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성녀님, 오오 성녀님
그 뒤로 정확히 사흘 후. 레비아탄은 본래 거점인 디스트릭트1 지역에 착륙했다.
이 엄청난 덩치로 마르크트레스에서 운터란트 중심부까지 오는데 고작 사흘 밖에 안 걸렸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터무니없이 굉장한 일이다.
나와 설백이 미텔란트에서 마르크트레스까지 줄창 걸어서 꼬박 한 달 좀 넘게 걸렸으니. 대충 아음속 정도는 나오는 모양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 뒤로 가이서스까지 오는데 또 한 달. 터 잡고 생활기반 닦는 데 두 달….’
사실상 정보를 제대로 조사한 건 근래 3개월 정도였다. 그나마도 한 1개월 정도는 다른 조사로 소비되었다.
내게 있어선 나름 중요한 조사 작업이었는데. 조사의 대상이 누구인고 하면….
‘알드콘이랑 스칼로.’
그렇다.
시험의 장막 개노답 4형제의 주축들이다.
망자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그들을 찾기 위해 시간을 꽤 쏟았다.
‘하지만 가이서스에선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아직까지 유의미한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벌써 흑혈병에 걸려서 삼도천 넘어간 거 아닌가 가끔 생각하지만… 일부러라도 그런 가정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망자의 계곡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자드키엘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러나저러나 망자의 계곡 최심부에 진입해야 한다.
좀 더 깊은 곳에선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흐음. 뭐, 대충 네가 하고 싶은 애기는 알았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가이서스의 작은 컨테이너 안.
나는 종이 뭉치를 한아름 안아든 유리아와 필담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저 종이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나는 펜과 종이를 항상 많이 가지고 다닌다.
언제든 망자의 함에 유언을 적어 넣을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인데. 의외의 쓰임새에 헛웃음을 흘렸다.
“통찰의 눈이라는 게, 성녀들만 쓸 수 있는 고유스킬이다? 너희 선조였던… 루나 루에바? 그 사람한테서 이어진 스킬.”
내가 찰떡 같이 요약하자, 유리아가 끄덕끄덕.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그나저나 루나 루에바면… 성녀의 문장 설명란에 적혀 있던 게 그 이름 아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생각난 김에 성녀의 문장을 꺼내봤다.
[명칭: 성녀의 문장]
[보정치: 달이 뜬 날에 한해 모든 능력치 1.5배 적용. 만월 시 2배 적용.]
[상세: 고대의 성녀 루나 루에바의 가호를 받은 엠블럼. 달의 힘이 저장되어 야간 전투능력이 상승한다. 타락한 최초의 용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강화 가능 회수: 1]
역시. 내 기억대로였다.
“성녀님. 이거 뭔지 알아?”
나는 혹시나 싶어서 문장을 유리아에게 휙 던졌다.
유리아는 갑자기 뭔가 날아오자 당황했지만, 가까스로 받아냈다.
곧 그녀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뜨였다.
“어, 아. 아아….”
유리아가 뚝뚝 끊어지는 신음을 내뱉었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쓸어보더니. 이내 가슴팍에 가져가 꽉 쥐었다.
“끄… 우… 흐흑.”
유리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줄줄 흘러 성녀의 문장을 적셨다. 한동안 엠블럼을 끌어안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오열했다.
…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군. 저 정도로 기뻐할 줄은 몰랐다.
“감격적인 상봉은 좋은데. 준 거 아니고 대여니까 오해는 말고.”
홀라당 뜯어 먹힐까봐 추잡하게 한 마디 얹었다.
어쩔 수 없다. 야간 전투능력을 무려 1.5배나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사기 아이템이라고. 미안하지만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진 아무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
“내 목적을 이루고 나면… 줄게. 그거.”
그런 무책임한 구두계약과 함께 엠블럼을 휙 빼앗았다. 유리아는 비어버린 손을 망연자실하게 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올려다본 유리아가 싱긋 웃었다. 순간 정신을 뺏길 정도로 투명한 미소였다.
[알림: 조건 충족]
[성녀의 믿음과 염원이 문장에 담겼다. 아이템 ‘성녀의 문장’ 강화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 순간. 그런 패널이 눈앞에 뜨더니.
파아앙! 성녀의 문장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유리아도 잠깐 눈을 질끈 감고 그 빛이 수그러들길 기다렸다.
“뭐, 뭐냐 대체.”
이내 빛이 잦아들었다. 황급히 성녀의 문장에 이상이 생겼나 살펴봤지만. 문장은 외관상 딱히 변화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명칭: 성녀의 문장]
[보정치: 달이 뜬 날에 한해 모든 능력치 1.5배 적용. 만월 시 2배 적용. 고유스킬 ‘통찰의 눈’ 사용 가능.]
