, 머리에 쓴 깡통과 목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댔다.
“살고 싶었으면. 개기지나 말아야지.”
나는 연화를 사용해 소리소문없이 놈의 뒤로 접근했다.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일까. 모스크덴이 온몸을 바싹 굳혔다. 놈의 거대한 육체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자기 말로라도 직감한 모양이지. 연기에 절어서 골골대는 두더지가 그랬듯이.
‘사냥 표식.’
우웅. 놈의 머리 위로 선명한 검은 해골 표식이 떠오른다.
해골이 내게 턱뼈를 까딱이며 유혹한다. 얼른, 마무리를 지으라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죽어.”
나는 양손의 쌍검을 빙글 돌렸다.
푸직. 역수로 쥔 쌍검을 동시에 놈의 등에 쑤셔 박았다.
“아.. 어… 그… 아, 아… 프다….”
“어쩔.”
모스크덴의 단말마에 싸늘하게 응해준 다음. 양손을 각각 반대 방향으로 휘둘렀다.
우지직! 굵직한 허리 중앙으로 흑백의 검이 교차한다. 놈은 두 토막으로 거칠게 찢어발겨졌다.
“여… 여신님… 나… 시키는… 대로… 했는… 으아… 아으….”
“아가리 좀 합시다.”
나는 연신 중얼거리는 모스크덴의 대가리를 짓밟았다.
콰지직. 놈이 뒤집어쓴 양철깡통이 하릴없이 찌그러진다. 찢어진 깡통 틈으로 핏줄기가 콸콸 새어나왔다.
“그… 흐으… 우어… 그으….”
우는 것 같은 굵직한 신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도 모스크덴의 분리된 상반신과 하반신은 계속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곤충이 그렇듯이. 몸의 정중앙이 토막났음에도 신경줄이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으으… 괴, 괴물… 살려줘… 여신님… 괴물. 악마야… 무서운, 악마야…!”
놈은 저능아 마냥 질질 짰다.
레이저사이트의 붉은 빛이 내 얼굴에 와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 때문에 초점이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긴.
“괴물? 난 그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새빨간 화염에 둘러싸여서, 그 지옥불을 낸 장본인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나는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입술을 잔인하게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나를 괴물이라고 놀리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누구보다 괴물 같은 외형의 저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내가 요즘 패드립보다 싫어하는 욕인 건 알고 있냐?
안 그래도 재고가 얼마 없던 측은지심이 그 발언으로 품절됐다.
“괴물펀치 맞고 뒤져보자 오늘.”
나는 쌍검을 집어넣었다.
우지직.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주먹을 장전해 놈의 안면에 꽂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다시 검을 뽑고, 모스크덴에게서 급히 거리를 벌려야 했다.
베스타크를 횡으로 휘둘렀다.
“씁.”
채애앵! 금속음과 함께 작은 기역자 곡도가 튕겨져 나왔다. 곡도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 아래 까마귀 가면과 검은 고글. 그리고 시커먼 넝마 코트로 몸을 감싼 시커먼 남자가 난간 위에 서 있다.
“… 모스.”
까마귀 가면의 남자는 토막난 모스크덴을 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놈은 특이한 기역자 곡도를 내게 겨누었다.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물. 이미 괴물이구나. 죽여야 한다. 너는, 죽여야. 죽여야 해.”
미미르의 눈을 안 써도 알겠다. 방금 발언으로 놈의 정체를 간파했다.
인간사냥꾼 듀라스. 모스크덴과 함께 탈주용사 중 하나인 놈이, 지금 여기에 등장한 것이다.
“… 하. 그런 거였군.”
구시가지와 폐공장단지. 양쪽에 탈주용사가 한 명씩.
그리고 어느 한쪽에 전투가 벌어지면, 다른 한쪽이 뒤늦게 지원을 간다. 그런 구조였던 것이다.
‘전생에서도 협공을 당해서 죽은 거겠지.’
대충 전생의 사망 견적이 나온다.
처음부터 모스크덴과 1대1로 맞짱 뜬 게 아니라, 교전 중 나중에 합류하는 그림이면. 최소 지금보다 3배는 상대하기 까다로웠을 거다.
놈의 능력도 모를뿐더러. 듀라스보다 후미에서 깔짝깔짝 디버프만 날려댈 게 뻔하니까.
‘메모장 켜자.’
나는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곧장 망자의 함에 적어넣기로 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길목에 한 놈씩. 시간 끌면 연계ㅎ]
거기까지 썼을 때, 대충 망자의 함을 갈무리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듀라스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지척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채애앵! 놈의 검과 베스타크가 맞붙는다. 시커먼 고글 안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눈이 보인다. 나는 위태롭게 웃었다.
“이 새끼…!”
티가 안 나서 몰랐는데. 듀라스는 지금 격분하고 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 검으로 막아냈음에도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묵직한 참격.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