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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74화 (150/280)

174화

슬쩍 저택 내부 상황을 살폈다.

불타 무너진 건물은 재건이 한창이다. 또한 마당 한복판에 생소한 형태의 거대한 원통형 통로가 하늘로 뻗어올라 있다.

‘흐음.’

고개를 들어서 통로의 끝자락을 보니, 공중요새 레비아탄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걸 가리키며 적랑에게 물었다.

“저거 타면 되나요?”

레비아탄으로 직행하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프레임이다. 나이트레아와 적랑이 어제 설명해줬다.

나이트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턱짓했다.

“얘기가 빨라서 좋군. 탈 거면 함께 가자. 그게 수속받기도 편해.”

“예. 바로 갑시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나이트레아와 함께 엘리베이터 도착을 기다렸다. 쿠르르르, 원통이 빛나며 묵직한 기동음을 뿜어냈다.

적랑이 내게 슬쩍 다가오더니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전부 두고 가도?”

슬쩍 쳐다보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소리소문없이 빤스런했다는 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처한 것도 있지만. 갑자기 이런 결단을 내린 내 멘탈이 진짜 걱정되는 표정이다.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나중에 만나면 맞아 뒤지겠죠.”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적랑님도 사건 수습이 끝나면 바로 카발리어 퇴직하고. 운터란트에 기계팔 달러 온다면서요.”

“그렇긴 하네만.”

운터란트에는 무려 마도공학을 이용해 인조신체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당연히 ‘와! 오토메일!’이다. 연금술사 꺼라.

‘파일벙커가 이제 곧 손바닥에서 튀어나오겠네.’

물론 실제로 사용되는 용도는 대부분 군용이고. 비용이 천문학적이라곤 하지만.

카발리어인 적랑이 돈에 구애받을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든든한 인맥 나이트레아가 있으니 그쪽은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 나도 뭐 하나 달아달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준내 간지나겠네.

손에서 빔이 나온다던가. 모 닌자게임처럼 갈고리 줄이 나와서 막 입체기동을 한다던가. 적랑처럼 파일벙커가 나온다던가.

‘이 정도면 팔 하나 정돈 기계에 양보해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 적랑에게 대꾸했다.

“그 때는 다른 사람들 데려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십쇼. 한 몇 개월은 걸리죠?”

“그렇게 될 걸세. 최소한 일국의 장군으로서 깔끔한 마무리를 짓고 갈 생각이니.”

“알겠습니다.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내놓겠습니다.”

“으음.”

내가 운터란트에서 해야 할 일.

망자의 계곡 심층부에 숨어있다는 마왕 자드키엘. 놈을 죽여서 마녀살해의 두 번째 의식을 진행하는 것.

지금 하는 일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확실해진 게 있다.

‘나는 영웅도 아니었고. 용사도 아니었다.’

이세계 오고 타이틀만 바뀌었지.

내 알맹이는 여전히 무력한 일개 막노동꾼 새끼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일행을 전부 떼어 놓고, 혼자 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하려는 건 복수의 일환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세상을 구하는 것과 결부될지는 몰라도. 내 의도는 지극히 불순하다.

사사로운 내 일에 더 이상 주변인들이 말려드는 게 싫다.

정말 끔찍이도, 진절머리나게 싫어졌다.

“제가 살던 곳에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라’라는 말이 있거든요.”

네 주제를 알고, 비빌 자리 골라가며 비비라는 소리다.

괴물에게 무참히 뜯어먹혔던 설백. 사지가 절단돼 피투성이로 죽었던 세스나. 여관 벽면에 박제된 제나. 내 손에 상반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논.

그리고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린 루시까지. 나는 절절히 실감했다.

“막상 디비져 누워보니. 내 이불이 존나게 좁아터졌더라 이 말입니다.”

안 뒤지면 뭐하냐.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적이다.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지키기 어려운 일개 범부다.

목구멍은 포도청이다.

“못 지킬 거 같으면. 욕심도 부리지 말아야죠.”

나는 일말의 주저없이 대꾸했고. 적랑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나이트레아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이트레아가 허, 하고 의미심장한 한숨을 흘린 것 같았다.

