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75화 (151/280)

175화 번외3. 검은 마녀와 붉은 늑대

“눈을 감아라.”

엘프리데 헥세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그 한 마디로 시작된다.

짐승의 포효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중후하면서도 공격적이고, 한 순간에 모든 이목을 앗아가는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다.

“무슨 소리가 들려와도 눈 뜨지 마라. 그 돌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작이기 때문에, 엘프리데는 당시의 상황을 오직 소리로만 기억한다.

그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한 걸 20년 뒤까지 후회될 줄 알았으면. 그 말을 무시하고 실눈이라도 떠볼 걸 그랬다. 엘프리데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꺄아아아악!”

“아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탄과 비명.

“크아악! 주, 죽여라!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해자를 넘어온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노성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금속음.

“모, 몸이… 사, 사제를… 누, 누군가 사제… 커헉.”

“살려줘… 제발, 살려줘….”

20년 전.

불사교가 전세계 4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아스타르트의 파편을 소환해냈다.

‘청염의 마왕’이라는 이명처럼 온몸에 시퍼런 불꽃을 두른 여인. 뒤틀린 관절. 북실거리는 새하얀 털과 괴기스러운 얼굴. 짐승과 인간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엘프리데의 앞, 미텔란트 남부의 이름없는 해안 마을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으… 우, 흐흑….”

당시의 엘프리데는 약했다.

이 세상에 부활해 소환된지 고작 한 달. 12세의 어린 나이. 떠돌이 용병생활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일개 용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모를 하얀 머리 남자의 목소리에 따라 눈을 질끈 감았고. 그가 남겨줬던 보라색 빛깔의 은신의 룬을 꽉 쥔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 기, 그긱…. 아, 파아… 배… 고파… 나, 배고파아.

엘프리데는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거리감이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메아리 같은 괴성이었다. 언뜻 들으면 멀리서 외치는 듯, 다시 들으면 귓가에 속삭이는 듯.

바로 등 뒤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싫어… 저, 저리 가아… 살려… 살려줘… 누가 제발…!”

그것이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엘프리데는 이내 귀까지 틀어막았다.

그대로 시간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녀의 체감으론 천년만년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덥석. 무언가 엘프리데의 팔을 낚아챈다.

엘프리데는 경기를 일으키듯 사지를 마구 휘저으며 눈을 번쩍 떴다.

“…… 끝났다. 이제 괜찮다.”

하얀 머리의 남자가 엘프리데의 눈앞에 서 있었다.

온몸을 새빨간 피와 괴물의 살점으로 질펀하게 적셨다.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사냥 직후의 지친 야수 같은 몰골이었다.

“아.”

그리고 엘프리데는 그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다.

‘이 사람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 이후. 사람들을 통해 백야차, 적귀, 하얀 사신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범세계적으로 명성이 오르내린 하얀 머리 남자 베르슐츠.

결국은 ‘붉은 늑대’라는 의미로 ‘적랑’이 굳어졌는데.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별명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었다고 엘프리데는 항상 생각했다.

‘너무… 슬퍼 보인다.’

몬스터든 마왕이든 인간이든. 무언가를 도살한 뒤, 그 피를 뒤집어쓴 적랑은 무척이나 외롭고 슬퍼 보인다.

적어도 그 날. 피와 시체로 점철된 마을에서 엘프리데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사실. 딱히 생물을 도살한 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랑은 마왕에게 반려를 잃은 뒤론 사시사철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 * *

“… 아.”

엘프리데는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멍한 눈으로 한동안 이불을 응시하다가, 달뜬 한숨을 흘렸다.

“아으. 맨날 여기서 깨네에. 더 꾸고 싶다아….”

오랜만에 꾼 적랑의 꿈이다. 엘프리데는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며 침대에서 바둥거렸다.

새삼스럽게 잊지 못할 감정들이 엘프리데의 피부를 스쳤다. 벽 한 쪽에 빼곡하게 걸린 적랑의 초상화를 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벌써… 6개월이나 못 봤네에. 보고 싶다아….”

마르크트레스에서 만난, 마성의 냄새(?)가 나는 검은 머리 청년.

그와 엮여서 마녀사냥꾼으로서 싸움을 한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다.

이제 고작 셋 남은 마녀사냥꾼들에겐 엄청난 일이 있었지만.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적으로 돌아갔다.

물론 카발리어의 실종이나, 마르크트레스의 오래된 고름이었던 청염의 동굴이 갑자기 정화되는 등. 마르크트레스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 동안 떠들썩했다.

하지만 미텔란트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였으니까. 그만큼 국내의 반향도 적다. 엘프리데는 좀처럼 실감이 안 된다.