[상세: 고대의 성녀 루나 루에바의 가호를 받은 엠블럼. 달의 힘이 저장되어 야간 전투능력이 상승한다. 타락한 최초의 용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유지를 계승한 또 다른 성녀의 염원이 깃들어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었다.]
[강화 가능 회수: 0]
“통찰의… 눈?”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롭게 추가된 성녀의 문장 보정치 항목. 우리의 핫 토픽이었던 그 스킬이 거기에 박혀 있었다.
내가 그 말을 중얼거리기 무섭게 삐빅, 이번엔 스킬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킬 정보]
[명칭: 통찰의 눈]
[효과: 거짓과 허상을 파훼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상세: 모든 허위, 기만, 거짓을 거절하는 힘. 허상은 붕괴시키며, 거짓말을 꿰뚫고, 실체 없는 것을 세상에서 배제한다. 스킬 레벨은 증강이 불가하다.]
설명이 오지게 추상적이어서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문제의 ‘통찰의 눈’ 스킬이 성녀의 문장에 깃들었다는 건 확인됐다.
‘이거… 아다리 안 맞았으면 평생 강화될 일 없는 조건이잖아.’
아무래도 유리아 루에바 같은… 성녀의 피가 흐르는 존재와 접촉하는 게 강화의 조건인 듯하다. 나는 헛웃음과 함께 혀를 찼다.
‘아니, 그게 아닌가.’
애초에 뭐 고대 성녀의 예언에 따르면, 내 행동은 전부 예견된 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유리아와 만나는 것도 딱히 신기할 것도 없나?
예언이나 천기누설 같은 건 믿기 싫은데. 운명론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 성녀님.”
어쨌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유리아를 불렀고. 유리아는 아까보다 경계심이 훨씬 줄어든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머쓱하게 말했다.
“너 이제 자유다.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어졌어.”
“……?”
“갈 길 가봐. 고생 많았다 야.”
“…???”
유리아는 갑작스런 석방 명령이 이해가 안 되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 말든. 나는 더 이상 꾸물거릴 이유가 없으니 파우치와 배낭을 몸에 두르고 나갈 채비를 했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슬쩍 손을 들어 유리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날렸다.
“오빠가 기분 좋아져서 이 집 쏜다. 너 가져. 씩씩하게 오래 살아 인마.”
“아… 어…!”
“이상한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나 금발 태닝 양아치는 피해 다녀. 나 포함해서 아무도 믿지 마라. 또 호구된다.”
끼익, 덭컹.
덕담 몇 마디 주워섬기고, 벙찐 유리아를 뒤로한 채 컨테이너를 나왔다.
“가볼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향은 남쪽. 망자의 계곡이 있는 방향이다.
이렇게 형편이 좋게 풀리다니. 적어도 출발은 좋군.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 * *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곧 다 쓰러져가는 철책과 기동을 멈춘 공장이 늘어선 마을로 진입했다.
삐거덕. 부서지기 일보직전인 마을 입구의 격자문을 열자니. 양쪽 기둥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환영 팻말이 시선 가득 들어왔다.
[운터란트 최고의 테마파크, 에라크마에 어서오세요.]
입구에 써있는 표어는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이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모양이다. 꼬라지를 보니 괴질 때문에 한참 전에 쫄딱 망한 듯싶었지만.
나는 슬쩍 한숨을 내쉬고 위치 정보를 미미르의 눈으로 스캔했다.
[위치 정보]
[상세: 운터란트, (구)디스트릭트10. 망자의 계곡 시험의 장 부근]
지도와 함께 떠오르는 세부적인 정보 몇 토막.
이 에라크마라는 마을이 바로, 나를 제외한 시험의 장막 최후 16인이 떨어졌던 장소. ‘망자의 계곡’ 시험의 장이다.
‘여기서도 스칼로랑 알드콘은 없었지….’
물론 이곳도 용사시험은 진작에 끝났고. 지금은 그냥 병자들이 들끓는 운터란트 변방의 마을일뿐이다.
오늘은 이곳에 숨어있는 루시를 데리고 망자의 계곡 더 깊은 곳으로 향할 생각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나는 퀴퀴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가. 이내 우뚝 걸음을 멈췄다.
“…… 흐긋.”
그러자 뒤에서 슬금슬금 쫓아오던 유리아도 퍼뜩 걸음을 멈췄다.
나는 흘깃 뒤돌아봤다. 유리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움츠렸다.
“야. 왜 따라와.”
“…… 우.”
유리아는 하얀 눈동자를 내리깔며 손가락을 꿈지럭거릴 뿐이었다.
