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세 갈래길
나는 성당 천막 구석에 스칼로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아까 잡화점에서 샀던 와인이 담긴 나무 대접을 들고 있었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서로 나누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퍽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듣고도 믿지를 못해서 재차 물었다.
“둘 다 시험은 통과했는데… 알드콘이 나가길 거부했다고요?”
스칼로는 내 물음에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착잡한지 와인을 원샷으로 들이키더니. 투덜대듯이 말한다.
“꼬마애가 하나 있었어. 생긴 걸 보고 자기 또래라고 생각한 건지… 똥자루 영감에게 유난히 달라붙는 ‘요나’라는 여자애였지. 우리가 시험에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애가 흑혈병에 걸려버렸네.”
나는 원래부터 한국식 신파극을 극혐하는 편이다.
이유는 잘 만들면 내 얘기 같아서 X같고. 못 만들면 기만하는 것 같아서 X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얘기 듣지도 않았는데, 이미 기분이 바닥까지 X같아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세.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겠다고 되도 않는 발악을 한 끝에… 계곡 하류 병자마을의 은자 알테어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지.”
“흐음.”
나는 탄성을 흘리며 낮에 봤던 붉은 머리 여자를 떠올렸다.
스칼로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꿈꾸는 상사화를 가지고 가이서스로 돌아갔을 때. 이미 요나는 완전히 변이가 끝나 있었네. 그리고 똥자루 영감마저 그 과정에서 흑혈병에 걸려버렸지.”
“그럼 그 꼬마애는….”
“똥자루 영감이 직접 쳐죽였네. 계곡 어딘가에 유해가 버려져 있겠지.”
“… 그렇군요.”
오다가 내가 태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피식, 오히려 웃었다.
반쯤 괴물이 된 채 사경을 헤매는 알드콘을 쳐다봤다.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패드립을 찰지게 치던 노인네가 X팔, 사실 애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따듯한 남자라니. 반전매력 오지네요. X바꺼.”
“커허허. 내 말이.”
스칼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스칼로를 잠깐 주시했다.
그는 사실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아직 흑혈병 환자도 아니니까.
실제로 알드콘조차도 얼른 자기 손절 치고 갈 길 가라고, 틈만 나면 다그쳤다고 한다.
“… 스칼로까지 병이 옮으면 기분 더 개같아지니까 그랬겠죠. 저 양반 성격상.”
“그래서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네. 나이 처먹고 골골대면 얼마나 서러운지 내가 모를 것 같나? 빌어먹을 똥자루 노친네 같으니.”
스칼로는 천막 구석의 가마솥에 팔팔 끓는 새파란 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로의 잔이 비었길래 와인을 꼴꼴꼴 채워줬다. 그는 곧장 들이켜 없애버렸다. 도수가 좀 높은 와인이다 보니, 그의 매끈한 개구리 피부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역시. 친한 거 맞다니까.’
미운 정이 이렇게 무섭다. 옘병싸맞을.
스칼로의 얼굴을 보며 나는 가만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역시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친구. 자네도 1년 사이 많이 변했군.”
“준내 잘생겨졌죠 X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크허허. 그 농담 잘 치는 건 여전한데 말이야.”
호탕하게 웃던 스칼로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이 사뭇 진지하다.
“눈빛이 많이 죽었군.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고, 그냥 짧게 웃었다. 목이 근질거려서 와인을 쭉 들이켰다.
X발 와인이 뭐 이리 쓰냐.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나.
“… 뭐, 이래저래 있었습니다.”
“… 그래.”
스칼로도 딱히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잔을 슬쩍 부딪치고 한동안 술만 들이켰다.
가마솥에서 올라온 파란 빛깔로 물든 스칼로의 뒤통수. 나는 문득 그것을 주시했다. 곧 삐빅, 그의 능력치가 패널 위로 표기됐다.
[명칭: 스칼로 크랙스]
[별칭: 163351983번째 정식 용사. 카마르스 전설의 3용병. 개구리 아저씨.]
[LV. 307]
[체력: 2350/2350 마력: 2100/2100 신체상태: 피로]
[힘: 552 민첩: 21 지능: 404 히어로 센스: 14]
강하다.
내 시험의 장막 지인 중에서, 크라네이드를 제외하면 그가 제일 강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시험의 장막 멤버 중에 힘숨찐이 셋이나 있었네….’
알드콘은 확인해보니 50레벨 초반대의 그저 그런 스탯이었지만. 스칼로는 민첩을 제외하면 다른 스탯은 나를 한참 웃돌 정도다.
‘게다가 여기도 스탯 기행종이잖아.’
이쪽은 또 힘과 지능, 체력과 마력이 전부 비등비등하군.
스칼로는 알드콘과 함께 계속 여기 머물렀다고 했다. 그러니 저 스탯의 강력함은 대부분 원래 세계에서 계승된 것일 테지.
대체 어떻게 싸우길래 저런 스탯이 나오는 건지 호기심이 폭발했다. 양념반 후라이드반의 화신인가?
“… 아무튼 알겠습니다. 볼일이 있어서 가봅니다. 고생하십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등에 멘 대검과 허리의 쌍검을 잠깐 점검하고, 곧장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다니. 어딜 말인가?”
“자드키엘을 죽이러 갑니다.”
스칼로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나는 곧장 대답했다.