“세월이 참 빨라아….”

엘프리데는 애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적랑은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카발리어 은퇴 수속을 밟는 중이었고. 나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 인수인계와 후진 양성을 위해 힘쓰는 중이었다.

엘프리데는 새삼 적랑의 몰골을 떠올리며 시무룩해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 속상해 죽겠어어… 팔이… 그렇게 되다니이….”

한쪽 팔이 날아간 적랑은 딱히 괘념치 않았다.

그 자리에서 졸도한 엘프리데와는 천차만별인 반응이었다.

더 귀한 것을 얻었으니 됐다. 팔 하나로 마녀사냥의 핵심인 까마귀를 포섭했으니. 한참 남는 장사다.

적랑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그렇다. 웃었다. 엘프리데 앞에선 도통 웃지 않던 그가 전에 없이 활짝 웃었다.

예언의 요소들이 속속들이 모여가는 것이 원체도 기쁜 모양이었다.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에… 오빠느은….”

20년 전 그 때부터, 줄곧 적랑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였다.

엘프리데는 적랑의 광기어린 올곧은 감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적랑을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진 것이다.

‘뭐, 나도 마찬가지인가….’

그래서 엘프리데는 그날부로 강해지기로 했다.

그녀가 조사해본 바. 적랑은 당시 21세라는 나이에 이미 마르크트레스에서 예비 카발리어의 지위를 가진 강자 중의 강자였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미친 듯이 수련에 힘쓰며, 오직 강자들에게만 희한할 정도로 관심을 갖는 지독한 실력만능주의자.

세간의 평가는 그랬다.

“아내의… 죽음.”

거기서 엘프리데는 직감했다.

적랑을 뒤덮은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단박에 깨닫는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죽은 아내의 빈자리는 대체할 수 없다.

“아아. 원래 세계에서 좀 더 빨리 죽을걸.”

엘프리데 본인이 적랑에게 느꼈던 그 강렬한 감정. 분명 적랑도 아내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엘프리데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좋은걸 뭐 어째애….’

하지만 엘프리데는 멈추지 않았다.

사랑 같은 감정은 이미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극의 날부터, 이미 적랑은 엘프리데의 전부였다.

이 낯선 세상에서 그녀의 여생이 가진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낙이다.

―별세한 칠마존, 마를린 제카르프의 뒤를 이을 제31대 칠마존! 엘프리데 헥세 경 납시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프리데는 이 세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몸이었다.

전생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방대한 마력과 지능치. 덕분에 그녀는 레벨을 올려 능력치를 투자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냥 스킬만 익히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적랑에게 집착하는 엘프리데의 집중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는 15세라는 경악스러운 나이에 스승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스승이 죽자마자 칠마존의 자리를 꿰어찬다.

‘사실으은… 카발리어가 되고 싶었어….’

이유는 없다. 그냥 적랑이 카발리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트레스가 전통적으로 다루는 ‘기공술’은 엘프리데의 육체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그녀는 울며 겨자 먹듯이 칠마존이 되었다.

“아아. 그 땐 참 풋풋했지이.”

엘프리데가 칠마존이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적랑의 시야에 들기 위해서다.

그녀는 17세 성인이 된 시점부터 미친 듯이 적랑에게 편지와 기별, 전령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편지는 100년 전 용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어쩌구저쩌구… 당신은 미텔란트의 엘프리데 헥세를 찾아가 청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장 전통적인 편지 주술부터, 전령을 통해 보낸 사념파.

그리고 현혹의 주술이 담긴 기념품까지… 온 힘을 다해 관심을 갈구했다.

‘그 때 오빠도 멋있었는데에….’

엘프리데의 바람대로 적랑은 금방 찾아왔다.

그렇게 찾던 적랑이 대가리를 쪼개러 왔다고 전해주시오.

얼마 전에 갓 정식 카발리어가 된 20대 청년이 패기발랄하게 말하며, 미텔란트 왕성에 쳐들어온 것이다.

자칫 국제문제로 번질 뻔한 것을 엘프리데가 ‘워낙 친한 사이라 이러고 논다’라고 변명해서 어떻게든 막아냈다.

흑마법사 엘프리데. 혹시 마녀 디아나를 사냥하는 것에 관심이 있나?

그리고 노발대발 화를 내던 적랑은, 엘프리데가 칠마존이라는 것을 듣자마자 그렇게 물어왔다.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미친 짓을 해왔던 게 허무해질 정도였다.

그 때의 올곧은 눈빛을 떠올린 엘프리데가 피식 웃었다.

“진짜 바아보라니까아.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직 한 가지 일에 꽂혀서 그것에 맹목적으로 집중하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지.