“귀찮은 역할을 맡기는군. 치정극에 얽히는 건 극구사양인데.”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적랑이 쓰게 웃으며 궁시렁거렸다.

또 저 소리.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농담에 맞장구를 쳐줬다.

“치정극은 무슨. 케른에서도 그러시더니, 자꾸 실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 내 딸의 앞날이 걱정되는군. 경쟁자도 많은데 본인의 정신상태는 이 지경이니. 이렇게 연애사가 험난해서야.”

“갑자기 카르는 왜요. 쓰레기 같은 놈팽이가 집문서 뺏었답니까?”

“음?”

“음?”

뭔가 이상하다.

지금 대화하는 핀트가 살짝씩 어긋난 느낌이다.

적랑도 그쯤에서 눈썹을 틀어 올리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모르는 척을 하는 겐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겐가?”

“어, 어느 쪽이라도 진짜 모른다 하지 않겠습니까.”

적랑의 우문에 나는 현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팅―. 청명한 울림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캡슐처럼 생긴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환한 빛을 뿜어냈다.

엘리베이터로 먼저 들어간 나이트레아가 손짓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맞는 말이군. 뭐…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닌 건 변함없네만.”

적랑은 나를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웃었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나도 마주 웃어줬다.

그러다 문득, 적랑의 허전한 오른 팔뚝 위로 먼지 같은 것이 내려앉았다. 적랑과 나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었다.

“… 오.”

헥터의 습격 날에는 비였는데. 오늘은 날씨가 한참 더 추워서 그런지 눈이 내렸다.

그 때 비가 내리지 않았던 다른 전생에선, 오늘 눈도 내리지 않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이번 겨울은 꽤 늦었군.”

적랑이 환부를 긁적이며 말했다. 눈 때문에 시려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

나는 한동안 말없이 이세계에서 맞이한 첫눈을 감상했다. 나이트레아도 날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하늘에 시선을 박았다.

그러자 적랑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최대한 처자들이 화나지 않게 설명해 보지. 내가 강제로 시켰다고 해두겠네.”

“다음에 만났을 때 저 죽지 않게끔만 해주십쇼.”

“너무 기대는 하지 말도록. 나처럼 팔 하나 정도는 염두 해두게.”

“오우야.”

여러 가지 의미로 등골이 썰렁한 적랑의 농담을 마지막으로, 나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스르륵. 문이 닫힌다. 적랑의 씁쓸한 얼굴이 천천히 좁아진다.

위이이잉.

엘리베이터가 기둥 안을 미끄러져 올라간다. 생각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다. 유리벽 너머로 지상의 풍경이 빠르게 멀어진다.

나는 의미없는 감탄사를 낮게 흘렸다.

“내가 네 일행이었으면. 아마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세상 끝까지 쫓아갈 거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만 남자, 나이트레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시선을 엘리베이터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파란 머리칼을 배배 꼬고 있었다.

“허.”

그럴 거 같이 안 생겨서 참견도 할 줄 아는군.

첫눈 버프로 감성이 폭발했나.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눈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좀 마성의 매력을 갖고 있긴 하죠.”

“마성의 매력은 모르겠고. 네 마빡에 총알 한 방은 박아줘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서.”

“… 오우야.”

“다들 자기 소신이 있고. 자기 의지로 네 일행이 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잖나. 그 여자들이 너한테 지켜달라고 떼라도 쓰던가? 일행들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해.”

생각보다 세스나와 설백한테 과몰입을 빡세게 했는지, 나이트레아는 차가운 눈빛을 흘렸다.

그녀는 나를 압박하듯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신이 아니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어. 왜 타인의 죽음에 그리 집착하지? 왜 혼자 자격지심에 도망치려 하는 거냐. 사내새끼의 꼴같잖은 자존심이냐?”

“흐하.”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조소가 섞여 있었다.

당연히 나이트레아는 미간에 골이 패였다.

“뭐가 웃기냐.”

“대한민국 흙수저 새끼가 세상 살 때 제일 필요없는 게 뭔지 알아요? 자존심입니다.”

“… 뭐?”

“뭔 쫀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습니까. 내가 뭐 걔네들 걱정해서 이러는 거 같습니까? 그냥 내가 무서워서 이러는 겁니다.”

