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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86화 (162/280)

186화

나는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대전제는 이것이다.

‘난 이미 죽었다.’

어디서?

‘오른쪽 구시가지 방향으로 갔다가.’

왜?

‘불명.’

여기서 막힌다.

이게 제일 문제다.

일단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켜 봤다.

“보자….”

우웅. 짧게 공명하며 음울한 보랏빛을 뿜는 랜턴. 빛의 세기와 방향으로 봐서는… 역시 지도상의 구시가지 쯤에서 죽은 것 같다.

그러면 역시 잔류사념을 회수하러 다시 구시가지로 가야 하나?

‘아니. 굳이?’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본 결과.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내 주둥이로 이런 말하기도 좀 남사스럽지만. 나는 나름대로 이 파라이소 대륙 최강급 무력을 지닌 사람이다.

“시가지만 피해가면 되는 거 아냐?”

내 추측대로 길목을 막고 있는 게 문제의 탈주용사들이고. 내가 그들에게 죽은 거라면.

놈들이 전설의 3용사인 알테어급으로 강하지 않은 한… 아니, 강하더라도. 내가 절대 1대1로 졌을 리는 없다.

‘놈들은 한 길목에 뭉쳐 있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데. 그러면 내가 피해가면 그만이다.

그냥 똥 밟았다 치고 피해가겠다.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있으면 화라도 나겠지만. 기억도 없다. 이성적으로 사고 가능한 지금 나온 최적의 수는 그것이다.

“… 흉마는 좀 많이 쌓였는데.”

나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가슴에 납덩이같은 게 묵직하게 얹힌 느낌. 이번 죽음으로 흉마가 꽤 빡세게 쌓였다.

불사의 계약을 재계약한 이후 흉마가 쌓이는 느낌이 확실히 느껴진다.

‘분노… 공포, 혼란.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나?’

흉마는 죽는 순간 느낀 어두운 감정의 총량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건 부활 경력 150회를 상회하는 불사신 권위자, 박정용의 오피셜이다.

6개월 전에 마르크트레스에서 적랑 살려보겠다고, 목숨을 건 에테르 뽑기로 14번이나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으로 흉마는 그리 많이 쌓이지 않았다.

‘스스로 각오하고, 내 의지로 죽어서 감정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 때 쌓인 흉마는 기껏해야 멸망의 화염을 앞으로 두, 세 번 더 뿜을 수 있을 정도.

내가 견딜 수 있는 흉마의 총량을 100이라고 쳤을 때, 2~3정도의 미량이다.

“근데 방금 한 번으로, 10번은 쓰고 남을 만큼 모였다?”

아주 획기적이고 싸발적이며 X같은 방식으로. 야물딱지게 뒤졌나 보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구시가지 쪽으로는 이제 시선도 두지 않았다.

‘그러면 더더욱. 구시가지로 가면 안 되지.’

나머지 두 갈래 길 중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탈주용사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렇다고 망자의 계곡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 나이트레아한테서 정보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언제 올 줄 알고. 그건 너무 불확실하다.

결국 그냥 무작위로 고르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결국 성녀의 문장을 꺼내들었다.

“양자택일은 이게 국룰이지.”

나는 문장을 공중으로 높이 튕겼다.

앞면의 여신 그림은 중앙 폐공장. 뒷면의 달 그림은 왼쪽의 유원지로 하자.

“욥.”

팅, 맑은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문장을 낚아챘다. 손등에 놓고 천천히 열어봤다.

여신의 그림. 앞면이다.

“폐공장. 가볼까.”

나는 원래 있던 쪽지를 버리고, 새로운 쪽지 두 개를 작성했다.

하나는 전에 있던 문구를 그대로 베껴쓴 것. 그리고 하나는 이번에 새로 작성한 것이다.

[첫 번째 시도. 오른쪽 구시가지.]

[두 번째 시도. 중앙 폐공장지대.]

제발 이번에야말로. 내 선택이 맞았길 바란다. 그런 생각과 함께 쪽지를 갈아치웠다.

우우웅. 익숙한 낮은 울림이 울렸고. 나는 망자의 계곡 폐공장 단지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날아갔다.

* * *

까마귀가 어디로 날아가나 했더니. 전부 이 폐공장 단지에 모이기라도 하나 보다.

까악, 까아악!

고개를 들어보면 음습한 안개가 사방에 깔렸고. 그 위로 까마귀 투성이다.

