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73화 (149/280)

173화 넌씨눈

무신제의 막바지가 다가왔다.

“우오오오!”

“하아앗!”

기합과 함께 두 명의 전사가 경기장 위에서 격렬하게 맞붙는다.

투두두두! 신형이 경기장을 종횡무진하며 둔중한 충격음을 쏟아냈다. 카발리어 쟁탈전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경기인만큼 박진감이 굉장하다.

“와아아아아!”

선수는 둘 다 면식이 있었다.

한 명은 나와 본선전에서도 맞붙었던 예비 카발리어, 오스카 라일. 나머지 한 명은 단상에서 계속 인간 확성기 역할을 하던 중년 카발리어다.

이름은 아카마트 펠세이든.

‘질풍의 기사’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듯하다.

아카마트는 내가 봐도 지금까지 등장했던 카발리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실력자였다. 옆에서 다른 관중들도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이번이 몇 연승째야?”

“24연승이라니까! 진짜 엄청나다고!”

“역시 다들 질풍의 기사에게 막히는구만!”

질풍의 기사의 인기와 실력을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마르크트레스 출신인지 이쪽도 맨손격투가였는데. 이명처럼 질풍 같은 발차기의 연격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상대하면 나라도 좀 고전하겠다 싶다.

“크,… 우우욱!”

그에게 도전하는 예비 카발리어들은 하나같이 그 연격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그건 지금 대전 상대인 오스카 라일도 마찬가지다.

카앙, 카카캉! 버거운 신음을 흘리며 발차기를 막아내는 오스카. 하지만 점점 주춤주춤 밀려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끝났네.’

그 시점에서 사실상 승부는 났다. 더 볼 것도 없다.

나는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에 앉은 일행들을 스윽 둘러봤다.

‘… 좋아.’

다행히 경기장의 두 사람이 워낙 화려하게 싸우는 통에, 일행의 이목이 한껏 집중돼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슬금슬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성공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무신의 투기장 입구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앗, 정용님! 화장실이라도 가세요? 그쪽 아닌데요?”

X발. 어느새 헐레벌떡 쫓아온 세스나가 내 소매를 붙들었다.

옆에는 루시도 같이 있었다. 최악이군. 너처럼 눈치 빠른 로봇은 싫어해, 세스나 양.

나는 방글방글 웃는 시선을 회피하며 대충 주워섬겼다.

“잠깐 저택에 볼일이 생겄어. 급한 일이라 먼저 좀 가본다.”

“아… 같이 가드릴까요 정용님?”

세스나가 선뜻 제안해왔다. 나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됐어. 너는 여기서 루시나 잘 지켜줘.”

“아 네. 그럴게요.”

세스나는 이번에도 이유를 일절 묻지 않았다.

그저 방긋방긋 웃는 얼굴 그대로, 루시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달라붙었다.

“… 읏?”

루시가 흠칫 발을 빼자 다시금 한 발짝 다가가고. 또 발을 빼자 완전히 들러붙어 팔뚝을 덥석 껴안아 버린다.

루시는 이내 경기를 일으키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 뭐냐! 놔라 이년아! 나는 내 마음대로 움직일 권리가 있다!”

“정용님이 시킨 일이라 안 돼요. 저랑 싸움 구경이나 해요 루시 씨!”

“이 무례한 계집! 네가 내 애미라도 되냐?”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면 아빠가 정용님이 될 텐데?”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루시가 처절하게 발악해봤지만. 아무렴 완력으로는 루시가 세스나에게 상대될 리가 없다.

루시를 질질 끌고 관중석으로 사라지던 세스나가, 내게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

멸흉검의 정보를 얻기 위해 뒷골목을 뒤지던 전생. 제나의 유해를 수습하던 전생의 기억이 가슴을 옥죈다.

그 때는 나한테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세스나였는데. 지금은 왜 저렇게 선뜻 나를 믿어준 걸까. 죄책감 들게 말이야.

‘정용님 혹시… 저 없는 사이 좋은 일 있었나요?’

그러고 보니. 청염의 동굴에서 돌아온 설백도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었다.

당연히 좋은 일은커녕 최악이었다. 마르크트레스에서 보낸 모든 순간이 박정용 인생 최악도르 수상감이었지.

그래서 왜 그런 걸 묻냐고 되묻자,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뭔가… 전에 느껴지던 음침한? 숨막히는 기운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서요.’

말하고 나서 황급히 “정용님이 음침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라면서 덧붙이기도 했지. 그게 흉마의 소멸 때문이라는 걸 아는 나는 어색하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스나가 선뜻 믿어준 것도 그래서인가.’

내게 쌓여있던 흉마가 모두 루시의 부활에 환원되어서?

그 기운의 차이가 쟤네들도 느껴지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

나는 쓰게 웃으며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명칭: 박정용]

[별칭: 163417413번째 정식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348]

[체력: 2800/2800 ?마력: 1500/1500 ?신체상태: 광증]

[힘: 397 ?민첩: 662 ?지능: 111 ?히어로 센스: 29]

레벨은 그대로지만, 마녀의 심장을 도려내는 퀘스트 때문에 능력치는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광증.’