“…….”

“아가리 합시다. 개깝치지 마시고.”

나이트레아는 순순히 입을 닫았다.

내 패기에 지려서 그런 건 아니고. 흉인 살포를 써서 그렇다.

말로 한다고 닥칠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 레벨이 낮은 그녀에게 강제 아가리 봉합술을 시전한 것이다.

‘숨길 거 뭐 있나.’

소중해진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는 게 무섭다.

정확히는 지키지 못해서 내가 점점 망가지는 게 무섭다.

그래서 무거워진 손을 털어낸 거다. 빤스런 마려워서 후다닥 빤스런 했다. 꼽냐 X발.

“네가 X발 압니까?”

까짓 거 일 수틀리면. 깔끔하게 자살하고 사념 회수를 안 하면 되지 않냐고?

그래. 기억은 안 나겠지. 그래서 몇 번인가 그렇게 하려고도 했지.

“내가 좀 더 잘했다면, 이런 개족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분명 더 괜찮은 미래가 있을 건데. 고문 같은 희망 때문에 뒤져도 포기 못하는 심정. 아냐고요.”

그러나 그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 오는 무력감과 절망은, 찐득하고 시커먼 흉마가 되어 내 영혼에 쌓인다.

몇 번이나 절감하고 이런 결단을 내렸다.

문자 그대로다.

죽어서도 나는 그걸 잊지 못한다.

“… 역시 이해할 수 없군. 용사라는 족속이 하는 말들은.”

나이트레아는 그렇게 일축하며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나와 나이트레아는 말없이 벽면에 몸을 기대고 엘리베이터의 도착만을 기다렸다.

애초에 내가 원한 침묵이다 보니 어색하진 않았다.

“…….”

나는 죽은 이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면면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다들 제 앞가림은 하는 사람들이라 걱정은 안 된다. 루시만 빼고.

‘루시를 짬때린 것 같아서 좀 미안하네.’

뭐, 두 처자들이 알아서 잘 케어해주겠지.

지랄 클래스가 남달라서 뒷바라지가 힘들긴 할 텐데. 사랑의 매(?) 몇 번 들고 나면 거짓말처럼 얌전해지니까. 그걸 빨리 깨닫길 바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올라왔을까.

문득 삐빅, 하는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경고 ? 지나친 이격]

[상세: 불사의 마왕이 수호자 박정용과 5km이상 이격되었다. 수호자 근방으로 불사의 마왕이 강제 이동된다.]

나도 모르게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엥?”

파팟!

허공이 푸르게 일그러지나 싶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의 루시가 내 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나는 루시를 가만히 쳐다보다 상황을 간신히 이해했다.

“아.”

… 그래. 루시와 내가 멀리 떨어지면, 혹시 무슨 사달이 나는 게 아닌가 싶긴 했는데. 그 결과를 지금 이렇게 알게 되는군.

나는 짝, 소리 나도록 이마를 짚었다.

“어엉?”

루시는 뭔가 입에 잔뜩 우겨넣고 있었다.

감자튀김 같은 걸 손에 잔뜩 들고 있는데, 그거 같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내 얼굴을 보고 길게 탄식했다.

“야 용사! 너만 불꽃놀이 명당 찾아서 이런 좋은 데로 왔느냐?! 이 못돼 처먹은 수호자 쉑! 나한테 보고는 못 할망정 치사하게…!”

그러나 루시의 노성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피이잉― 퍼펑! 발 아래서 들려온 우렁찬 폭발 소리 때문이었다.

“…… 와아.”

궤도 엘리베이터는 바닥도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덕분에 발아래서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불꽃놀이가 아주 잘 보였다.

“아핫. 나 이런 건 처음 본다! 예쁘구나.”

루시는 넋을 놓은 채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불꽃놀이의 잔상을 한없이 눈으로 쫓았다.

루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하하.”

… 나도. 네가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다.

도망도 못 치는군. 이 발 달린 체크포인트 갱신기는 곧 죽어도 함께할 팔자인가 보다.

펑―! 퍼퍼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간다. 루시의 넋 나간 미소는 폭죽색으로 알록달록 물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레비아탄을 향해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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