공장 지붕에도 온통 까마귀 대열. 무너진 전신주 위에도 까마귀. 얼기설기 이어진 전선 위에도 까마귀…. 그리고 공장의 드높은 굴뚝 위에도 까마귀 몇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분 나쁜 곳이네 X발….”

― 뭐, 여기는 500년 전부터 그리 기분 좋을만한 장소는 아니었지.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하핫.

내가 팔을 부비며 중얼거리자 수호 형님이 오랜만에 맞받아쳤다.

요즘 통 안 놀아줬더니 심심했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동무를 해줬다.

“500년 전에는 뭐 있었습니까.”

― 그냥 숲이 우거진 계곡이었어. 망자의 계곡이란 이름은 아니었고… 당시엔 마왕성이 있었다. 첫 번째 마왕. 스트라토 헬릭스가 살았지.

“첫 번째 마왕…?”

첫 번째 용사의 입에서 언급된 첫 번째 마왕이라.

본래 나부터가 옛날 얘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만. 예언이니 뭐니 해서 옛날 일에 엮이는 처지가 돼서 그런가. 조금 흥미가 동했다.

나는 당연히 그에 대해 자세히 추궁했지만. 수호 형님은 의외로 단칼에 거절했다.

― 그쪽으론 자세히 말해주진 못하겠네. 복잡하고 구구절절해질뿐더러… 그 마왕 아재를 설명하려면, 디아나의 얘기가 빠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안 해.

저 부분만큼은 진짜 칼 같네. 나는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입맛을 다셨다.

“… 마녀 얘기는 진짜 하나도 안 해줄 겁니까? 우리 사이가 있는데요 형님.”

― 냄새나는 사내새끼보단 디아나가 훨씬 중요하거든. 장담하는데, 앞으로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애의 과거사를 입에 담는 일은 없다. 미안하게 됐네.

목도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수호 형님.

평소처럼 ‘디아나의 사생활’ 운운하며 장난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 그냥 디아나를 죽일 생각만 해. 개노잼 이세계 역사 따위 알아서 어디 쓰겠어. 응?

들을 생각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는 정중한 압박.

그래. 더 이상 구질대는 건 관두자. 사람이 나댈 때와 안 나댈 때를 잘 구별해야 되는 법이다.

“… 예. 그러죠.”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폭이 넓은 강줄기와, 그 너머에서 안개 속에 어른거리는 구시가지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며. 공장 옆의 가도를 계속 걸어갔다.

“…!”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지면을 힘껏 박차고 후방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콰콰쾅! 내가 방금까지 서있던 지면에서 폭염이 치솟았다. 올라온 화염이 주변에 옮겨붙나 싶더니, 연쇄폭발을 일으킨다.

푸화악! 가도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함정. 부비트랩이었다.

히어로 센스가 발동된 순간 회피했지만 살짝 늦었다.

카가각! 검을 땅에 박고 종잇장처럼 날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었다. 시선을 살짝 들어 타오르는 지면을 향했다.

어느새 폭염 속에서 일렁거리는 거대한 신형 하나를 눈에 담았다.

“… 뭐야. 넌.”

맨질맨질한 양철깡통을 뒤집어쓰고, 왼쪽 눈 자리에는 기계장치가 부착된 레이저 사이트가 달렸다.

반쯤 곤충화된 몸. 세 개의 곤충 다리. 얼기설기 조잡한 철갑옷. 그리고 사출기가 달린 건틀릿과, 거기로 연결된 거대한 철제 배낭.

“…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고독.”

거구의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총기가 느껴지지 않는 파리의 겹눈이 깡통 안에서 이리저리 뒤룩거린다. 그러나 왼눈의 레이저사이트는 줄곧 내 이마에 박혀 있었다. 나도 마주 노려봐줬다.

그러자 삐빅. 상태창이 등장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고독의 모스크덴]

[체력: 3310/3310 마력: 1250/1250]

[힘: 435 민첩: 459 지능: 326]

[상세: 역병 창궐로 폐쇄된 디스트릭트10에서 모든 괴충을 살해하며 3년간 살아남은 정체불명의 인간. 아신의 뜻을 저버린 용사에게 죽음의 철퇴를.]

왜지.

내 추측이 틀렸나? 왜 고독의 모스크덴이 여기를 틀어막고 있지.

설마….

‘처음부터, 두 길목을 한 명씩 막고 있었던 거냐?’

그러면 전생의 나는 1대1로 인간사냥꾼 듀라스라는 놈한테 패배했다는 건가.