야속하다면 야속하고, 그 점이 또 귀엽다고 생각하는 엘프리데였다.

‘아직까지도 비밀로 해주는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적랑은 엘프리데가 아직 예언의 정확한 내막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말이 되냐. 예언을 해석한 것이 자신이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사에게 고대 슈엘츠어 연구는 기본소양이다.

당연히 적랑과는 별개로, 예언과 관련된 내용은 이잡듯이 고대문헌을 뒤져봤다. 전부 빠삭하게 안다.

어설픈 연구가인 적랑보다도 훨씬 잘 안다.

마녀를 죽이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소환됐던 용사들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그 예언. 해석을 들려주는 게… 맞는 일이었을까아….’

아직까지도 엘프리데를 괴롭히는 의문 중 하나였다.

엘프리데는 적랑이 내막을 들으면 포기할 줄 알았다. 자기 손으로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다.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지잖는가.

적어도 엘프리데 본인은 격심한 공포를 느꼈기에, 당연히 적랑도 그럴 줄 알았다.

‘사랑은 광기라더니이… 씁.’

하지만 아니었다. 적랑은 지금까지도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정체 모를 검은 머리 청년과 함께, 기어코 첫 번째 의식을 성공시켰다.

마왕은 박멸해야 한다.

적랑의 내부에는 이미 그 한 문장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푸른 불꽃의 괴물이 날뛰던 밤. 엘프리데의 안에 적랑 밖에 남지 않았듯이 말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같은 게 있으면… 좋았을 텐데에.”

그녀는 시선을 조금 돌렸다.

탁자 위 초상화 속. 딸과 함께 웃는 젊은 시절의 적랑이 작은 액자에 들어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흑마법의 비의에 다다르면 시간도 다룰 수 있다더니.’

스승한테 속았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시간을 다루는 흑마법이 있긴 하다. 하지만 신의 영역이다. 인간 수준에서는 불가능한 복잡한 술식과 방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한참 전에 죽어버린 스승이라 푸념조차 못한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 혹시… 마녀라면.”

이 세상조차 집어삼키고, 죽음도 초월한 마녀. 디아나 에스파다는 시공간도 정복했을까?

흑마법은 원래 디아나의 마법. 그 정수에 다다른 마녀는 시간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 혹은 치명적인 잘못된 선택을 돌이킬 방법도… 어쩌면 알고 있지 않을까.

“아효… 아무 짝에에… 쓸모없는 생가악….”

엘프리데는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차피 그녀는 결심했다. 지옥 끝까지 뒤를 졸졸 따라갈 거라고.

세상이 멸망하든, 끔찍한 대전쟁이 터지든. 적랑이 아무런 힘아리 없는 일반인으로 전락한다 해도. 그녀는 적랑의 뒤를 지킬 것이다.

‘슬슬… 왔으려나아….’

엘프리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석한 머리를 빗고 대충 화장한 뒤 예장복을 갖춰 입었다.

칠마존의 예장복은 로브라서, 옷맵시를 신경쓰지 않아도 돼서 좋다. 귀찮을 걸 싫어하는 그녀가 볼 때 칠마존의 유일한 장점이 이거다.

“엘프리데 님. 기별하셨던 손님이 응접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엘프리데가 방을 나오자마자, 방문 옆에 놓여있던 석상이 말을 했다. 골렘의 사념 전달을 이용한 일종의 음성사서함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엘프리데는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걸음걸이는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격조하셨습니까. 칠마존 엘프리데 경.”

그녀가 응접실에 들어가자, 한 중년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엘프리데도 로브 양쪽 귀퉁이를 들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네에. 실로 오랜만이네요오…. 할센베르크 변경백니임.”

광택이 없는 흑색 예장복. 반백의 머리칼과, 선 굵은 이목구비를 가진 중년 남자. 요한 폰 할센베르크 변경백이었다.

그는 약간의 의문을 담아 엘프리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본인이 여기까지 불려온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겠지.

‘우리를 싫어하는 마음도… 없진, 않을 거고….’

엘프리데는 마법 연구 밖에 모르는 미련한 칠마존들과 다르게, 나라의 시국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할센베르크의 상황을 일부러 묵살하고 있었다.

‘늑대 오빠랑 친구라는 걸 알았으면… 진작에 손을 써줬을 텐데에….’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이고. 그것이 마녀사냥꾼… 적랑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이 절친한 친구라는 걸 알았을 땐, 지금까지의 자기 행동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엘프리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문에 대답해줬다.

“백작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아. 오늘은… 상담 거리가 좀 있어서 초대했답니다아….”