당연히 스칼로는 특유의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뭐라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십쇼. 후딱 대가리 박살내고 올라니까. 거 마왕새끼 창자 뽑아다 순대국밥이나 끓여먹읍시다. 다대기 많이 준비해 두세요.”
“아니, 이봐 친구… 지, 진심인가?”
스칼로가 가마솥을 젓던 손을 멈췄다.
나는 최대한 옛날 느낌이 나도록 입꼬리를 비틀었다.
“농담을 했으면 몰라. 내가 빈말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 아니. 없었지.”
“예. 갔다 옵니다.”
아무렴. 사나이 박정용은 한 아가리로 두 말하지 않는다.
마녀 살해는 좀 실감이 안 나더라도. 이렇게 되면 자드키엘은 꼭 죽여야겠다.
잭이 부탁한 것도 있고. 내 소중한 친구목숨이 달려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
나는 천막을 나가기 직전. 탄성을 흘리며 스칼로를 돌아봤다.
어차피 스칼로는 여기서 환자를 돌봐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완전히 잠식돼서 괴충이 되면 몰살이 순식간이니까. 그는 보호자 겸 처형자다.
그 점을 생각해 보니, 부탁할 거리가 하나 생긴 것이다.
“그, 마을 남쪽 가장 끝에 있는 천막에 제 일행들이 있걸랑요. 알테어한테는 비밀로 걔네들 좀 지켜주십쇼 스칼로.”
“아… 그래. 알겠네.”
“나름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잘 좀 부탁할게요.”
“알았네. 친구 부탁이니, 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지.”
스칼로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진짜 가자.’
은근히 신경 쓰이던 루시와 유리아의 안전까지 이렇게 확보해 놨다. 한 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마을의 출입구 너머… 으슥한 안개 속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아, 아아!”
그런데 문득 등 뒤에서 타타탁,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가녀린 탄성도 함께였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유리아가 어느새 쫓아와 입구 부근에 서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입구컷을 시전했다.
“혼자 갈 거다. 자체 하드모드 사절.”
도리도리. 유리아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따라올 생각 없다는군. 네가 루시보다 낫구나. 불사의 마왕 해볼 생각 없니?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루시는 뭐 하고 혼자 나왔냐.”
“…….”
유리아가 두 손을 모아 뺨에 갖다 대더니, 지그시 눈을 감는 시늉을 했다.
잔다는 모양이다. 속 편하군. 나도 나름 대범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루시를 볼 때마다 한 수 접어주게 된다.
나는 이번엔 유리아 본인을 가리켰다.
“그럼 왜 나왔냐. 뭐 할 말이라도?”
“아.”
유리아는 내 말에 퍼뜩 어꺠를 떨었고. 곧 준비해온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적었다.
[조심하세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헛웃음을 실실 흘렸다.
저 말 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온 거냐. 싱겁기 그지없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
나는 유리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친다. 루시랑은 또 다른 감촉이라 비교하는 맛이 쏠쏠했다.
“너도 얌전히 잘 숨어 있어라. 내가 마왕 모가지 따올 때까지.”
“…….”
끄덕끄덕. 유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신뢰가 담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계곡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흐음.”
나는 계곡의 상류로 계속 올라가던 도중. 나이트레아에게 받아온 망자의 계곡 지도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하류의 막바지. 곧 도착하는 중류로 가게 되면….
‘상류까지 이어지는 길이 총 세 개군.’
지금 내가 있는 하류 부근은 널찍하게 이어진 숲으로 한 길이다. 하지만 중류에서부턴 강을 중심으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진행방향의 오른쪽. 디스트릭트10의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길.
진행방향의 정면. 디스트릭트10의 폐공장단지로 이어지는 길.
진행방향의 왼쪽. 유원지 ‘스키드 랜드’의 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 길.
셋 모두 자드키엘이 있다는 상류까지 이어지지만, 어디가 제일 빠른 길일지는 지도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류의 시작점. 중류의 세 갈래 물길이 합쳐지는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7월 13일, 23시 15분]
[장소 ― 운터란트. 디스트릭트10, 망자의 계곡 하류 부근]
꽤 오랜만에 생명의 위험을 알리는 표식이 등장했다.
“… 오우. 안 나오면 섭하지.”
얼떨떨하게 패널을 읽는 한 편. 그것으로 반쯤 확신했다.
세 갈래길 중 어딘가에 문제의 탈주용사들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타이밍에 회귀점이 갱신될 이유가 없으니까.
‘선택을 잘 해야겠군.’
나는 턱을 긁적이며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뭐 탈주용사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렇다고 망자의 계곡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그러면 이게 국룰이지.”
손가락을 번쩍 들고 코카콜라 척척박사님을 소환했다.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고, 또 먹으면 배탈나서, 병원가서 주사까지 맞은 결과. 딩동댕동 척척박사님은 오른쪽의 구시가지 길목을 가리켰다.
“일단 준비 해놓고.”
나는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샛길로 빠지면서도, 메모를 끼적여 망자의 함에 넣을 준비를 했다.
거의 반자동적인 프레이즈였다.
[첫 번째 시도. 오른쪽 구시가지.]
제발 이 선택이 맞았길 바란다. 그런 생각과 함께 망자의 함에 쪽지를 넣었다.
우우웅. 익숙한 낮은 울림이 울렸고. 나는 망자의 계곡 구시가지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