대체 놈이 얼마나 강하길래? 한밤중에 기공술을 비롯해 에테르 풀도핑을 하면 거의 600레벨에 달하는 스펙이 나올 텐데. 그걸 뛰어넘는 엄청난 괴물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세 갈래 길에서 꽝 두 개를 고르는 나도 참 X발.’

새삼 나의 절망적인 뽑기 운에 탄복했다. 마빡을 짝, 소리 나게 짚었다.

역시 난 어디서 도박 같은 거 하면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새끼다.

“나… 막는다. 너, 못 지나간다. 지킨다. 여신님… 나보고, 지키랬어.”

내가 한숨을 뻑뻑 흘리자니. 모스크덴은 연신 중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건틀릿을 들어 올리더니. 퓨퓨퓩! 건틀릿의 사출구에서 무언가 발사되었다.

나는 미간을 슬쩍 모았다.

‘느린데?’

채챙!

나는 땅에 박았던 베스타크를 휘둘러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공중에서 파괴되어 내용물을 흩날리는 그것은, 작은 주사기와 앰플 다발이었다.

공격에 매서움이 없었다. 히어로 센스도 미동도 안 했다. 이렇다 할 위협이 되지 못했다는 소리다.

“이게 뭔….”

그리고 주사기 밖으로 흩날리는 노란 액체가 새끼손가락 끝에 스친 그 순간.

치지지직. 손끝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끄, 으악!!”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에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액체가 튄 손가락을 흑익으로 감쌌다.

부글부글. 생살이 끓는 듯이 기포가 올라왔다. 새끼손톱 안쪽이 괴상한 모양으로 변형돼 있었다.

“너… 못, 지나간다.”

어눌했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린다.

모스크덴은 레이저사이트를 내게 맞추며 곤충의 다리를 파닥거렸다. 직후 내게 겨눠진 건틀릿에서 주사기 다발이 쏟아졌다.

“크으!”

나는 차마 검으로 쳐낼 엄두도 나지 않아, 페이탈 쏜즈를 발동했다.

파바바박! 십 수 가닥으로 갈라진 망토의 가시가 멀찍이서 주사기들을 모두 저지했다. 노란색 용액을 흠뻑 뒤집어쓴 흑익에서 치지직, 하는 살벌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리고 스르륵.

이내 페이탈 쏜즈가 해제되며, 망토는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뭐, 뭐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망토 자락을 만졌다가, 흠칫 놀랐다.

보통 찢어져도 금세 자가수복되는 흑익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했다. 게다가 지금도 연신 녹아내리며 바닥에 처덕처덕 검은 진물이 떨어지고 있다.

[상태이상 ― 부식 (대)]

[아이템, 신체 등이 일정 기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부식의 수준에 따라 아이템, 신체가 영구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상태이상. 그렇단 말이지.

망토가 이 상태면 방어도도 기대할 수 없고… 흑익으로 공중전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소리군.

나는 이를 씨근거리면서도, 납득하고는 쌍검을 쥐었다.

“디버퍼구나 너?”

견적이 나왔다. 파고들 수 있으면. 공격권 안으로 한 번만 진입하면 승리는 거의 확실하다.

저렇게 졸렬한 타입이랑은 싸워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한다. 하지만 스펙 자체는 내가 훨씬 위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접근전. 속공!’

전투의 방침이 결정됐다.

나는 놈에게 쇄도하기 위해 바닥을 힘껏 밟았고.

“어!?”

꾸욱, 무언가 이상한 것이 밟히는 느낌이 올라온다. 히어로 센스가 어김없이 발동되었다.

처처척! 좌측의 공장 벽면이 활짝 열리며, 안에 숨어있던 대형 포탑이 드러났다. 내가 서있는 골목을 정확히 조준하던 포탑이 연신 불꽃을 뿜는다.

“X발!”

또 함정. 나는 씨근거리며 곧장 백스텝을 밟았다.

투두두두! 손가락만한 총알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방금까지 서 있던 길목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 못, 지나… 간다.”

아까보다 멀어진 모스크덴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나는 놈을 가만히 노려보며. 마른 침을 한 덩이 삼켰다.

‘그렇군.’

여기는 저 놈의 구역. 머저리 같은 말투와 다르게 잔대가리가 좀 돌아가는 모양이다.

이런 함정이 공장지대 도처에 설치되어 있다는 거군. 접수했다.

‘… 쉽지 않겠는데.’

나는 개싸움의 예감에 무기를 고쳐쥐었고.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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