“얘기라니.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건지….”

“그… 박정용 씨. 알지요오? 엘더리치 슬레이어의 주축인 그분과 마르크트레스에서 만났답니다아. 백작님이 북방에서 보여주신 용맹한 무용담을 많이 들었지요오….”

엘프리데는 계획대로 대충 박정용의 이름을 팔았다.

반응은 극적이었다. 변경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프리데를 쳐다봤다.

시선에 격한 환영과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와!! 정용 공을 아시는구려! 정.말.대.단.합.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박정용을 주제로 한 칭찬 토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엘프리데는 결국 10분 정도 듣다가 참다못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어, 이런 성격은 아니라고 들었는데에….’

엘프리데가 들은 변경백은 목석같은 성격에 철심처럼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대체 박정용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남자를 이렇게 구워삶았나. 엘프리데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아. 이거 결례를 범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지라 반가워서 그만.”

좀 머쓱한 표정이 된 변경백. 엘프리데는 슬쩍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엘프리데는 다시금 헛기침을 하고는, 용건을 살살 들이밀었다.

“뭐 어쨌든… 오늘 이렇게 초대를 드린 거언…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아.”

“말씀해보시지요.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칠마존 해보실 생각… 없으신가요오?”

순간 변경백의 얼굴이 웃던 채로 굳었다.

이내 눈을 조금 크게 뜬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 제가 잘못 들었는지요?”

엘프리데는 고개를 살살 저으며, 재방송을 해줬다.

물론 방송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용제국에 장기체류할 일이 생겨서… 칠마존을 은퇴할까 하는데에. 아시다시피 후임이 필요해서요오. 적합자느은… 당신 밖에 없다고… 옛날부터 생각했습니다아….”

그래. 적랑이 카발리어를 관둔 마당에 칠마존이 다 무슨 소용이냐.

이런 거추장스럽기만 한 자리 따위 때려치운다. 그걸 위해 할센베르크 변경백을 왕도의 자기 저택까지 불러낸 것이다.

“마침 엘더리치가 토벌된 이후론 북방도 한가해졌죠오… 그렇지요오?”

“예, 예에. 그렇긴 합니다만….”

“이제 변경백님 같은 인재가아… 그런 오지에서 썩는 건 국가적 손실이랍니다아…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했답니다아….”

적합자가 변경백 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실제로 칠마존에 버금가는 마법사이자, 미텔란트의 누구보다 뛰어난 검사. 성품이 지나치게 우직한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는 이였고. 엘프리데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용 씨한테 감사해야겠네에….’

칠마존의 자리는 들어올 땐 자유라도 나갈 때는 아니다. 조폭이 운용하는 업소마냥 후계자를 박아야 나갈 수 있다.

변경백이라는 대체재가 있었기에, 그녀는 감히 은퇴 같은 생각도 품을 수 있었다.

‘뭐어… 장난질을 미리 쳐놨으니. 어떻게든 되겠지이.’

지나치게 우직한 성격 때문에 사실 왕성 내에 변경백을 좋게 보는 이는 거의 없다.

거기에 관해서는 이미 6개월 동안 엘프리데가 벌여온 물밑작업이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남은 건 변경백이 직접 왕성에 행차하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론… 기대도 하고 있어어. 밑바닥 귀족의 유쾌한 반란.’

조만간 미텔란트 왕성은 변경백을 두 팔 벌려 환영하게 될 것이다. 사리사욕에 급급한 정치계의 축생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엘프리데는 혼자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히히… 기다려어, 늑대 오빠아….’

적랑은 아마 두 번째 예언. 마왕 자드키엘이 있는 운터란트로 갈 것이다.

본인의 한쪽 팔이 잘려나가 전투력이 대폭 삭감됐으니. 마녀사냥꾼에서 이제 두 명뿐인 실질 전투원, 박정용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얼핏 듣기로는 박정용의 수련을 도와준다는 소리가 오갔던 것 같다.

‘그 사이… 세 번째를 선수 쳐야지이.’

미지의 마왕 샤키엘이 잠든 용제국에 먼저 갈 것이다. 적랑과 박정용이 두 번째 의식을 마치고 찾아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놓는다.

세 번째 예언의 주인공. 마왕 샤키엘은 많은 것이 미지에 잠긴 마왕이다. 오죽하면 이명이 ‘미지의 마왕’일까.

미리 정보를 캐내기만 해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나 또… 칭찬해줄 거지이…?’

이번엔 정말로 기뻐서 졸도할 자신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할 날이 머지않았다.

엘프리데는 연신 기분 나쁘게 헤죽헤죽 웃으며, 장밋빛 내일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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