전에는 ‘약한 광증’이었던 신체상태의 기본값이 ‘광증’으로 고정되었다.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흉마는 사라졌어도. 맛이 간 정신이 돌아오진 않는다는 건가.’

하긴. 지금 주변에 걸어다니는 일반인들 다 죽인다 해도, 나는 눈도 깜짝 않을 자신이 있다.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뭐가 미친 거란 말인가.

나는 상태창을 대충 물리고 적랑의 저택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면 마녀랑 형님이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것도 진짜라고요?”

가면서 수호 형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했더니 심심하진 않았다.

―뭐 그렇지. 이미 그 때 이 세상이 붕괴하기 직전이었어. 우리가 눈치챘을 땐, 수단 방법 가렸다간 세상 쪼개질 판이었다고. 꼴에 용사잖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지.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결과. 인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건가.

마침 수호 형님은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절찬리에 우리를 오해해서 달려드는 인류연합 기사단을 내가 혼자서 막아냈다. 그리고 무수한 희생 끝에… 세계가 붕괴하기 전에 디아나의 검은 마력이 세상을 뒤덮었지. 헥터와 알테어가 그걸 도왔어.

내 주변엔 죽 쒀서 개주는 팔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잠깐의 침묵 후에 추임새를 넣었다.

“흐음. 그래서요?”

―그 흰머리 아재한테 들었잖아? 엄청난 인명 피해가 뒤따랐지. 하지만 간신히 멸망은 저지했어. 나도. 헥터도. 알테어도. 평생 희생된 목숨을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맹세했다. 그래서 난 사실 헥터를 욕할 자격은 없지.

“…….”

―무슨 심정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주 잘 알아. 처참하고 진절머리 났던, 그 날의 재림을 보고 싶지 않은 거지. 차라리 이대로 세상이 망해버리는 게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거다. 그럴만한 광경이었어. 그 때는.

나는 수호 형님을 도망갈 길 없는 게스트석에 앉혀놓고,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내가 가진 의문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똥털… 미네르바는 형님을 진짜 배신자라고 여기고 있던데요. 그 여자가 형님이 하는 짓의 자초지종을 몰랐을 리는 없잖아요?”

―그건 좀 입장 차이라고 해야 하나?

“입장 차이요?”

―그 미친년 포함 대부분의 아신들은 말이다. 원래가 일개 인간 나부랭이는 뒤지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루시가 죽었던 직후. 폭우 속에서 미네르바와 나눴던 대담을 떠올렸다. 분명 지금 수호 형님과 비슷한 발언을 했었다.

그리고 수호 형님이 말을 이었다.

―아신들은 처음부터 세상이 붕괴하도록 내버려뒀다가. 새로운 세상을 다시 구축하길 원했다고. 세상도 피조물도 물갈이를 해버리는 거지. 좀 더 안정적인 것들로.

“… 워우.”

―그 야심찬 계획이 디아나와 나 때문에 엎어졌다. 결국 불안정한 지금 세상을 발바닥 불나게 유지 보수할 처지가 됐으니. 날 좋아하겠냐?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신 자매뿐일걸?

“아 그래. 그것도 좀 궁금했는데요. 그 트리오는 형님을 왜 그리 좋아한답니까?”

―그냥 걔네는 인간의 목숨이라는 장난감이 몰수당하는 게 싫었던 거지. 행동만큼 사고방식도 단순한 애들이야. 그래서 장난감을 지켜준 나한테 협력한 거다. 대단한 이유는 없어.

“허어….”

이미 적랑의 입으로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져서일까. 수호 형님은 신비주의 컨셉을 벗어던진지 오래였다.

아니지. 원래 신비한 느낌은 딱히 없었던가?

“그런데 말입니다. 몬스터는요? 마족들도 형님이 풀었다면서요.”

―어, 그건….

여기서 아주 잠깐, 수호 형님의 청산유수 같던 썰풀이가 멈췄다.

뭔가 멋쩍어하는 듯한 웃음과 함께 그는 말했다.

―내 나름대로 없는 대가리 쥐어짜서 말이야. 무너진 생태계 좀 살려보자고 다른 이세계의 생명체들을 풀어놓은 건데. 이게 디아나의 검은 마력이랑 이상하게 반응을 하더니… 짠! 개트롤을 해버렸지 뭐야. 헤헷.

“헤헷은 X발. 나가 뒤지십쇼 형님.”

디아나와 형님이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킬 때. 소환됐던 용사는 총 셋뿐이었다.

한수호. 헥터 카사스. 그리고 알테어 바토리라는 여자.

이후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용사들은, 수호 형님이 싸지른 빅똥과 마왕을 저지할 겸. 절망적으로 줄어든 인류의 개체수를 메꿀 궁여지책으로 아신들이 벌인 짓이다. 형님은 그렇게 설명했다.

대화를 하다보니 적랑의 저택까지 금방이었다.

“적랑님. 접니다.”

대문 앞에서 노크를 한 뒤 잠깐 기다렸고. 적랑은 곧 문을 열어줬다.

옆에는 나이트레아도 함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목례로 슬쩍 인사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운터란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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