벙어리였지 참. 나는 단답형으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낼만한 질문을 잠깐 고민했다.
이내 입을 열었다.
“돈 필요하냐? 알바라도 해봐. 너 정도 외모면 술집 같은 데서 종업원으로 써줄걸?”
“…….”
“나도 운터란트 금화는 더 이상 없어. 혼수도 없이 내집 마련한 걸로 만족해라.”
도리도리도리.
유리아는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 내집 마련으론 만족할 수 없다 이거냐?
‘이 쌔기가….’
물에 빠진 년 건져놨더니 보따리까지 뺏어가려고 하네. 그렇게 안 생겨서 생각보다 욕심보가 불러 터졌구만.
내가 괘씸해서 한 마디 하려는데. 유리아가 재빨리 종이에 글씨를 적어 내게 펼쳐보였다.
[혼자는 너무 무서워요.]
종이 위로 빼꼼, 눈물을 머금은 시선을 보내는 유리아.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이 쌔기가 사람 마음 약해지게.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뭐, 넘어갈 거 같냐?
여자에 미쳐서 호구짓을 일삼던 옛날의 순한맛 박정용이 아니라고 인마.
“… 아까 내가 뭐 하러 가는지 말 안 했냐? 나랑 같이 있으면 더 무섭다. 너 뒤져.”
[저 혼자 있어도 죽을 거예요.]
유리아는 곧바로 다음 종이를 내밀었다.
순간 육성 대화인 줄 알았다. 반응이 칼 같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미리 써놓은 듯했다.
‘한 방 먹었군.’
유리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짧게 친 단발이 손길에 따라 찰랑거린다.
키가 루시보다 작아서 쓰다듬기가 훨씬 편했다.
“그럼 교단 천막으로 돌아가 봐. 남은 신도들이 떠받들어 주겠지.”
그 전에는 교단의 노리개였으니 교주한테 보호를 받았을 거다. 위생 상태나 영양상태를 보니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한 것 같긴 하다만.
그러나 그 구원천사교는 아까 내 손으로 박살냈다. 교단의 잔당에게 가도 형편 따라 죽는 파리 목숨이겠지만… 그래도 오늘 보단 오래 살지 않겠는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다는 걸 알면, 그 사람들이 저를 죽일 거예요.]
그런데 유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펜을 빠르게 놀려 그런 문장을 보여줬다.
내 생각보다 그녀는 현명했다. 당연히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 쯧.”
솔직히 알고 있다.
이 동네에 쟤를 혼자 내버려두면. 오늘 내로 사지분해 돼서, 고기 따로 장기 따로 암시장에 팔린다.
이거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따라가게만 해주세요. 제발 부탁해요.]
젊은 처녀나, 어린 사내아이를 끓여 먹으면 흑혈병이 낫는다.
요즘 이 주변에선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 내가 철저하게 조사해봤으니 잘 안다.
“… 에효.”
지금 여자 혼자서 가이서스 지역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으면. 갱 단원한테 시집가거나 창녀가 돼서 포주들한테라도 보호 받는 수밖에 없다.
“죽으면 내 탓만 하지 마라.”
그래서 따라오라고도 못 하겠고. 따라오지 말라고도 못 하겠다.
그냥 그렇게 말하고 가던 길 먼저 걸어갔다.
[고마워요.]
유리아는 화색을 띄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대문짝만하게 쓴 그 글을 내게 들이밀었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다시 에라크마 시가지를 걸어갔다.
“나 왔다. 별 일 없었지?”
덜커덩. 중간에 후줄근한 오두막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 발장난을 치던 루시가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오. 드디어 왔군 용사. 뭐 하느라 이리 늦었….”
그녀는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오다가, 내 뒤에 숨은 유리아를 보고 흠칫 몸을 물렸다.
“…….”
“…….”
잠깐 둘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오갔다.
루시는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고양이처럼 경계했고. 유리아는… 내 뒤로 바짝 숨어 버렸는데. 루시의 뿔과 날개 때문에 오히려 눈은 반짝이고 있다. 관심이 지대해 보였다.
‘안 무섭나 얘는?’
보통 루시의 뿔이나 날개를 보면 마족인줄 알고 기겁을 하던데. 유리아의 반응은 좀 낯설다. 설마 마족 자체를 처음봐서 무서운 줄도 모르는 건가?
“허. 진짜 재주도 용하다.”
루시가 철썩 달라붙은 나와 유리아를 징글징글하다는 양 쳐다봤다.
“어디서 이렇게 자꾸 여자를 꾀어오는 게냐. 나 화나라고 일부러 그러냐?”
… 내가 오히려 묻고 싶다. X발.
나는 한숨을 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벽지 썩는 냄새가 오래만의 귀환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